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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두 영국인의 선택 (1) (113/500)


113. 두 영국인의 선택 (1)
2021.10.21.


민우는 도서관에 들러 책을 찾았다. 민영환 교수의 노트에서 본 몇 가지 개념이 애매해서, 원서를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거대한 책꽂이를 오가던 민우가 책을 발견했다. 표지만 보면 절로 졸음이 올 것 같은 그런 책이었다.

‘바로 읽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좀 아슬아슬하네. 빌려야겠다.’

오전 수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민우는 책을 가지고 대출실로 내려왔다. 근로학생이 민우의 학생증에 바코드를 찍었다.

모니터를 보던 남학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죄송한데 대출 제한에 걸리셨어요. 20권 다 차셨는데.”

“그래요?”

최근 논문을 쓰느라 책을 이것저것 많이 빌린 탓이었다. 명인대 대학원생은 총 20권을 빌릴 수 있고 기간은 한 달이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민우는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내 근로학생에게 건넸다.

“그럼 이거 반납할 테니까 처리해 주세요.”

“예.”

바코드로 등록을 마친 근로학생이 책을 건네며 물었다.

“근데 대학원 가면 책을 이렇게 많이 읽어요? 벌써 100권 넘게 빌리셨네요.”

“사람마다 달라요. 헌책 못 읽어서 사 보는 사람도 있어요. 논문 위주로 보는 사람들도 있고.”

“저도 내년에 대학원 가려고 하는데 걱정이네요.”

대학원이라는 한마디에 생판 모르고 지내던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전공이 뭔데요?”

“경제학이요.”

사회과학 쪽은 원서 사랑이 대단하다. 민우는 루카치의 안경을 추천해 주고 싶었지만, 싱긋 웃으며 힘내라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인문관을 향해 걷고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 민우 군. 다음 주 월요일 시간이 있을 때 연구실에 한 번 들르게. 노력의 결실이 책으로 나왔네.

강철훈 교수의 문자였다.

민우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저번 학기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에서 번역했던 책이 드디어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것이다.

민우는 빌린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괜찮으시면 그날 오후에 들르겠습니다.

곧 회신이 왔다. 오후 2시 이후에 오면 좋겠다는 문자였다. 민우는 그때 뵙겠노라고 답장을 보내고 307호로 복귀했다.

307호는 조용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서걱거리는 펜 소리만 들렸다.

이수빈과 한진섭이 열심히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주예린이 두툼한 복사물을 책상에 올려놓고 정리하고 있었다.

다들 집중을 하고 있어서인지 민우가 들어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민우는 두 사람을 방해하는 대신 주예린에게 다가갔다.

“아, 선배.”

주예린이 두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민우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자료야?”

“넵. KCI 급 논문들 중 쓸 만한 걸 골랐어요. 선배 주제랑 잘 맞는 걸로.”

“정말 고생 많았다.”

민우는 자료를 훑어보았다. 일단 목차만 확인했는데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애초에 민우가 가지고 있는 자료 리스트를 넘겼기 때문에 목록에 있는 것들을 피해 자료를 모았다. 다들 처음 보는 논문이었다.

새로운 아이템을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이제 이걸 머릿속에 넣는 게 문제겠네.”

“역시 다 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요약이라도 해드릴까요?”

“됐어. 그거까지는 민폐지. 이걸로 충분해.”

주예린이 입을 가리고 감동에 찬 눈망울을 보였다.

“선배.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군요! 큰일입……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이 자식이.”

민우는 꿀밤을 때리는 척만 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첫 학기라 적응하는 것도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줬으니까.

그때 문득 민우가 이상함을 느끼곤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너 요즘 왜 오빠라고 안 하고 선배라고 하냐?”

확실히 호칭이 달라졌다. 일전에 대전에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예전엔 콧소리를 넣으며 오빠라고 부르곤 했는데, 요즘은 약간 점잖아진 느낌.

