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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달콤한 제안 (2) (109/500)


109. 달콤한 제안 (2)
2021.10.11.


민우가 살짝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민우가 문고리를 돌렸다. 이런 긴장감은 실장실에 처음 왔을 때 이후로 꽤 오랜만이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저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앉아요.”

송승현 실장은 여느 때와 같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냉철한 눈빛과 날카로운 손길. 서류를 오가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다 보면 커리어 우먼의 모범적인 이미지가 떠올랐다.

민우가 앉아서 잠시 기다리자 서류 정리를 끝낸 송승현 실장이 다가왔다. 그녀도 맞은편에 앉았다.

“얘기는 대강 윤 팀장님한테 들었을 테고.”

“번역 문제 말씀이시죠?”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좀 듣고 싶어서요. 라온북스 쪽에서 번역 일을 맡게 된 경위를.”

“특별한 목적은 없었습니다. 겨울에 프랑스에 좀 나가볼까 하는데 여행 경비가 필요해서요. 명인대 불문과 이경훈 교수님 소개로 번역 일 받았습니다. 그냥 알바 정도였어요.”

여행 경비 부분에서 송승현 실장이 잠시 멍해졌다. 그런 사소한 이유로 번역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요즘 민우의 주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냥 알바로 한 번역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흥미롭네요.”

그렇게 중얼거린 송승현 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민우는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운이라고 생각했다.

“번역 일이 필요하면 나한테 얘기하면 되었을 텐데. 좀 서운하군요. 지음사에서 매달 발간되는 외서가 얼마나 많은지는 민우 씨도 잘 알지 않나요?”

“압니다. 하지만 실장님. 전 인문사회연구소 소속 연구원입니다.”

민우의 한마디에 송승현 실장의 눈빛이 변했다. 의외라는 느낌으로.

“여기에선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연구물을 모니터링하고 평가하는 게 일인데, 그 상황에서 번역 일을 부탁드리기가 좀 죄송스러웠습니다. 책임감이 없어 보일까 걱정도 됐고요.”

민우는 윤정민 팀장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왔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다행히 송승현 실장도 이해해주는 눈치다.

“소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기왕이면 신중한 사람이라고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너스레가 제법 늘었네요.”

“윤정민 팀장님 밑에서 일하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민우의 농담에 송승현 실장이 웃었다.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얇은 검은색 스타킹이 요염하게 움직였다.

“아무튼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려고 부른 건 아녜요.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앞으로 번역 일을 계속할 생각인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예.”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온북스에서 출간 예정인 다른 타이틀까지 번역을 맡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혹시 그쪽하고 번역 전속계약을 체결한 건 아니죠?”

“그냥 일반 외주입니다.”

번역 업계에서 출판사와 직접 전속계약을 체결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보통은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어 일감을 받는다.

민우는 에이전시도 없었으니 말 그대로 외주 아르바이트인 셈이다.

“민우 씨는 6개 국어 번역이 가능하다고 했죠? 예전에 이력서를 본 기억이 있는데.”

“일단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습니다.”

“어떤 거죠?”

“한영번역입니다. 국내의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송승현 실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영한번역을 잘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한영번역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민우가 한영번역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송승현 실장은 이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안다.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그 분야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경험은?”

“아직 없습니다. 일단 영한번역을 하면서 이름을 좀 알리고, 나중에 작업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송승현 실장이 검지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특유의 버릇이었다.

잠시 후 결정을 내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나가서 일 보세요.”

“예? 아, 네.”

이게 끝인가?

민우는 고개를 숙이고 실장실 밖으로 나갔다. 왠지 싱겁게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를 하다가 만 느낌.

한편, 자리로 돌아온 송승현 실장이 수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를 눌렀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예. 실장님.

“고 과장님. 폴라베어 북스 건 제안서는 작성 끝났나요?”

― 지금 막 초안 완성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가지고 들어와요.”

―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실장실로 덩치가 큰 사내가 들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체구 때문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출판사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지만, 고두열 과장은 엄연히 출판기획실에서 실력으로 과장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두툼한 손에 들린 보고서가 송승현 실장에게 넘어갔다.

“폴라베어 북스에 보낼 제안서 초안입니다. 검토를 부탁드립니다.”

“고생했네요. 시일이 촉박했을 텐데.”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일 뿐입니다.”

송승현 실장이 제안서를 넘겨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매가 날카롭게 움직였다. 과연 고두열 과장답게 빈틈이 없었다. 과묵한 성격이 문장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폴라베어 북스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었죠?”

“아직 없었습니다. 우리 쪽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폴라베어 북스(Polarbear Books).

영국의 유명한 출판 그룹인 폴라베어의 문학 전문 임프린트 회사다.

최근 지음사 쪽으로 번역서 제안이 한 건 들어왔는데, 고두열 과장이 회신을 준비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유명한 한국의 소설.

폴라베어 북스에서는 한국 문학의 색채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작가의 작품을 원했다. 최근 수상이 결정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의 영향인 듯했다.

“어디 보자…… 흐음. 김영화 작가의 작품을 선택했네요.”

“김아란 작가와 은휘겸 작가도 넣어 세 명을 후보군으로 두고 토의를 했습니다. 최종 결정은 김영화 작가의 <태엽시계>로 정했는데요. 작품의 밀도가 가장 높다는 내부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실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무래도 전공자시니까 더 넓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제 개인적인 의견보다는 업무 프로세스가 중요한 것 같은데.”

이미 고두열 과장에게 일임한 일이라 그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고두열 과장도 이해했다는 눈치였다.

송승현 실장의 눈이 다시 보고서를 향했다.

