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선생이 되지 못한 교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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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선생이 되지 못한 교수 (2)
2021.10.07.
민우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논문을요?”
“그래. 네가 쓴 논문 말이다. 서론까지 다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방향이 잘못되었는지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다.”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민우는 잠시 그가 자신의 지도교수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바로 인쇄해 오겠습니다!”
민우는 곧장 307호로 달렸다.
텅 비어 있던 307호는 어느새 석사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엔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한진섭과 주예린도 있었다.
허둥대는 민우의 모습을 보며 한진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잠깐만. 나중에 얘기하자.”
민우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공용 컴퓨터 앞에 앉았다. 클라우드에 저장해 놓은 파일을 열어 전체적으로 한번 훑어본 다음 인쇄를 걸었다.
어느새 진섭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가 볼을 긁적이며 모니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번에 발표할 논문이잖아? 민 선생님 뵈러 갔었다며. 그새 박살나고 온 거야?”
“아니. 그 반대.”
“반대?”
“논문 지도해 주시려는 것 같아.”
진섭이 깜짝 놀랐다. 그도 민영환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신경도 쓰지 않아야 정상일 터인데 지도라니?
게다가 현대문학연구학회가 아니라 국제비교학회에서의 발표였다. 더더욱 그가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논문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민우의 말대로 논문지도 외에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 없었다.
“가을이라 더위를 먹으셨을 리는 없는데. 뭔가 신변에 중차대한 문제가 생기신 건가? 아니면, 선생님하고 따로 무슨 일 있었던 거냐?”
“다른 건 몰라도 일이 좀 있긴 했지.”
“무슨?”
민우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때의 일을 한 문장으로 축약할 수 있을까.
“석사 입학하고 처음으로 선생님과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어. 진지하게.”
다른 학회에서 발표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번역 논문을 건넸을 때였다. 그 순간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확실히 민영환 교수에게는 학자로서의 양심이 남아 있었다.
민우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명인대에서 부교수까지 올라갈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자신을 서자라 부르며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바라보는 눈빛이 늘 차갑고 매정하다는 것도 경험했기에 잘 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에게 받고 싶은 것은 자대생 같은 대우가 아니었다.
문학 이론과 연구방법론. 논문을 쓰는 방법. 작품을 분석하는 기술. 좋은 작품을 발굴하는 탁월한 시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지금 민영환 교수는 스스로 그것을 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편으로는 왜 갑자기 이러나 싶기도 했다. 자연스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지금은 지도 제자의 의무를 다할 때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 일이 잘 풀린 거 같아서 다행이네. 잘하고 와.”
“점심은 같이 먹자.”
“오케이.”
민우가 307호를 나섰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민영환 교수 연구실로 돌아왔다.
민우는 인쇄본 하나를 민영환 교수에게 건넸고, 펜을 들고 맞은편에 앉아 필기를 준비했다.
논문을 받아든 민영환 교수는 진지하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붉은 펜을 들고 있다는 점. 펜이 움직이며 몇 부분에 체크를 했다. 생각보다 체크되는 부분이 많아 민우는 긴장했다.
검토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민영환 교수는 맨 앞장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체크한 부분에 대해 코멘트를 시작했다.
“문장은 생각보다 제대로 잡혀 있군. 민식이한테 잘 배운 모양이구나. 기본기가 돼 있어.”
“아, 예.”
“괘씸한 놈. 지도교수를 놔두고 선배한테 논문을 배워?”
민영환 교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잘 안 됐지만, 민우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집중했다.
민영환 교수의 시선이 첫 번째 대목으로 향했다. 연구의 당위성을 밝힌 부분이었다.
민우는 구굴 포털을 이용해 실존주의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고 그 분포데이터를 넣었다. 그리고 그 키워드의 사용빈도가 높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민영환 교수의 눈에는 그 방법이 꽤 위험해 보였다.
“통계자료를 넣은 부분 말이다. 당위성 부분. 여전히 살릴 생각이냐?”
