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막간(幕間) (2) (105/500)


105. 막간(幕間) (2)
2021.10.01.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가을의 향취가 실린 바람이다. 탁했던 방 안의 공기가 청량하게 바뀌었다.

계절이 어느덧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도 민우는 방 안에 앉아 무서운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어느덧 그는 <더 위자드> 3권을 번역하고 있었다.

슬슬 소설의 이야기도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어엿한 마법사가 된 주인공이 최종 보스와 일전을 준비하는 장면이 한글로 옮겨졌다.

그 중요한 장면 앞에서 때마침 손가락 관절통을 느낀 민우가 잠시 타이핑을 멈췄다.

‘후우. 좀 쉬어야겠다. 정신없이 두드리기만 했네.’

민우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통증이 가시자 독서대에 고정시켜 둔 원서를 꺼내 남은 페이지 수를 확인했다.

‘56페이지. 오늘 내로 해치울 수 있겠다. 번역은 오늘 다 끝내고 서울에 올라가서는 논문에 집중해야지.’

민우는 번역 파일을 클라우드에 저장한 다음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집안에 누나가 없으니 왠지 심심하면서도 평화로웠다.

그때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기 시작했다. 민우는 다시 일어서 핸드폰을 집었다.

“응. 엄마.”

― 뭐 좀 잘 챙겨 먹고 있니?

“점심에 갈비찜 먹었지. 이제 좀 쉬었다가 저녁 먹으려고.”

― 저녁도 굶지 말고 잘 챙겨 먹어. 응?

“신경 쓰지 마. 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애인가. 여튼 친구분들 잘 만나고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오늘 동창회가 있다는 말에 민우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렸다. 20만 원. 가서 아들 자랑 실컷 하고 오라고 덧붙였다.

그 돈은 얼마 전에 받은 <사각 살인> 번역 고료의 일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 받냐며 한사코 물러섰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에 있던가. 민우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기지개를 켜며 민우가 거실로 나왔다.

‘저녁도 갈비찜 먹어야 하나? 아 참, 밥 아까 다 먹었지?’

혹시나 해서 밥솥을 열어보았다. 역시 깨끗이 비어있었다. 잠시 고민에 잠긴 민우는 갈비찜을 냉장고에 넣었다.

‘밥 새로 하기 귀찮으니까 저녁은 밖에서 그냥 간단히 먹어야겠다.’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잠깐 밖에 나가 바람 좀 쐬면서 적당한 곳에 들러 저녁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민우는 얇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바람이 조금 서늘했다. 잘 입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날씨 좋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고 푸른 하늘을 담으니 시야가 탁 트였다.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 보였다.

‘이제 가을이구나. 아니, 바로 겨울로 건너뛰려나?’

가을은 흔히들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문학 전공자인 민우에겐 사실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사시사철 내내 독서의 계절이니까.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그는 논문도 쓰고 있었다.

본가에 들러 주말을 보내고 있지만, 민우의 생활엔 큰 변화가 없었다. 낮에는 번역하고 밤에는 논문을 읽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삶.

그래도 어머니가 해 준 보양식 덕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기껏해야 하룻밤 자고 올라가야 하는 일정이지만 민우는 본가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언제쯤이면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전쟁 같네. 2학기 마치고 프랑스 가기 전에는 역시 좀 힘들겠지?’

가장 큰 문제는 12월 중순에 잡힌 국제비교문학회에서의 발표. 그 전에 발표용 논문을 완성해서 학회에 제출해야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얼마 전, 신경이 쓰이는 일 하나가 생기고야 말았다.

‘강일이가 토론자로 나서게 됐어. 어떻게 된 내막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저히 준비해야 해.’

석사 2학기라는 표현으로 서강일이라는 사람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또래에 비해 학식이 풍부했고 도전의식이 강했다.

민우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독기를 품었어. 분명 까다로운 상대가 될 거야.’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년필을 이용한다면 분명 강일이한테 이길 수 있겠지?’

