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Life is C between B and 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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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Life is C between B and D (2)
2021.10.15.
그가 앉아 있는 송현우 교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그간 어떠셨습니까?”
“나야 뭐 다를 게 있겠나. 일단 앉게.”
“예.”
서지훈 교수는 깍듯하게 움직였다. 평소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지만, 오늘은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분위기가 그만큼 엄숙했다.
송현우 교수는 서지훈 교수의 지도교수였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의 태도는 어딘가 애매했다. 정중하지만 그와 가깝지는 않은 것 같은.
“상아대는 어떤가? 요즘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던데.”
“재단에서 학과통폐합을 진행하려고 하다가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또 같은 얘기가 나오겠지요. 지방대의 숙명 아니겠습니까.”
“무산됐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명인대는 어떻습니까?”
“명인대라고 해서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정부 눈치 보는 거야 매한가지지. 게다가 사립대니 재단의 입김도 있고.”
밖에서 실례한다는 말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한복을 입은 종업원 두 명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곧 잘 차려진 한 상이 완성됐다.
하나같이 비싼 것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음식에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송현우 교수가 사기로 된 술병을 쥐었다.
“한잔 받지.”
“예.”
또르륵 소리가 나며 술이 잔에 담겼다. 무릎을 꿇고 술을 받은 서지훈 교수는, 병을 건네받고 송현우 교수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건배하지.”
“예.”
쨍.
잔이 부딪쳤다.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돌리고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송현우 교수도 술잔을 비웠기에, 서지훈 교수는 다시 그의 잔을 채웠다.
“편히 앉게.”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완고한 모습을 보여주는군. 미리 선을 긋는 겐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송현우 교수는 웃어 넘겼다. 그는 맨 앞에 있는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승현이는 요즘도 만나나?”
“가끔 얼굴은 봅니다. 지음사에서 이태준 전집 작업을 하고 있는데 책임자라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군요.”
“어쩔 수 없이라.”
송현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예나 지금이나 서지훈 교수의 단어 선택은 흥미로웠다.
“사이는 여전하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요. 그나저나 승현이가 자주 연락을 드리지 않나 보군요.”
송현우 교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허망한 느낌의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뭐, 집에서 나간 이후로는 연락이 뜸하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원래 잔정이 없는 아이지 않나. 나에게 나름 원망도 있을 거고.”
서지훈 교수가 침묵했다.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괜히 말을 꺼내 집안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송현우 교수는 술잔을 입에 댔다. 이번에는 반 잔만 비웠다. 승현의 일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와 마저 마실 수가 없었다.
화제를 바꿔야겠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재미있는 친구를 명인대로 보냈던데.”
“민우 말씀입니까?”
“그래. 얼마 전에 공저로 낸 단행본에 서명해서 가져오더군. 자네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었지.”
“욕이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재미있는 대답이라고 했지, 욕이 아니라는 말은 안 했는데?”
송현우 교수가 오랜만에 농을 건넸다. 엄숙한 느낌의 그였지만 농담을 하는 모습도 잘 어울렸다.
서지훈 교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옛 추억이 떠오르며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가 물었다.
“민우가 어떤 말을 했습니까?”
“자네가 어떤 선생이냐고 물으니까 민우 그 친구가 자기가 만난 교수들 중 가장 선생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분이라고 답했지.”
“이런, 녀석이 큰 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서지훈 교수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송현우 교수는 이해한다는 듯 웃기만 했다.
자신을 추켜세워 주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것은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민영환 교수가 그의 지도교수인데, 자신을 더 추켜세운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좋지 않은 그림이었다.
“민 선생도 과오가 있잖나. 민우 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여러 쪽으로 이야기를 많이 들었네. 모진 대우를 받았지만 힘들게 잘 이겨내고 있다고. 최근 성과도 아주 좋은 편이고. 오히려 자대생들이 긴장을 해야 할 판이야.”
“그렇게 봐 주시니 다행입니다.”
