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달콤한 제안 (1)
(108/500)
108. 달콤한 제안 (1)
(108/500)
108. 달콤한 제안 (1)
2021.10.08.
“팀장의 횡포야. 탄핵해야겠어.”
307호 팀원들은 민우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가장 불만이 컸던 건 역시 진섭이었다.
“미안.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 알았어. 알았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입으로만 사과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가자. 점심은 내가 산다.”
“오, 역시 울 팀장님이 최고라니까!”
진섭은 능수능란한 태세변환을 보여주었다. 사회생활을 잘할 것 같았다. 민우는 그에게 진지하게 취업을 권유했다.
12시 반, 민우가 307호 팀원들과 인문관을 나선 시간이었다.
오늘 메뉴는 늘 그렇듯 학식이었다. 개인당 3천 원 선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
각자 식사를 받아 들고 한쪽 테이블을 차지했다.
저번 학기까지는 민우, 진섭, 수빈 이렇게 세 명이라 한 명이 혼자 앉아야 했는데, 주예린의 참여로 균형이 딱 맞았다.
늘 그렇듯 민우는 수빈이와, 진섭은 예린이와 앉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지도가 길어졌네요. 민 선생님, 평소에 그렇게 말씀 많이 안 하시는 분인데. 분위기는 어땠어요?”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을 이수빈이 대표로 물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뜨던 민우가 잠시 멈추고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정말 논문을 발로 쓰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지. 토론이 문제가 아니었어. 애초에 발표할 논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
한숨을 내쉬며 민우가 밥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이 바로 민우가 놓치고 있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그 정도였어요?”
“뭔가 내가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던 부분도 있었고. 솔직히 말해 선생님께 지도 안 받았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어.”
“뭘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진섭은 궁금했다. 평소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던 민우였다. 그런데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했다.
“외서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크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맞는 거 같아. 실제로 이번 연구도 태반이 프랑스에서 온 연구물에 의존하고 있고. 뭔가 다른 방향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지금에 와서 다른 방향을 모색한다고? 좀 위험하지 않나? 어차피 국문학이라고 해도 해외 이론에 의존하는 판이잖아. 리얼리즘이니 모더니즘이니, 문예사조 같은 것도 해외가 훨씬 빠르고.”
“맞아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소설도 엄밀히 따지면 해외에서 온 양식이잖아요.”
진섭과 수빈이 대신 방어를 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지만, 마음속까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영원히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 가능하다면 다른 관점도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기왕이면 우리 것을 주체로 해서.”
민우의 말에 세 사람이 침묵했다. 그는 조금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외서 비중을 좀 줄여야겠어. 재조명이라는 콘셉트가 조금 약해지더라도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있어 보여.”
“그렇게 되면 더 불리해지는 거 아녜요? 논지가 조금 흐려질 텐데.”
역시 KCI급 논문을 써본 이수빈이 정확히 짚었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민우는 조금 달랐다.
“난 싸우러 가는 게 아냐. 보여주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강일이한테 박살이 나도 더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멋진 정신승리다. 최고야!”
진섭이 농담 삼아 비꼬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포부가 있는 민우가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아무튼 민우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비교문학 연구를 한다고 해도 메인은 한국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민우는 참고할 만한 국내 논문이 없는지 더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무거운 이야기 때문인지 식사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라앉았다. 둘러보니 세 친구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만 있었다.
“왜 다들 얼어있어? 오랜만에 내가 사는 밥인데 맛있게들 드시고. 섭. 뭐 재미있는 이야기 없냐?”
“많지. 공부 말고는 다 재미있으니까.”
“그럼 하나 꺼내 봐.”
네 사람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섭은 최근 발매한 게임의 재미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예린은 쓰고 있는 소설 얘기를 했다. 최근에 연재를 시작했단다. 민우와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기만 했다.
진섭이 민우를 은근히 꾀었다. 가끔 민우와 같이 게임을 하곤 했으니까.
“너도 말 나온 김에 질러. 논문 마감 앞두고 하는 게임이 그렇게 끝내준다더라.”