“네. 방법을 개량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쉽지 않아서…… 일단은 클리멍 베르나르의 방법론을 그대로 차용할 생각입니다.”
“문제가 있다.”
“아, 예.”
“방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인데. 이대로라면 공격당할 여지가 크지.”
민우는 필기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민영환 교수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포털 검색어 수량을 가지고 분석을 했는데, 수가 많다고 해서 그 사상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이브한 태도지. 데이터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가 없으니 논리적인 비약인 셈인데. 여기에 대해 지적이 나오면 뭐라고 대답할 셈이냐?”
“그럼 인용한 논문으로 방어할 겁니다. 클리멍 베르나르는 이미 동일한 방법으로 논문을 썼으니까요. 그쪽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유의미한 방법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쯧, 한심하긴. 그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민영환 교수가 딱 잘라 말했다. 너무나도 단호해서 하마터면 민우는 펜을 놓칠 뻔했다.
“가만 보면 너는 너무 해외 이론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어. 알고 있나?”
“예?”
민우는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외서를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을.
민 교수의 지적은 타당했다. 완전히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클리멍 베르나르의 논문의 예를 들면서, 이 학자가 이렇게 논문을 써서 유명 학회에 엑셉됐으니 나도 이 방법으로 쓰겠다는 건 유치한 발상이지. 방법론에 대한 고민도 없고, 그 나라와 우리나라의 사정은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지니까. 안 그러냐?”
“아, 확실히…… 그렇습니다.”
“비교문학적 방법이라고 해도 넌 국문학을 하는 사람이야. 머리가 있다면 넣어두고 그 점을 늘 잊지 마라.”
민우는 열심히 펜을 움직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디테일하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학회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펜을 잠시 멈춘 민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요? 기존 문학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은 방법이니까요.”
“확실히 수치로 설득하는 부분에서는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말한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이어 민영환 교수는 선구적인 연구들의 장단점을 세세히 알려주었다.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첫 연구이기에 허술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우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결국 새로운 연구는 길을 열어주는 것 외에는 약점투성인 거네요.”
“아무래도 논문을 견고하게 쓰려면 선행 연구들을 답습해서 방법론을 정밀하게 다듬어야 하는데, 새로운 연구는 참고할 레퍼런스가 없으니 논리적으로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
“그렇다고 해서 그 논문이 허술하다고 비난을 할 수는 없지. 길을 열었다는 것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는 거니까.”
수업에서는 들을 수 없는 귀한 말들이었다. 민우는 빠짐없이 모조리 받아 적었다.
민영환 교수가 음료로 목을 축였다. 생각보다 말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민우의 논문이 허술했다면 대충 박살을 내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까운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보석의 원석을 보는 듯한 느낌.
그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는, 네가 선택할 문제라는 거다. 여러 문제를 떠안으면서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느냐 아니면 안전하게 가느냐는 발표를 하는 네가 선택해야지.”
잠시 고민하던 민우가 결정을 내렸다.
“다소 공격의 여지가 있더라도 이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적한 부분은 어떻게 방어할 계획이지?”
민영환 교수가 날카롭게 물었다. 요행을 얘기한다면 바로 쳐낼 것처럼. 그러나 대답하는 민우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있었다.
“다른 분야의 논문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분야라 한다면?”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건 인터넷 검색으로 키워드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그게 학술적으로 유의미한 자료가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잖습니까? 그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문을 찾아서 보충 논거로 삼으면 될 거 같습니다. 빅데이터라든지, 요즘 디지털콘텐츠 쪽으로 데이터 연구가 많이 되고 있는 거 같으니까요.”
“크흠.”
민영환 교수로서는 쉽게 감을 잡을 수 없는 분야였다.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젊었고, 그만큼 사고가 개방되어 있었다.
민영환 교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지는 마. 12월까지 금방이니.”
“옙.”
민우가 잽싸게 필기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은 지적 충만감이 들었다. 빨리 도서관으로 달려가 자료를 찾아보고 싶었다.