어느새 술잔이 비었다. 서지훈 교수의 잔이 아니라 송현우 교수의 잔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그는 술을 빨리 마셨다.
“오늘따라 약주를 빨리하시는군요.”
“그러게 말이네. 술이 잘 받는 날이라 그런가?”
뭔가 서두르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지훈 교수는 내색 없이 술병을 기울였다. 투명한 술이 술잔을 가득 채웠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송현우 교수가 대뜸 말했다.
“내 정년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아마 1년 남으셨지요?”
“그래. 여기저기 말들이 많아서 이후에 어떻게 할 건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건 변함이 없군.”
서지훈 교수는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 방금 나온 말 하나로 송현우 교수가 왜 자리를 청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현우 교수가 눈매를 좁혔다. 그 날카로운 눈빛이 서지훈 교수의 모습을 담았다.
“내년에 상경할 준비를 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민우 군을 보낼 때 이런 얘기를 했다지? 더 큰 세계를 경험하고 오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웃음이 나오던지.”
송현우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서지훈 교수의 잔을 채웠다.
“자네야말로 우물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싶은데? 해묵은 감정 때문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건 여러모로 손해야. 학생도, 대학도, 학계 모두의 손해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송현우 교수는 개의치 않으며 한마디를 꺼냈다.
“서울로 올라와서 내 뒤를 잇게.”
* * *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이 차가워졌고, 밤은 길어졌다.
민우는 <태엽 시계>의 번역본을 고두열 과장에게 보냈다. 다음 주 월요일, 문학을 전공한 현지인이 검토한다는 답장을 받았다.
지음사 일 대신 번역을 했기 때문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민우는 안경을 끼고 번역을 했지만, 어느 때보다도 신중히 작업했다.
결과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논문에 집중했다. 걱정한다고 해서 결과가 더 좋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안녕하십니까.”
반쯤 문이 열린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자 민영환 교수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민우는 다시 밖으로 나와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민영환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
“서론 수정이 끝났습니다. 한번 봐 주셨으면 해서요.”
표정을 굳힌 민영환 교수가 손가락을 까딱했다.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그는 논문을 받아들고 단숨에 읽어냈다.
“걱정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라.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으니. 자잘한 문제는 마지막에 손을 보면 되겠어.”
“알겠습니다.”
민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민영환 교수 연구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거대한 벽이 앞길을 막았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본론에 쓸 내용이 처음 계획했던 방식에서 조금 달라져 있었다는 점.
‘외서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관점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
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벽이 너무 높아 보였다.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내 힘으로 뛰어넘을 수 있을까?’
돌아가서 민영환 교수와 상의를 할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갈 무렵 한진섭이 맞은편에서 올라왔다.
“도서관 가냐?”
“아니.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보려고.”
“웬일이야? 도서관 지박령이 이렇게 일찍 퇴근을 다 하고. 근데 뭐 고민 있어? 표정이 우중충한데. 수빈이가 바가지라도 긁든?”
“그럴 리가 있겠냐.”
“나가자. 집에 가는 길이라며. 바람이라도 쐬자고.”
민우는 진섭과 함께 인문관 옆 쉼터에 앉았다. 10월 말, 바람이 꽤 서늘했다. 곧 눈이 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가만히 있는 진섭을 보며 민우가 물었다.
“담배는?”
“끊었어.”
왜 끊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민우가 물었다.
“잘돼가?”
“뭐 그냥 그렇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기분?”
“그래도 쉽게 포기 안 하네. 너 특기가 간만 보고 빠지는 거였잖아.”
“철들었다 생각해라.”
민우는 웃고 말았다. 주어가 빠졌는데도 대화는 잘 풀렸다. 이번엔 진섭이 물었다.
“그런데 넌 왜 표정이 그 모양이냐?”
“논문 때문이지 뭐. 조금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할까. 막막한 기분이 들어서.”
“그러니까 편하게 가라고. 랑느 박사님이 보내 준 논문을 그대로 쓰면 되는 거잖아. 왜 갑자기 노선을 바꾸고 그래?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골로 간다더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진섭도 마음속으로는 걱정이었다.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민우도 그것이 말뿐인 걸 잘 알았다.
