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Life is C between B and D (3)
(112/500)
112. Life is C between B and D (3)
(112/500)
112. Life is C between B and D (3)
2021.10.18.
노트를 읽다 보니 밤을 꼬박 새웠다.
하지만 민우의 얼굴은 오히려 푹 자고 나온 사람 같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노트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한마디로 어려웠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머리를 짜내다 보니,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지식을 얻는 또 다른 방법을 깨우친 것이다.
‘그래도 감은 잡았어. 길이 보이는 거 같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민우는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정공법으로, 노트와 참고문헌을 읽으며 실존주의를 공부하기로 했다.
누가 본다면 미련한 짓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시간 낭비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민우는 그러한 경험들이 자신의 피와 살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민영환 교수의 노트는 그만큼 특별했다.
‘돌아가도 괜찮아. 난 아직 젊으니까.’
민우는 수빈에게 모닝콜을 해 주고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자취방을 나섰다.
아침 공기가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버스를 타기 전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 두 개를 샀다. 그것을 가방에 넣고 명인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유를 되찾으니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문득 길가를 걷는 사람들의 옷이 더욱 두꺼워졌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곧 크리스마스구나.’
솔로 생활 28년. 크리스마스를 애인과 함께 보낸 기억은 없다. 집에 틀어박혀 게임 이벤트를 즐긴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수빈이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질 못했다.
최근엔 여러 가지로 바쁘다 보니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다.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다였다.
그래도 서로 사이가 멀어지거나 싸우는 일은 없었다. 캠퍼스 커플인 덕에 시간 가릴 것 없이 얼굴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면 학회도 끝날 시점이니까 시간적으로 여유는 있는데. 뭘 하지?’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거나 카페에 가는 것 외에 특별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날이 추우니 실외활동은 어려울 것이다.
‘역시 누나 찬스를 써야 하나. 수수료가 장난이 아니긴 하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으니까.’
여자의 마음은 여자에게.
첫 연애의 서툰 부분을 누나의 도움으로 잘 이겨내고 있었다. 일전에 선우기획 옥상에서 받은 가르침도 마음에 새길만했다.
민우는 생각난 김에 누나에게 톡을 하나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진 않았다. 출근 준비하느라 아마 지금쯤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핸드폰을 넣으려고 할 때 전화가 왔다.
‘누나인가?’
하지만 액정에 표시된 이름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민우는 통화 버튼을 잽싸게 터치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 학교 가는 길이냐?
“예. 지금 버스 타고 가고 있습니다.”
서지훈 교수였다. 이른 아침에 이렇게 전화를 해 오는 경우는 드물어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다.
― 이야, 여전히 부지런하구만. 이따가 시간 되면 잠깐 얼굴이나 보자. 지금 명인대에 와 있다.
“명인대에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 비즈니스.
비즈니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대학에서 비즈니스라니.
가끔 서지훈 교수는 이렇게 은유적으로 말하곤 했다. 실례가 될까 민우는 그 내막을 묻지 않았고, 지금도 그랬다.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카페에서 뵐까요?”
― 인문관 지하 카페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경영대 쪽 미엘에서 보자.
“알겠습니다.”
원래 내리던 정류장에서 한 정거장 더 가서 민우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쪽이 경영대와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이라 카페엔 사람이 드물었다. 아직 오전 9시가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테라스 쪽에 서지훈 교수가 앉아 있었다. 평소에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는데, 오늘은 정장을 빼입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어, 왔냐. 뭐 좀 마셔라.”
서지훈 교수가 카드를 건넸다. 민우는 그것을 받아들고 따뜻한 커피를 사서 자리로 돌아왔다.
서지훈 교수는 팔짱을 낀 채 테라스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상아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응? 갑자기 왜?”
“뭔가 걱정이 많아 보여서요. 선생님답지 않게.”
“하하하하.”
서지훈 교수는 크게 웃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은 채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너 요즘 잘 나간다면서? 송 실장한테 들었다. 폴라베어 북스 쪽하고 작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잘만 풀리면 대박이겠어.”
“아직은 몰라요. 다음 주나 되어야 결과 나올 거 같은데요. 번역을 맡기로 해도 그 이후가 문제고.”
변수는 여러 가지였다. 폴라베어 북스에서 <태엽시계>를 거절할 수도 있었고, 문제가 생겨 계약 자체가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차라리 그럴 바에는 논문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는 게 나았다.
“잘됐으면 좋겠다.”
“저도요. 근데 명인대에서 강의 하나 하기로 하신 거예요? 비즈니스라면 그런 거밖에 없을 거 같은데.”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서지훈 교수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니코틴이 당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울 수 없는 곳이라 꾹 참았다.
“근데 너. 전에 송현우 선생님한테 나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었냐?”
“전에 출간한 책 선물해 드릴 때 몇 마디 하긴 했어요.”
“선생이라는 직함에 가장 어울리는 분이라고?”
“아, 예.”
“인마.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쩌냐? 송 선생님도 계시고 민 선생도 있는데. 그 사람들도 너한테는 선생인데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하면 그 사람들 체면이 깎이는 거잖아.”
서지훈 교수가 낮게 꾸짖었다. 그제야 민우는 아차 싶었다. 생각이 짧았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남의 대한 평가는 함부로 하는 게 아냐.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좋은 이야기를 하는 만큼, 나쁜 이야기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잘 기억해라. 세상이 그렇게 네 뜻대로 돌아가 주는 게 아니거든.”
잠시 말을 끊은 서지훈 교수가 씨익 웃었다.