“김영화 작가라. 확실히 이 정도 무게감을 가진 이름은 또 없지요.”

최근 한국 문단은 한차례 몸살을 앓았다. 새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연이은 표절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아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는 건 매우 어려웠다.

그래도 그들은 한국 문학의 저력을 믿었다. 포기하지 않고 후보군을 추렸고, 몇 년 전 묵직한 울림을 준 <태엽시계>를 선정했다.

보고서 검토를 끝낸 송승현 실장이 질문했다.

“샘플 번역가는 섭외했나요?”

“아직입니다. 폴라베어 북스 건인 만큼 좀 신중히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작가님 개인은 물론 한국 문단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한 사람 추천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인문사회팀의 박민우 연구원을 추천하고 싶네요.”

그 과묵하던 고두열 과장이 살짝 놀랐다.

박민우가 누구인지는 안다.

그의 블로그가 출판기획팀에서 한차례 유명세를 치렀고, 무투브에 올라간 인문학 강의는 물론 자사에서 인문서를 출판한 것으로 유명해져 회사 내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번역이라니?

고두열 과장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그가 회의적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박민우 씨는 국문과 대학원생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 쪽 인력으로 분류되지 않은 거 같은데요. 가능하겠습니까?”

“라온북스의 <사각 살인> 번역을 민우 씨가 했다더군요.”

“아, <사각 살인>을 말씀입니까?”

고두열 과장이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그 책을 번역한 주인공이 민우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영한번역은 몰라도 한영번역은 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컨택할 수 있는 우수한 번역가들이 있는데 아마추어에게 맡기는 건 상식 밖의 일 아닐까 싶습니다.”

상식 밖의 일. 과장급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고두열 과장의 개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송승현 실장은 그게 항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합리적인 의견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두열 과장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음사의 송승현이다.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샘플 번역을 두 버전으로 준비합시다. 하나는 고두열 과장께서 컨택한 번역가의 버전으로, 나머지 하나는 박민우 씨가 번역한 버전으로. 완성본을 놓고 비교해서 더 좋은 쪽으로 하죠.”

“좋습니다.”

“박민우 씨에겐 제가 직접 컨택하지요. 번역 샘플 파일 제 메일로 보내 놓으세요.”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고두열 과장이 꾸벅 인사를 하고 실장실을 나갔다.

* * *

인문사회연구소로 돌아온 민우는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가 끝나면 꼭 연락을 달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 안녕하세요. 민우 씨. 회의는 잘 마치셨습니까? 금방 끝나셨네요.

“회의는 아니고 좀 일이 있었습니다. 근데 무슨 일로 연락하셨어요? 원고에 뭐 문제라도…….”

― 하하하. 원고에 문제가 있다면 유리 씨가 연락을 드렸겠지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각 살인>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미스테리 부문이긴 해도 카테고리 1위는 라온북스 창립 이래 처음입니다!

현기혁 팀장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전화한 모양이었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좋은 작품을 발굴하신 팀장님의 공이네요.”

― 민우 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빛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번역의 힘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별말씀을요. 유리 씨도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 그럼요! 그나저나 뵌 지 좀 오래된 것 같아서 서울 바람 좀 쐐보려고 합니다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현기혁 팀장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예전에 <더 위자드>를 들고 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뭔가 제의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잠시만요.”

민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플래너를 열어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 역시 밤에 잡힌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제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게 좀 있어서요. 한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그 이후로는 괜찮습니다.”

―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학교에 계신가요?

“아뇨. 지음사에 있어요.”

― 아, 지음사요. 알겠습니다. 그럼 여덟 시에 그쪽에서 뵙는 걸로 하시죠.

민우는 좋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또 번역을 부탁하려고 하시는 건가? 올해 말까지는 힘든데.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문이 열렸다. 장철호 주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늘도 회식 패스지? 논문 쓴다며. 어때? 진척상황은.”

“그냥 그렇지 뭐. 오늘 지도교수님께 피드백 받았는데 온통 붉은색 천지다.”

“인문대는 힘들겠구나. 혼자 다 해야 하니까.”

“사공이 많은 것보다 하나인 게 나을지도?”

인문대생과 공대생의 짧은 딜 교환이 끝났다.

씨익 웃은 장철호가 봉지를 건넸다. 뭔가 싶었는데, 안에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들어 있었다.

“회식 안 갈 거 같아서 편의점 가는 길에 사 왔다.”

“오, 땡큐. 역시 우리 장 주임님밖에 없다니까.”

“뭐야. 그 팀장님 같은 말투는. 아무튼 우리는 이제 다 회식 갈 거니까 퇴근할 때 정리 좀 부탁해.”

“오늘은 전원 참석이야?”

“한우 먹으러 간다고 하니 전부 다 손들던데.”

민우는 입맛을 다셨다. 왠지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갈까 말까. 민우가 살짝 고민하는 것을 눈치챈 장철호가 씨익 웃었다.

“솔깃하지? 갈래?”

“됐어. 내 몫까지 맛있게 먹고 와.”

“알았다. 그럼 수고.”

장철호가 나가자 민우는 바로 샌드위치를 깠다. 마침 배가 고파서 바로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논문을 향해 있었다.

띠링―

그때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송승현 실장이 보낸 메일이었다. 무슨 일일까. 민우는 논문 창을 내리고 메일함을 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 민우 씨가 원하는 기회를 드리죠. 최선을 다해서 번역해 보세요. 참고로 영국의 저명한 출판사인 폴라베어 북스로 보낼 샘플입니다.

폴라베어 북스?

민우는 먹던 샌드위치를 황급히 내려놓고는 첨부파일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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