“대학원 생활이 끝나겠지. 말 그대로.”
민우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진섭이 입맛을 다셨다. 학기 초의 민우였다면 바로 결제 페이지로 이동했을 텐데.
민우도 게임을 즐겨 하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하지만 지금은 게임을 하는 것보다 논문을 읽는 게 더 즐거웠다.
한창 수다를 떨고 나니 식판이 모두 비었다. 민우는 혼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307호로 돌아갔다.
‘머리 식기 전에 논문 수정부터 하자.’
307호 멤버들과 점심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민우는 점심도 거른 채 논문 수정 작업에 매달렸을 것이다. 지도를 받고 난 직후에 작업하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열람실에 들어간 민우는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붉은 펜으로 체크되어 있는 논문계획서를 꺼냈다.
‘이렇게 허점투성이였을 줄이야.’
부끄러운 마음에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식에게 기본기를 배우고 단행본을 냈다고 기고만장해 있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실제로 보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언젠가 한국에 방문한 랑느 박사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아이작 뉴턴의 격언이.
― 지식은 무한한 바다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전진할수록 우리 앞의 광막한 세계가 더욱 넓어질 뿐이다.
말 그대로 광막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고맙게도 민영환 교수는 그 광막한 바다 위에서 횃불을 들어 길을 밝혀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그에게 감사했다.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 갈고 닦자. 나 자신을 알아야 해.’
민우가 새롭게 결심을 세우고 다시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민영환 교수가 체크해 준 부분을 따라가다 보니 아까 그가 했던 말들이 다시 생생히 떠올랐다. 쓰라렸지만, 약은 원래 쓴 법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통계 부분을 살리려면 우선 인터넷 검색 결과의 의미를 다룬 논문을 찾아봐야겠는데. 자료가 좀 있나 보자.’
민우는 자리를 정리하고 정보열람실로 이동했다.
검색 전용 컴퓨터 앞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검색의 기본은 키워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떤 키워드가 좋을지 고민했다.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해보자.’
민우는 떠오르는 여러 키워드 중 ‘검색어’를 선택했다.
RISS에 접속한 뒤 ‘검색어’ 키워드를 입력하자 무수히 많은 연구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제목을 살펴본 민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보다 이쪽 분야로 연구가 많이 돼 있잖아?’
광범위한 분야에서 검색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기 검색어와 검색어 추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의제설정에 대한 연구도 있었다.
민우는 초록과 목차를 읽으며 도움이 될 만한 연구물을 PDF 파일로 다운로드했다.
‘인쇄는 필요한 것만 하고. 일단 자료만 수집해 놓자.’
대충 정리를 끝낸 민우는 키워드를 지우고 새로운 키워드를 입력했다. 이번에는 ‘검색결과’였다.
이번엔 기술적인 논문들이 많이 나왔다. 검색 엔진은 물론 검색결과를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들이 많았다.
‘이쪽은 별로 쓸모가 없을 거 같네. 공대 쪽 논문이야. 인용하기 쉽지 않겠어.’
다음으로 민우는 ‘검색어’와 ‘통계’ 키워드를 동시에 입력했다. 여러 논문 중 민우는 인터넷 데이터와 통계학에 대한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민우의 눈이 번뜩였다. <데이터와 통계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눈에 들어왔다.
목차를 확인한 민우는 바로 초록을 열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을 시작으로 데이터의 진화 양상을 서술한 논문이었다. 인터넷의 사용이 급증하고 이슈가 되는 키워드 검색이 이루어지며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형성된다는 내용이었다.
‘이거면 되겠다. 각주로 달고 검색결과 분석의 의의를 설명하면 되겠어. 일단 이건 인쇄 걸고.’
자료 수집을 모두 끝낸 민우는 인쇄한 논문을 들고 다시 열람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우는 방금 인쇄한 <데이터와 통계학>이라는 논문을 정독했다. 읽으면서 인용할 수 있는 부분은 펜으로 체크했다.