인문학 공모전 본선에서 만년필을 이용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 민우는 만년필의 효과를 분명히 체감했다.

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만년필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

‘학회는 승패를 가르는 곳이 아니잖아. 강일이가 도전한 것은 맞지만, 굳이 만년필을 쓸 필요가 있을까?’

첫 학회인 만큼 멋지게 발표해서 학계에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년필이 필수다.

하지만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은 왠지 서강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보자.’

그런 고민을 하며 민우가 좁은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을 확인한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웬일이지?”

잠시 액정을 내려다보던 민우가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 *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건널목을 건너 먹자골목 입구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는 상아대 건물이 보였다. 익숙한 곳이었다.

저 멀리 약속장소에서 주예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걸음을 재촉했다. 곧 그를 발견한 주예린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네요. 그쵸?”

“그러게. 거의 일 년 만인 것 같은데. 근데 여긴 왜?”

“친구가 이 근처에 맛집 생겼다고 해서요. 제가 오랜만에 쏩니다!”

“또 뇌물이냐?”

안 그래도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오늘이 될 것 같았다. 상아대 시절 그녀는 늘 그랬었다.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30분. 저녁을 먹고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요? 저녁에 약속 있어요?”

“약속은 없는데 나 번역 작업하다가 나온 거야. 얼른 들어가서 마무리해야 해.”

“그럼 밥 먹고 잠깐만 있다가 가죠 뭐.”

주예린이 쿨하게 답하며 걷기 시작했다. 민우가 그 뒤를 따랐다.

학기 중이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대학가라 평일에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다. 대부분이 학생들이다.

“그런데 대전엔 웬일이야? 늘 서울에 있는 것 같더만.”

“한 달 동안 안 내려왔더니 아버지가 삐치셨어요. 얼굴 좀 비춰드리려고 왔죠. 그 와중에 선배가 대전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범인이 누구냐.”

“누구긴요. 뻔하잖아요.”

이수빈인 모양이었다. 다음부터는 동선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민우가 간판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이름이 ‘밥집’이었다.

“뭔가 식당 이름이 좀 이상하지 않냐? 느낌이 별로인데.”

“노놉! 여기 일본 가정식이 그렇게 맛있대요.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인문학 하는 사람이 그래서 쓰겠어요?”

민우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참았다. 철부지 여동생이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 거 같았다.

일단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지만 손님은 드물었다.

“맛집 맞지?”

“어휴, 정말 속고만 사셨나.”

민우는 미덥지 못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개방형 주방과 깔끔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주방 앞에 바(Bar) 형식의 테이블이 놓여 있어 이색적인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주예린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메뉴판을 공략했다. 일본 가정식뿐만 아니라 한식도 팔고 있었다.

“전 쇼가야키 정식. 선배는요?”

“난 미소라멘.”

“엥. 그걸로 되겠어요? 더 비싼 거 드셔도 되는데. 제가 지갑을 여는 날은 흔치 않다구요.”

“괜찮아.”

어제오늘 고기만 먹어서 그런지 면이 당겼다. 쌀쌀한 날 적당히 배를 채우기엔 면이 제격이다.

종업원이 메뉴를 접수하고 주방에 주문을 넣었다. 주예린이 펌프식으로 된 특이한 물통을 가지고 낑낑거리기에, 민우가 빼앗아 대신 물을 따랐다.

“소설 때문에 불러낸 거지?”

“아뇨, 뭐 굳이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집에만 있기 답답하기도 했고. 오랜만에 학교도 와 보고 싶었고.”

그렇게 대꾸한 주예린이 민우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선배 뭐 고민 있어요? 살짝 다른 생각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드네. 아까 만났을 때부터.”

“그냥. 학회 때문에.”

“이번에 발표하기로 한 거요? 논문이 잘 안 풀리시남?”

주예린은 서강일과의 접점이 없었다. 팀 307호에 들어오긴 했지만 인문학 공모전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민우는 중요한 부분을 생략하며 설명했다.

“토론이 좀 신경이 쓰이네. 논문을 쓰는 건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디펜스를 해야 할지 고민이다.”