“그래도 좀 의외네.”
“뭐가?”
“네가 자신감이 떨어진다는 말을 다 하고 말야. 너 자신감 하나 빼면 시체였잖아. 역시 학회 발표가 쉽지는 않은가 봐.”
진섭이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언젠가 자신도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힘내야지 어쩌겠냐. 그게 우리 대학원생의 숙명인 것을.”
평소라면 폼 잡는다고 한소리를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진섭의 말이 마음 한가운데를 정확히 뚫고 들어왔다.
대학원생의 숙명.
민우는 속으로 그 표현을 곱씹었다. 그 사이 진섭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간다. 술 필요하면 전화하고.”
“그래.”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민우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씻고 책상에 앉기까지도 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민우는 책상에 앉아 펜과 노트를 준비했다.
생각나는 대로 뭔가를 적으려고 했지만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진섭이 말이 맞아. 랑느 박사님이 보내주신 논문을 이용하면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너무 섣부른 생각이었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이 그만큼 복잡해진 것이다. 책상에서 일어선 민우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눈을 감았다.
‘일단 머리를 비우고 다시 잘 생각해보자.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마음 같아서는 이재환이나 최민식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받고 싶었다. 그들이라면 어떻게 하라고 분명히 알려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막힐 때마다 답지에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끝까지 발악은 해 봐야지.’
한 시간 정도가 흐르고 민우가 다시 눈을 떴다. 침대에서 잠시 뒤척이다가 시계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한 잔 마신 다음 다시 책상에 앉았다. 한숨 자고 나니 머리가 상쾌해졌다.
‘혹시 내가 너무 어렵게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문과 함께 민우가 시선을 내렸다. 텅 빈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민우는 펜을 손에 쥐었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텅 빈.’
그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상념.
민우는 그것을 구체화했다.
곧 민영환 교수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 이번 발표 테마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지만, 결국 싸움의 승패는 실존주의라는 사상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갈릴 거다.
민영환 교수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랬다.
‘실존주의 그 자체.’
머릿속이 감전된 것처럼 짜릿해졌다. 무의식적으로 민우는 ‘재조명’이라는 단어를 노트에 썼다. 이어 밑줄을 그었다.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얽매일 것 없이 기본에 충실한 관점으로 돌아가서…….’
민우의 머릿속에 새로운 캔버스가 펼쳐졌다. 붓을 들고 물감을 찍은 그가 거침없이 캔버스 위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해답이 선명히 그려졌다.
‘실존주의 철학 그 자체로 작품을 해석하는 거야. 내가 가진 젊은 감수성을 섞어서 시론(試論)을 쓰듯. 맞아, 바로 그거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민영환 교수가 준 낡은 노트가 쥐어져 있었다.
노트를 펼쳤다.
수많은 용어와 해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머릿속에 전부 넣어야 했다. 막막했다.
‘시간을 벌어야 해.’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민영환 교수가 남긴 주요 용어들을 거침없이 필사하기 시작했다.
시야 너머로 푸른색 글씨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번쩍!
그 지식이 오롯이 민우의 머릿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민우의 손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만년필이 멈추고 말았다.
‘아니. 이건 아니야.’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은 한 글자씩 정성껏 수기로 써서 노트를 만드셨어. 그런데 나는…….’
민영환 교수는 왜 수기로 노트를 만들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쉽게 답이 나왔다.
거기엔 루카치의 만년필조차 가르쳐줄 수 없는 어떤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지식을 얻는 게 목적이지만, 역시 그 과정도 그만큼 중요한 게 아닐까?’
민우는 스탠드 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영환 교수의 노트를 손에 쥔 채 거실에 있는 소파에 반쯤 드러누웠다. 가장 좋아하는 자세에서 그는 노트를 펼쳤다.
민우의 눈이 총명하게 빛나며 지식을 담았다. 그날은 새벽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