주예린은 헤헤 웃더니 이수빈의 눈치를 살짝 봤다. 그리고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 너무 친해 보이면 수빈이가 안 좋아할 거 같아서요. 다른 사람들 눈도 많고 하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기는 상아대가 아니니깐~

이 녀석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던가? 내심 감탄한 민우도 펜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 철들었네.

―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오빵♡이라고 불러드릴게요. 공짜임요.

민우가 신경질적으로 마지막 문장에 줄을 쭉쭉 그었다. 하트가 눈에 거슬렸다. 아무튼 민우는 다시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언제 시간 내서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네. 생각보다 꼼꼼하게 자료를 모았어.’

든든하면서도 기특했다.

자료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그가 열심히 발표 준비를 하는 수빈과 진섭을 향해 말했다.

“슬슬 수업 시작인데 가지?”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깜짝 놀란 이수빈이 자료를 파일에 넣기 시작했다. 진섭도 마찬가지였다. 곧 네 사람은 대학원 세미나실로 향했다.

오늘 오전 강의는 설예라 교수의 ‘한국현대비평론연습’이었다.

수빈은 세미나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발표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민우가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어제 발표 준비 다 했다고 하지 않았어? 일찍 잔다고 놀릴 때는 언제고 눈 빠져라 보고 있냐. 사람이 그러면 못써.”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좀 보려고요.”

“대충해도 이쁨받으면서 뭐가 걱정이야.”

확실히 설예라 교수는 수제자인 이수빈을 예뻐했다. 하지만 편애가 아니라, 그만큼 이수빈에게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빈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부담감 느낀다고요. 지도교수님이니까 잘 보여야지.”

“하긴.”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서지훈 교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던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학생들이 하나둘 세미나실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으로 설예라 교수가 들어왔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가고 수업이 시작됐다.

“오늘 발표가 누구였더라. 한진섭 선생?”

“옙.”

한진섭이 일어나 발표석으로 움직였다. 발걸음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오늘 설예라 교수는 하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포근한 미소는 덤이었다.

하지만 발표가 시작되자 그녀는 잔혹한 늑대로 변했다. 부족한 부분을 10분간 신랄하게 비판했고, 진섭은 넝마가 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반면 이수빈의 발표는 물 흐르듯 매끈하게 이어졌다. 한눈에 봐도 잘 쓴 발표문이었다.

그러나 설예라 교수에게 예외는 없어 보였다.

“이수빈 선생의 전제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노스럽 프라이의 비평 모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잘못된 부분과 보충해야 하는 개념이 칠판에 한가득 적혔다. 결국 수빈도 진섭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인간으로 돌아온 설예라 교수가 생긋 웃으며 마커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오늘 발표한 사람들은 카페에 자료 업로드 해주고, 다음 주 발표자들은 준비 잘 해오세요.”

“고생하셨습니다.”

학생들이 하나둘 세미나실을 빠져나갔다. 307호 팀원들은 가장 늦게 나왔다.

“학식이지?”

민우가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수빈과 진섭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고, 주예린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던 이수빈은 많이 실망한 표정이었다.

민우는 그 기분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자신도 민영환 교수에게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논문을 잘 썼다는 건 큰 착각이었다. 다른 의미로.

사실 민우의 논문은 또래에 비해 훌륭했다.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고, 이론을 적용하는 부분에 있어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민 선생님은 학부 수준의 논문이라 딱 잘라 말했지.’

민우는 민영환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부족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건 자만심을 품지 말라는 거였어. 박사 따고 나서라면 모를까. 벌써부터 잘 썼다는 얘길 들으면 기고만장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그것은 민영환 교수만이 아니었다. 명인대 교수들은 대개 발표와 논문에 엄했다. 칭찬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막상 지적을 들으면 기분은 좀 안 좋겠지만 견뎌내야 해. 그래야 더 강해질 수 있어.’

짧게 기합을 넣은 민우가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씩씩하게.