일단의 정리를 끝내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논문을 바라보고 있던 시야가 굉장히 좁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민우는 상황을 보다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만약 그쪽으로 유의미한 논문을 찾을 수 없다면 서두의 통계 부분은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민영환 교수가 서론을 훑었다. 다음으로 체크된 곳은 바로 실존주의가 한국에 수용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에 관한 설명이었다.
민우는 차분한 논조로 실존주의가 어떠한 경위로 우리나라에 수용되었는지를 밝혔다.
하지만 민 교수는 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후작가들에게 있어 실존주의란 뭐라고 생각하나?”
“전후작가는 한마디로 전쟁을 경험한 작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고요. 인간의 유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상입니다.”
“예상대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하고 있군.”
민영환 교수의 일침에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요점만 짚어볼까. 한국과 프랑스 모두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적극적인 수용이 가능했지. 그렇다면 수용 과정을 밝히는 것에 있어서의 주안점은 전쟁이 아닐까?”
“한국전쟁이요?”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우의 논문을 펜으로 툭툭 두드리며 엄하게 꾸짖었다.
“하지만 네 논문에서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 과정을 밝히고 있지 않나? 학부 수준의 정리다.”
학부 수준의 정리라는 말이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그게…… 주안점이 전쟁이라고 하셨으니, 전쟁을 가운데에 놓고 다시 서술을 해야 할까요?”
“한국전쟁 이전의 수용사와 이후의 수용사를 나눠서 설명하는 게 좋겠다. 그래야 구분이 명확하고, 전쟁이라는 핵심이 두드러져 나타나니까.”
민우는 계속 필기를 해나갔다. 이렇게 제대로 혼나는 것은 처음이라 마치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 같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생각보다 민영환 교수는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관련 논문을 거의 쓰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계신 거지? 아니 됐어. 지금 딴 생각할 때냐!’
민영환 교수의 입이 쉬지 않았기 때문에 민우는 상념을 치우고 필기에 몰입해야 했다.
그렇게 서론 지도를 받는 것에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팀원들에게 계속 톡이 날아왔지만, 민우는 확인할 틈이 없었다.
“자신 있게 완성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의심이 들었는데 역시나였어. 처음부터 다시 쓰는 마음으로 고쳐라. 이제 너도 석사 2학기인데 학부 티는 벗어야 하지 않겠냐.”
“예…….”
민우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럴듯하게 서론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논문은 빈틈투성이였다.
‘이대로 발표를 했다면 개망신을 당했겠는데? 역시 경험의 차이인가.’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내심 민영환 교수가 고맙기도 했다.
다른 학회에서 발표한다고 했을 때 내쳐도 할 말이 없었는데, 한발 물러서고 이렇게 지도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헛기침을 한번 한 민영환 교수가 인쇄물을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체크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제대로 수정해라. 알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실력이라는 거.”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민영환 교수가 일어서 책상으로 움직였다. ‘실존주의 연구’라고 적힌 오래된 노트를 집어 소파로 돌아왔다.
그것을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민우는 뭔가 싶어 펼쳐보았다. 실존주의에 대한 개념들이 수기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이 민영환 교수의 글씨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석사 시절에 스터디 했던 자료다. 글씨가 좀 엉망이긴 한데, 재주껏 읽어보고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머리에 넣어.”
“감사합니다.”
“이번 발표 테마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지만, 결국 싸움의 승패는 실존주의라는 사상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갈릴 거다. 기왕 하기로 한 거 한일대 놈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와. 알았나?”
“예.”
“그럼 나가 봐.”
민영환 교수가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달라진 건 크게 없어 보였다.
그래도 민우는 많은 걸 얻게 돼 기뻤다. 그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 선 민우가 민영환 교수의 노트를 펼쳐보았다. 뜻밖의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복도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노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낡았지만, 글자 하나하나엔 열정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선생님…….”
습관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