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 Life is C between B and D (1) (110/500)


110. Life is C between B and D (1)
2021.10.14.


샘플 파일에는 매뉴얼과 소설 파일이 들어 있었다. 민우는 우선 매뉴얼부터 확인했다.

‘번역 양식이구나. 라온북스와 크게 다를 건 없네.’

조금 자세하다는 것을 빼면 신경 쓸 게 없었다. 조판 양식 파일도 같이 들어있어 그 위에 바로 작업을 하면 될 거 같았다.

다음으로 민우는 소설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복권을 긁는 것 같은 기분인데? 과연 어떤 작품이…….’

페이지 로딩이 끝나고, 워드 창에 소설이 출력되었다. 제목과 저자를 확인한 민우가 흠칫 놀랐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김영화의 태엽시계!’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었다. 그런 작품을 번역할 수 있다니?

가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송승현 실장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민우가 원하던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망할. 기회가 너무 빨리 왔잖아!’

발표와 논문을 준비하는 것도 벅차다. 그 와중에 새롭게 번역을 맡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안 그래도 이따 현기혁 팀장이 새로운 번역을 제안하면 어떻게 거절할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단 민우는 샘플 번역본을 확인했다.

‘총 100페이지. 안경을 낀다면 금방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문제는 이후의 일이지.’

안경을 사용한다면 환상적인 번역이 나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계약이 진행되고, 실제 번역 작업에 들어가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발표가 잡힌 12월 중순까지는 일을 늘릴 수 없는 상황.

문제는 지음사가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음사는 대기업이다.

더욱이 번역서 의뢰를 해온 폴라베어 북스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였다. 민우의 사정을 헤아려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기회를 이대로 날리는 건 아깝고. 일단 송 실장님하고 이야기를 해보자.’

민우는 내선 전화를 들었지만,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로 하는 것보다는 직접 이야기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아차, 퇴근 시간이지?’

오후 6시가 넘어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민우는 15층으로 올라갔다.

* * *

다행히 송승현 실장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막 나가려고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노크가 들렸고, 민우가 들어왔다.

“아, 퇴근 준비하고 계셨네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긴 얘기가 아니면 지금 하세요. 내일은 출장 때문에 회사에 없을 예정이라서.”

“메일 보내 주신 거 때문에 왔는데요.”

민우는 송승현 실장의 자리로 가 사정을 설명했다. 현재 상황을 가감 없이 말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송승현 실장이 팔짱을 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었네요. 그러니까 결론은 맡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거죠?”

“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합니다. 샘플 번역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정식 작업은 학회 발표가 끝나야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송승현 실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무리할 줄 알았는데, 그는 선을 긋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난여름 병원 신세를 진 이후로 무리하는 것이 얼마나 민폐인지를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리하다가 또 일이 틀어지면 혼자 손해를 보는 것을 떠나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민우는 욕심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결정을 내렸다.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아쉬웠다.

하지만 민우는 생각을 달리했다. 준비만 잘 되어있다면 기회는 언젠가 반드시 또 올 거라고.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민우 씨 일 욕심 많은 사람이었잖아요?”

“지금은 학회 발표가 중요합니다. 일이 좀 커졌어요. 지도교수님 체면도 있고, 학교의 위신이 걸린 문제라서요.”

“그런가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저쪽으로 앉죠.”

민우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송승현 실장과 마주 앉았다. 서두는 송승현 실장이 열었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사실 <태엽시계>의 번역가는 민우 씨로 결정된 게 아녜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음, 그러니까 일종의 경쟁 테스트라고 해야 할까요? 기성 번역가의 작업물과 민우 씨의 작업물을 놓고 비교를 할 거예요. 그래서 더 우수한 쪽을 뽑는 식으로요.”

“확실히 저는 신인이니까 비교 대상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한영번역은 검증되지 않았으니까요.”

민우는 쿨하게 인정했다. 경험 부족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니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송승현 실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좀 내서 샘플 번역만이라도 해 봐요. 신인에겐 둘도 없는 기회가 될 테니까.”

“만약 번역을 맡게 된다고 했을 때 일정에 문제가 없을까요?”

“11월 중으로 검토를 하고, 12월에 폴라베어 북스로 샘플을 보낼 계획입니다. 아마 계약이 진행된다고 해도 내년 초는 되어야 할 거예요. 그럼 실제 번역은 내년 봄에나 들어가겠죠. 해외 사업은 민우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이 그렇게 빨리 진행되지는 않아요.”

“그렇군요.”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샘플 100페이지. 조판 기준이니까 안경을 낀다면 길어야 사흘 정도면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촉박한 것은 마찬가지. 민우는 스케줄을 놓고 고민했다.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려나? 분명 뭔가 있을 거 같은데.’

때마침 민우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윤정민 팀장과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실장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번 샘플 번역에도 번역비가 책정되어 있을 거 같은데, 번역비를 안 받는 대신 제 업무 성과로 인정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민우는 지음사 인문사회연구소 연구원 일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 일을 빼고 번역을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벌 수 있게 됐다.

쉽게 말해 돈 대신 시간을 선택하겠다는 이야기.

잠시 생각에 잠기던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하겠다는 의미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죠. 어차피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윤정민 팀장님께는 내가 따로 얘기해 놓지요.”

민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완성본은 10월 말까지 드리면 되는 거죠?”

“네. 출판기획실의 고두열 과장에게 완성 원고 보내면 됩니다. 앞으로 커뮤니케이션은 그쪽을 통해서 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송승현 실장은 사무실의 불을 끄고 나왔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 걸었다.

그녀가 물었다.