“아항.”

주예린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해답을 꺼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보면 쉽지 않아요? 그러니까, 선배가 발표자가 아니라 토론자라고 가정하고 발표자를 어떻게 공략할까를 생각하다 보면 예상 질문이 쨘 하고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거죠.”

“오!”

“뭐죠. 그 감탄사는.”

“처음으로 네가 대학원생처럼 보였어.”

주예린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칭찬이었다. 그래서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내가 토론자라면, 역시 주제에 관한 자료를 몽땅 모으겠지? 공부를 해야 취약점을 찾을 수 있으니까. 발표자 논문은 나중에나 볼 수 있으니.”

“그렇죠. 선배가 쓴 논문도 중요하지만, 기본 자료도 그만큼 중요할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제대로 디펜스를 하려면 그 역으로 자료를 봐야 한단 말씀.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건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구가 많이 된 분야인 만큼 관련 참고문헌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자료 모으기만도 벅찰 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이 잘 안 선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의외였다. 자기 일도 바쁘다면서 내뺄 줄 알았는데.

민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주예린이 입을 쌜룩거리며 변명했다.

“그래도 명인대에서 진짜 후배는 저뿐이잖아요. 이런 거 아무한테나 부탁 못 하지 않아요? 다들 바쁘고 그러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괜찮겠어?”

“뭐, 괜찮아요.”

주예린이 살짝 웃었다.

언젠가 학생회관 뒤편 벤치에 앉아서 했던 민우의 말이 떠올랐다. 근사한 소설을 쓰면 기가 막히게 번역을 해 주겠다고.

별거 아닌 것 같은 그 한마디가 큰 격려가 되었다.

민우는 늘 그랬다. 결과가 좋든 그렇지 않든, 후배들이 어려울 때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단순한 논리였다.

이제는 자신이 도와야 할 차례가 온 것일 뿐이다.

“아무튼, 자료만 모아드리면 되는 거죠?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해서.”

“그건 좀 더 생각해보자.”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주예린이 정신없이 수저질을 시작했다. 민우도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한 숟갈 떴다.

구수하니 끝내줬다.

* * *

월요일 오전, 석사 연구실에 307호 팀원이 모두 모였다. 민우는 지나가듯 겨울 학회 토론자가 정해졌다고 말했다.

듣고 있던 한진섭이 깜짝 놀랐다.

“뭐? 서강일?”

“얼마 전에 메일로 통보받았어. 그렇게 확정된 모양이야.”

“그거 우연이에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수빈이 물었고,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나 해서 박진영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토론자 선정에 대해 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서강일이 직접 토론 신청을 했다고 한다.

“강일이가 먼저 토론자 신청을 했다더라. 급이 맞아서 허가했고. 마침 학회 측에서도 토론자 선정에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석사 2학기라서.”

진섭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건수 잡았구만. 공모전 때 당했던 거 복수하려는 게 틀림없어.”

“복수라는 표현은 좀 그렇고. 아무튼 뜻하지 않게 학회에서 한판 붙게 됐다.”

수빈이 물었다.

“자신 있어요?”

“뭐, 가봐야 아는 거겠지. 예린이가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그나마 한숨 돌렸어.”

주예린이 가슴을 툭툭 치며 자신감을 표했다.

“맡겨만 주십셔. 근데 선배. 자료는 어떻게 찾을까요?”

“일단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학술지 논문을 찾아 줘. KCI 등재지급 이상으로.”

“그럼 나는 학위논문 찾아볼게요.”

“단행본도 봐야지?”

수빈과 진섭이 각각 하나씩 거들겠다고 나섰다. 민우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찮겠어? 너희들도 과제 준비하느라 바쁘잖아.”

“팀 만들어서 뭐하냐. 나가서 대신 발표는 못 해줘도 자료 모아주는 건 반칙이 아니잖아. 안 그래?”

이수빈도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했다. 한진섭이 오랜만에 멋있게 보였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지만 민우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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