“다들 잘했어. 수빈이 발표는 배울 게 많더라. 근데 섭이 넌 언제 그렇게 준비를 많이 한 거야? 아침에 우는 소리 엄청 하드만. 기만자야 아주.”

“아 몰라. 배는 고픈데 입맛이 없어졌어.”

“나두요.”

“입맛이 없을 땐 학식이 최고지. 자, 갑시다.”

민우는 두 발표자를 다독이며 학생회관으로 향했다. 어려울 때 격려해 주는 것. 그게 동료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 * *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월요일 오후 2시.

지음사 출판기획실 회의실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고두열 과장과 막내 김윤식이 테이블을 세팅하는 중이었다.

“번역본은?”

“여기 있습니다.”

맨 앞자리에 번역본 두 개가 놓였다. <태엽시계>의 영문번역본이었다. 그 옆자리에도 동일하게 번역본이 놓였다. 검토 위원이 두 명인 것이다.

번역본 하나는 민우가 번역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각종 번역상을 휩쓴 프로 번역가 김태현의 것이었다.

“확인 제대로 했지?”

“물론이죠.”

“저번처럼 실수하면 시말서로 끝나지 않을 거다. 그런데 검토 위원들은 몇 시에 도착 예정이야?”

“두 분 모두 시간 맞춰서 도착한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앨런 스미스 교수님이 직접 클로에 페일럿 씨를 모시고 온다고 하네요.”

고두열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 스미스는 외국어대 전임교수로 영국 출신이었다. 한국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번 검토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클로에 페일럿은 마찬가지로 영국 출신으로, 앨런 스미스와 친분이 있는 여류 작가였다. 때마침 한국에 체류하고 있어 초빙했다.

“그런데 왜 검토를 두 명이서 하나요? 앨런 교수님 하나로도 충분할 거 같은데.”

“성별에 따라 문학적 감수성이 다를 수 있으니까. 남자 하나 여자 하나 해서 검토를 하는 거야.”

“아하, 그렇군요.”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여야 하나 싶기도 했다. 번역가 김태현과 컨택이 됐다면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도 될 것 같은데.

고두열이 회의감에 잠긴 사이 김윤식이 물었다.

“아무래도 김태현 씨의 번역본이 뽑히겠죠?”

“그렇겠지. 한영번역 쪽으로는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분이잖아. 김영화 작가 첫 작품도 영어로 번역한 경력이 있으니 여러모로 이해가 깊지.”

“그런데 실장님은 왜 박민우 씨에게 번역을 맡긴 걸까요.”

“그걸 확인하려고 이 자리를 만든 거잖아.”

고두열 과장의 두툼한 손이 김윤식의 어깨를 툭툭 쳤다. 곧 검지가 천장을 가리켰다. 곧 두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시간이 흐르고, 외국인 검토 위원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앨런 스미스는 금발의 중년이었는데, 키가 매우 컸다. 그는 유창한 한국말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클로에 페일럿도 마흔이 넘은 중년이었다. 작고 동그란 안경을 썼는데 아예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고두열 과장이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게도 무척 특별한 경험입니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앨런 스미스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클로에 페일럿의 통역은 그가 맡았다. 클로에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나누고 고두열 과장은 두 사람을 원고가 준비된 자리에 앉혔다.

앨런 스미스가 물었다.

“이 두 원고 중 잘된 쪽을 고르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공정성을 위해 번역가 이름은 마스킹 처리했습니다.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검토해 주십시오.”

고두열 과장이 자리를 비웠고, 말단인 김윤식만 회의실에 남았다. 두 영국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원고 검토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두 영국인들이 원고 검토를 마쳤다.

김윤식이 밖으로 나가 고두열 과장을 불렀다. 마침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한달음에 달려와 그 결과를 들었다.

“두 번역본 모두 훌륭했습니다. 영국 영어에 대한 이해가 돋보입니다. 하지만 디테일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의 의견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앨런 스미스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번역본을 고두열 과장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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