“근데 벌써 학회에서 발표를 해요? 이제 석사 2학기인데.”

“빨리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마침 기회도 생겼고.”

“주제가 뭐죠?”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의 재조명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송승현 실장. 학부 시절을 추억하는 듯했다. 미소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 감정이 많이 담겨 있었다.

“민영환 교수님이라면 잘 지도해 줄 수 있겠군요. 한때 실존주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셨으니까.”

“안 그래도 자료를 하나 주시더라고요. 직접 손으로 쓰신 건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혹시…… 노트?”

“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트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자주 언급되는 이름 중 하나가 그녀였으니까. 노트는 후배들과 공부한 내용을 수기로 적은 것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질 무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송승현 실장이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발표 준비 잘하고요.”

“옙.”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제야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핸드폰을 넣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약속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 * *

약속장소는 회사 바로 옆에 위치한 스몰비어 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무척 소란스러웠다. 손님이 상당히 많았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이 많네. 다른 데서 만나자고 할 걸 그랬다.’

한쪽 구석에 현기혁 팀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이유리 편집자가 인사했다.

“민우 씨, 안녕하세요.”

“어라. 유리 씨도 오셨네요?”

“퇴근하려고 했는데 팀장님이 술집에서 야근을 시키시네요.”

“뭐야? 야근이라니. 나는 나름 유리 씨 배려한 건데.”

“농담이에요.”

사이가 꽤 좋아 보였다. 요즘 말로 케미가 잘 맞는다고 할까.

민우는 이유리 편집자 옆에 앉았다. 벨을 누르고 크림 생맥주를 시켰다. 두 사람은 이미 술과 안주를 시킨 상태였다.

새 술이 나오고 셋이 건배했다. 이어 현기혁 팀장이 물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유리 씨한테 듣기로는 12월에 중요한 이벤트가 있다고 하시던데.”

“학회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발표를 해야 해서 정신이 좀 없네요.”

“<더 위자드> 마감이 적당한 선에서 끝난 거네요. 이제 학회 준비만 열심히 하시면 되겠습니다.”

“라온북스는 어떤가요? 여전히 바쁘죠?”

“중소규모 출판사야 늘 그렇지요. 유리 씨가 고생입니다.”

“어유, 아녜요.”

훈훈한 대화들이 오갔다. 민우는 <사각 살인> 베스트셀러 달성을 축하했고, 현기혁 팀장은 마음을 담아 감사의 뜻을 표했다.

물론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다.

현기혁 팀장은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저희 대표님께서 특별히 전달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감사드린다고. 다음에도 잘 부탁드린다고 하셨습니다.”

“아, 괜찮은데.”

“상품권입니다. 베스트셀러 달성 보너스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세요.”

민우는 계속 거절했지만 현기혁 팀장이 워낙 완강해서 봉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두툼해서 놀랐다. 열어보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가방에 넣었다.

어떤 수인지 뻔히 보였다.

베스트셀러 1위 달성 보너스라는 명목이 붙긴 했지만, 아마 자신을 라온북스에 계속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이리라.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선은 분명히 그어야겠지. 지금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야.’

민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현기혁 팀장이 먼저 나섰다.

“오늘은 계약 문제니 뭐니 그런 말씀을 드리려고 온 건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민우 씨 뵙고 싶어서 온 겁니다. 맥주도 땡기고 해서 말입니다.”

“안 그래도 일 얘기 꺼내시면 어쩌나 싶었어요. 거절하는 것도 난처한 일이라서.”

“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닙니다. 이 바닥에서만 얼마나 굴렀는데요. 오늘은 가볍게 한잔하시죠. 밀린 얘기도 하고요. 그래서 유리 씨 데려온 거기도 합니다.”

사실 현기혁 팀장은 원서 하나와 외주 번역 계약서를 가방에 넣고 왔다.

그런데 민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안 좋은 촉이 섰다. 오늘은 이야기를 꺼내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물러선 것이다.

현기혁 팀장이 이유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유리 씨. 벌써 취한 거야?”

“아아뇨. 오늘따라 얼굴이 금방 빨개지네요. 술이 잘 안 받나? 취하진 않았는데.”

이유리가 볼을 어루만졌다. 양쪽 볼이 빨개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현기혁 팀장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 씨랑 민우 씨 동갑이네요. 민우 씨가 스물여덟 맞죠?”

“예. 유리 씨도요?”

“앗, 네. 저 89년생이에요.”

“친구였네요.”

동갑일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어릴 줄 알았는데. 겉으로 보기엔 스물다섯 정도로 보일 정도다. 상당히 동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친근히 이야기를 나눴다.

“유리 씨는 일산에 살아요?”

“아뇨. 전 서울에서 출퇴근해요. 홍제동에서 자취해요.”

“그러셨구나. 3호선 타면 금방 가긴 하겠네요.”

“맞아요. 민우 씨는요?”

“전 학교 근처에서 자취해요. 그쪽이 집값이 싸다 보니. 고시촌도 있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맥주를 홀짝이며 사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민우는 왠지 친구가 한 명 더 생긴 기분이었다. 지음사 인문사회팀의 장철호도 동갑이라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때 현기혁 팀장이 끼어들었다.

“앞으로도 일을 자주 같이하게 되실 거 같은데, 친하게 지내세요. 그래야 시너지가 발휘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이유리가 생긋 웃었고, 민우가 건배를 제의했다. 맥주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렇게 강남 한복판에서 즐거운 만남이 계속되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진지한 만남이 성사되고 있었다.

같은 강남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주인공은 명인대 국문과의 송현우 교수.

그가 근엄히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정장을 걸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지훈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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