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선생이 되지 못한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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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선생이 되지 못한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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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선생이 되지 못한 교수 (1)
2021.10.04.
이른 아침, 강예진은 민영환 교수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정리할 부분이 없는지를 찾는다.
다음으로 원두를 그라인더로 갈고 커피메이커에 넣는다. 물이 끊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커피향이 연구실을 가득 적셨다.
소파에 앉아 향을 음미하던 강예진이 아차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맞다. 책상 정리. 내 정신 좀 봐. 젤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민영환 교수의 책상 정리는 아무나 하면 안 된다.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했는데, 강예진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민영환 교수 연구실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책상 앞에 선 강예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너저분하지?’
강예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키보드 위에 놓인 세 편의 논문이었다. 그냥 치우면 되는데, 직업병이 발동했다.
강예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논문을 슥 훑었다.
‘프랑스 쪽 논문인가 보네. 민 선생님 다른 연구 시작하셨나? 실존주의면 요즘 민우가 연구하는 테마인데.’
일단 강예진은 세 논문을 하나로 묶어 왼쪽에 쌓아두었다.
늘 그렇듯 팩스와 메일 인쇄본은 따로 정리했고, 펜은 필통에 꽂았다. 연필은 그가 바로 쓸 수 있게 책상 오른편에 놓았다.
‘응? 이게 뭐야?’
못 보던 두꺼운 책이 한쪽에 놓여 있었다. 먼지가 꽤 많이 쌓여 있었는데, 일단 예진은 휴지를 뽑아 먼지를 털어냈다.
앨범이라고 영어로 적혀 있었다.
디자인을 보니 꽤 오래된 물건이었다. 군데군데 헤진 자국까지 나 있었는데, 못해도 십 년 이상은 묵은 것 같았다.
‘왜 이게 여기에 나와 있을까?’
호기심에 강예진은 앨범을 열어보았다. 곧 그녀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민영환 교수의 젊었을 적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배경과 주변 인물들을 보니 대학생 시절부터 모아 온 사진인 것 같았다.
‘송현우 선생님도 있고, 다른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네. 의외다. 이런 모습도.’
정년퇴임을 앞둔 송현우 교수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근엄했고, 아우라가 남달라 보였다.
그때 페이지를 넘기던 강예진의 손이 뚝 멈췄다.
‘이건…….’
젊은 시절의 민영환 교수와 어떤 학생 두 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학생 하나는 남자였고, 하나는 여자였다.
사이가 무척 좋아 보였다. 세 사람 모두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특히 민영환 교수와 남학생은 어깨동무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누군지 모르겠네. 우리 학교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교내 및 교외에서 민영환 교수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모조리 꿰고 있는 강예진이었다. 머릿속에 없다는 게 이상했다.
강예진은 다른 곳에 정보가 없는지 찾아보았다. 사진을 꺼내니 뒷면에 설명이 적혀 있었다.
― 2002. 4. 15. 지훈, 승현과 함께.
연도를 보니 14년 전 사진이었다.
민영환 교수가 직접 쓴 글씨였다. 그제야 강예진은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서지훈 선생님하고 송승현 선배구나! 젊었을 땐 정말 두분 다 멋지셨네.’
강예진은 아직까지 둘 다 싱글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복도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강예진의 손이 빨라졌다. 들고 있던 사진을 재빨리 제자리에 끼워 넣은 다음, 앨범을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순간 민영환 교수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강예진이 꾸벅 인사했다.
“오셨어요?”
“그래. 아침부터 고생이 많구나.”
낯빛이 초췌해 보였다. 저기압인걸까. 아니, 숙취에 가까운 것 같다. 분석을 끝낸 강예진은 컵을 들고 그가 마실 커피를 준비했다.
민영환 교수가 책상 앞에 서더니 가만히 그 위를 훑어보았다.
“정리한 거냐?”
“예. 좀 복잡해 보여서요.”
민영환 교수의 시선이 앨범에 닿았다. 먼지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깨끗했다. 자리에 앉은 그가 펴볼까 하다가 손을 멈췄다.
곧 앨범은 원래 있던 서랍으로 들어갔다. 강예진이 살갑게 물었다.
“선생님. 커피는 늘 드시던 걸로 드시죠?”
“그래.”
책상에 앉은 민영환 교수가 왼쪽에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적였다. 민우의 연구계획서가 나오자 그것을 꺼내 읽었다.
한숨이 나왔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깼는지, 약간의 알콜 냄새가 느껴졌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강예진이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상냥한 목소리. 그녀는 민영환 교수의 비위를 맞추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제 술을 좀 마셨더니 그런가 봐.”
“요즘 약주 자주 하시는 거 같아요.”
“그래?”
“지난주에도 그러셨고…… 제가 아는 것만 세 번 이상인데요. 학회 때문에 약속이 많으신가 봐요?”
“뭐.”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둘러댔다. 사실 그 세 번은 모두 혼자 마셨다. 잘 취하지 않아 계속 폭음으로 이어졌다.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사람들만 500명이 넘었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취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 마시게 된 것이다.
“민식이는 연구실에 나왔나?”
“아직이요.”
“KERIS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어떻게 됐는지 보고가 없구나. 원장을 만나는 거라면 뭔가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공산이 큰데.”
“아, 민식 선배 집에 좀 일이 생겼나 봐요. 정신이 없는 거 같아서. 제가 민우한테 물어보고 알려 드릴게요.”
민우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다시 손에 쥔 연구계획서를 주목했다.