“대학원도 사회생활의 연장이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신경 쓸 필요가 있지. 무조건적인 칭찬도 때론 독이 될 수 있다는 거 명심해라.”
“옙. 명심하겠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이야기를 꺼내니 왠지 서지훈 교수는 낯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 자기가 누군가를 가르쳐 줄 깜냥이 되던가?
서지훈 교수가 화제를 바꿨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너한테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다.”
“저한테요?”
민우는 눈을 끔뻑거렸다. 서지훈 교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하나 가정을 하지. 너한테 맛있는 사과와 맛없는 사과가 하나씩 있다고 치자. 이 사과 두 개를 다 먹어야 하는데, 맛있는 것부터 먹을래 아니면 맛없는 것부터 먹을래?”
“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서지훈 교수가 워낙 진지하게 물어서 웃지도 못하고 딴소리도 하지 못했다.
‘맛있는 사과는 뭐고 맛없는 사과는 뭐야? 뭔가 비유적인 표현 같은데. 뭘 의미하는 거지?’
서지훈 교수의 주변 상황을 짐작하던 민우는 잡념을 치웠다. 눈앞에서 그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는 간단하게 접근했다.
자신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고 솔직하게 답했다.
“저는 맛없는 사과부터 먹겠습니다.”
“이유는?”
“좀 단순한 생각이긴 한데, 맛있는 사과를 나중에 먹어야 좋은 뒷맛이 오래 남잖아요.”
“뒷맛이라…… 그렇군.”
서지훈 교수는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환한 미소가 걸렸다.
“얘긴 잘 들었다. 음, 좀 속이 시원해지는데. 역시 너한테 물어본 보람이 있어.”
“대체 무슨 일이신데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난 이만 가 보마. 괜히 배웅하지 말고 좀 앉았다 와. 여기 시원하고 좋네.”
자리에서 일어선 서지훈 교수가 손을 흔들며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민우는 제자리에 서서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큰일은 아니겠지? 나한테 물어보실 정도면.’
그렇게 생각한 민우도 곧 자리를 정리하고 인문관으로 향했다.
* * *
이른 아침이었지만 307호 연구실 안에는 수빈과 진섭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책상에는 프린트와 전공 서적이 깔려 있었다.
이수빈이 활짝 웃으며 민우를 맞았다.
“왔어요?”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 11시 수업 있잖아요. 과제 발표하는 날이라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었어요.”
확실히 책상 위에는 자료로 가득했다. 저번 주에 민우가 과제 발표를 했으니 이번 주는 수빈과 진섭 차례였다.
“근데 섭이 너도 오늘 발표 아니냐?”
“그렇지.”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진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반쯤 내려놓은 듯했다.
민우는 가방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 진섭에게 던졌다. 깜짝 놀란 진섭은 얼떨결에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뭐야, 이건.”
“어제 외상한 상담비.”
상담비라는 말에 진섭이 다가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환한 미소와 함께.
“일 잘 풀렸나 보네?”
“뭐, 그렇지.”
“역시 박민우. 한다면 해내는 사나이구만!”
그때 이수빈이 끼어들었다.
“뭐야. 어제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별일 아냐.”
민우가 수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빈은 무슨 일일까 턱을 괴며 민우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진섭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내가 재조명이라는 테마에 너무 구속되어 있었던 것 같아. 시야가 좁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다르게 풀이할 만한 방법을 찾았어.”
“다르게 풀이한다. 어떻게?”
“새로운 관점으로 뭔가를 보여준다가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관점으로 돌아가서 작품을 해석한다는 의미로 재조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어. 이것도 나름 신선할 거야.”
민우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진섭은 그 표정을 자주 봐 왔다. 그때마다 민우는 좋은 성과를 거뒀다.
“강일이가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뜬금없는 한마디를 던지며 한진섭이 캔을 열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치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캔을 다 비운 그가 쓰레기통으로 휙 던졌다. 이수빈이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한소리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민우가 물었다.
“강일이가 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너, 엄청 무섭거든. 소름 돋을 정도로. 이게 석사 2학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래?”
민우는 확인 차 이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섭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향후 계획은?”
“일주일 정도 잡고 공부를 할 거야. 민 선생님이 주신 노트는 다 머릿속에 넣어야 할 거 같아서. 본론 작업은 11월 중순에나 들어갈 수 있겠고.”
“11월 중순이면 너무 늦지 않아요? 발표 일주일 전에 완성본을 학회에 보내야 하잖아요. 그래야 토론자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빈이 말대로라면 12월 9일까지는 완성을 해야 한단 소린데. 끄응, 어렵구나.”
학회 경험이 있는 수빈이 정확히 짚었다. 물론 그 사실은 민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가방을 들었다.
“뭐, 어떻게든 해 봐야지.”
“어디 가려고요?”
“도서관.”
307호를 나서려던 그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멈춰 섰다. 돌아보니 수빈과 진섭의 시선이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어제 누군가 그러더라고. 이게 대학원생의 숙명이라고. 그럼 즐겨야지 별수 있겠어?”
민우가 손을 들고 307호를 나섰다. 이수빈은 저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진섭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보통 미소가 아니었다. 어딘가 악에 받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나오신다면야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한진섭이 발표문을 들었다. 펜을 들고 보충 내용을 적어 나갔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 이수빈이 농담 섞어 말했다.
“오빠 발표 포기했다면서요.”
“이 선생.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네.”
“소오름. 아재 개그 좀 하지 말라니까!”
한숨을 내쉰 이수빈도 발표문을 들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두 남자를 보고 있자니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