정독이 끝났다.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논문 파일을 열었다.
서론 중 연구의 당위성 부분을 고치기 시작했다. 인쇄한 논문의 한 단락을 인용한 다음 출처를 정확히 기록했다.
민영환 교수가 제기한 연구의 당위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이 정도면 방어가 되겠다. 다음은 실존주의 수용에 대해 정리를 다시 해 볼까? 선생님 말씀대로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실존주의 수용에 관한 중요한 자료는 이미 인쇄해 두었기 때문에 따로 찾을 필요는 없었다. 민우는 자료를 하나씩 읽어 나갔다.
‘먼저 한국전쟁 이전의 수용사를 정리하고. 그 이후에 나머지를 정리하는 방향으로.’
민우는 연필을 꺼내 자료에 밑줄을 그으며 다시 봐야 하는 부분을 먼저 체크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오후 네 시가 훌쩍 지났다.
우우우웅―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오늘은 지음사 인문사회팀 회의 겸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회식은 몰라도 회의는 참여해야 했다.
‘오늘 그냥 점심 안 먹을 걸 그랬네.’
한 시간 정도면 끝날 것 같은데 도중에 나오려니 찝찝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버스에 올라서도 그는 논문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며 논문에 넣을 적당한 내용을 구상했다.
하마터면 또 정류장을 지나칠 뻔한 것도 이제는 일상이었다.
* * *
20분 일찍 도착한 민우는 인문사회연구소에 앉아 논문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금방 방해를 받았다.
“박 선생?”
윤정민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표정을 보니 꽤 급해 보였다.
“예, 팀장님. 벌써 회의 시작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좀 물어볼 게 있어서. 혹시 박 선생 말이야. 라온북스라는 출판사에서 번역 일 하고 있는 게 있나?”
드디어 들킨 건가.
민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계약서를 모두 확인했으니까.
윤정민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미리 상의를 좀 하지 그랬어.”
“알바 식으로 외주 받아서 한 건데 문제가 될까요? 계약서에는 따로 명시가 안 되어 있는 거 같더라고요.”
“문제가 될 건 없지. 박 선생이 평범했다면.”
평범했다면?
이상한 전제였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윤정민 팀장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그가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 <사각 살인>이 미스테리 부분 1위를 차지했더군. 이름 없는 신인 번역가가 멋지게 해냈다는 게 중론이야.”
“1위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 요즘 논문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확인하지 못했는데, 벌써 그렇게 순위가 올라간 모양이었다.
우우우웅―
때마침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 전화를 해왔다. 난감했다. 민우는 일단 거절 메시지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급한 전화면 받지 그러나?”
“아뇨. 계속 말씀하시죠.”
“아무튼, 듣자 하니 라온북스에서 차기작 번역까지 박 선생과 계약을 했다던데 사실인가?”
“예.”
<더 위자드> 1부 세트는 다음 달 출간 예정이었다. 아직 출간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알고 있다는 건 내막을 다 안다는 소리다.
문학계도 그렇듯 번역계도 무척 좁다. 알음알음으로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윤정민 팀장이 말했다.
“내 친구가 한국번역협회 쪽에 있는데, 요즘 박 선생 이름이 오르내리는 거 같더라고. 유망한 신인이라고. 혹시나 해서 확인해 보니 박 선생이 맞다고 하고.”
아까부터 지금까지 그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민우는 왠지 미안해졌다. 그가 왜 아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의로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여행 경비가 필요해서 알바 식으로 번역을 한 건데, 일이 이렇게 커졌네요.”
“그랬군. 지음사에도 그런 일은 널리고 널렸는데 말이야.”
“여기에선 연구 일에 집중을 해야죠. 전 연구원이니까요. 말씀드리기가 죄송했어요.”
민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헛기침한 윤정민 팀장이 나직이 말했다.
“아무튼 잘 알았고. 송승현 실장님이 찾으시니 어서 올라가 봐. 회의는 들어오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민우는 즉시 출판기획실장실로 뛰어갔다. 왠지 일이 좀 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