이 종이 뭉치가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민우는 자신을 공격한 게 아니라, 잊고 있던 막연한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 선배는 좋은 선생님이 될 거예요. 분명.
― 좋은 교수가 아니라?
― 선생과 교수는 다르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선배는 왠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쩌다 보니 지금은 원수가 되었지만, 한때 가까이 지냈던 송승현의 목소리가 환영처럼 들렸다.
좋은 교수가 됐지만 좋은 선생이 되지는 못했다.
민영환 교수가 자조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탐욕이 부른 정당한 대가. 이제 와서 바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진아.”
“예?”
커피잔에 자신의 몫을 따르던 강예진이 고개를 돌렸다. 민영환 교수는 어느새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강예진은 커피를 마저 따르고 잔을 든 채 민영환 교수 옆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신 거죠?”
“네 눈엔 그렇게 보이냐?”
“모르는 게 이상한 거죠. 제가 여기에 몇 년을 있었는데.”
민영환 교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밑으로 수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이렇게 당돌한 제자는 없었다. 앞으로 크게 될 재목이다.
민영환 교수가 물었다.
“너는 선생과 교수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지?”
“선생과 교수요? 으음…….”
강예진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럽기도 했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존경심의 차이 아닐까요? 교수는 직함이니까요. 그래서 우리 과에서는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중에 진짜 존경심을 가지고 부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글쎄요. 그야 사람에 따라 다르니 어떻다고 할 수는 없죠.”
“너는?”
강예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야 물론 선생님을 존경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죠.”
“내 어떤 부분이?”
“문학 분야에서 굉장히 많은 업적을 쌓으셨잖아요. 연구도 그렇고 단행본도 그렇고.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강예진은 사실만을 말했다. 확실히 민영환 교수는 문학 분야에서 폭넓은 업적을 쌓았다. 평론, 강연, 출판 등 그의 이름이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예진은 그가 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강 박자만 맞춰주다가 박사 연구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민영환 교수가 결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노트였다. 상단에 ‘실존주의 연구’라고 필기되어 있었다. 민영환 교수의 필체였다.
“민우는 왔나?”
“모르겠어요. 보통 이 시간에는 도서관에 있을 거예요.”
“잠시 내 연구실로 오라고 해라.”
“예. 그럼 전 박사 연구실로 돌아가 볼게요. 무슨 일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꾸벅 인사하고 물러선 강예진은 307호로 들어갔다. 때마침 민우가 통화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민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민우가 전화하며 꾸벅 묵례했다. 강예진은 손을 들었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통화를 하라는 의미였다.
민우는 <더 위자드> 3권 마무리에 대해 이유리 편집자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곧 전화를 끊은 민우가 자리를 옮겼다.
“오셨어요?”
“번역 마무리했나 보네?”
“방금 마지막 권 원고 보냈어요.”
“축하.”
“감사합니다.”
민우는 짐을 던 듯 환하게 웃었다. 편집과 출간은 이유리의 몫이었으니, 이제 당분간은 논문에만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물끄러미 민우를 바라보던 강예진이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주머니에 여유가 생겼겠네. 너 학기 초에는 자금 사정 안 좋아서 쩔쩔맸잖아.”
“그렇죠. 뭐.”
“근데 요즘은 꽤 잘나간다? 강의 인센티브도 들어오고, 지음사 연구원 월급도 나오고, 단행본 인세도 받고, 번역비도 받고. 이경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들어가서 1년 학비 면제받고.”
남의 입에서 현재 상황을 들으니 뭔가 색달랐다. 민우는 짧은 시간이지만 삶의 질이 많이 올라갔음을 깨달았다.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여유가 많아졌다.
단순히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생기다 보니 공부에 집중이 더 잘됐다.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강예진이 팔짱을 끼며 놀리듯 말했다.
“이 기세라면 너 교수 안 해도 되겠는데? 적당히 학위 따고 지음사에 들어가도 되지 않으려나.”
“그래도 기회가 되면 교수는 해야죠.”
“명예 때문에?”
가만히 생각하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대학에서 훌륭한 제자를 키워보고 싶습니다. 모교 지도교수님처럼.”
“무리하게 따라 하려고 하지 마. 가랑이 찢어진다.”
강예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민영환 교수가 찾는다고 전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앉아라.”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연구실로 들어온 민우가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곧 민영환 교수도 합류했다. 민우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민영환 교수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눈매를 좁혔다.
“발표 준비는 잘돼 가나?”
“서론은 완성됐습니다. 개별 작품 분석하면서 이론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민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연구가 아주 잘 풀리고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별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한일대 국문과에 장소필 선생이라고 있다. 국제비교문학회 임원인데, 어제 통화를 했다. 12월 16일에 일정이 잡혔다지?”
“맞습니다. 오후 2시 반에 발표 시작합니다.”
“토론자가 네 또래더구나.”
“예, 그게…….”
민우는 서강일과의 인연을 짧게 소개했다. 민영환 교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요즘 보기 드문 열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엄하게 꾸짖듯 말했다.
“아무튼 누차 얘기하지만 학회에 발표신청을 하기 전에는 나에게 상의해라. 그 정도 상의도 하지 않을 거면 지도교수는 필요 없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사후보고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민영환 교수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민우가 살짝 놀랐다. 그것은 이면지함에 들어가 있어야 할 자신의 연구계획서였다.
민영환 교수가 엄하게 말했다.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번 발표와 토론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 아니야. 학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될 수 있지.”
“그래서 철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의 눈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았다. 살다 보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도 분명 있으니까.
“논문 쓴 데까지 인쇄해 와라. 어디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