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막간(幕間) (1) (104/500)


104. 막간(幕間) (1)
2021.09.30.


KERIS 청사는 대구에 있었다. 덕분에 최민식은 오래도록 운전을 해야 했고, 민우는 장롱 면허라 조수석을 지키기만 했다.

“형. 더 밟아야 할 거 같은데요.”

“오래 살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그래도 저녁 시간 전까지 도착하려면 조금 빠듯해 보이는데. 아직 낮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혀를 찬 최민식이 엑셀을 밟았다. 차가 좀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민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좀 아슬아슬했다. 두 사람은 합의하에 휴게소에 들르지 않고 대구까지 직행했다.

꼬박 세 시간 반이 걸렸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 멘트를 흘렸다. 민식의 차는 무사히 주차장에 정차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 젠장. KTX 타고 올 걸 그랬네.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

민식이 허리를 부여잡으며 차에서 내렸다.

“파스라도 사 올까요?”

“그 전에 장롱 면허 좀 어떻게 해봐. 면허 있다고 해서 중간에 교대 좀 하려고 했더니. 쯧.”

요즘 자주 듣는 말이었다. 여기저기 오갈 일이 많으니 면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차라도 하나 사는 게 나으려나.’

민우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매월 들어오는 돈을 제하고서도 이번 번역을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여유자금이 있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민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찾았다. 두 사람이 주차장을 나서며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민우가 물었다.

“형. 역시 차 하나 있는 게 나을까요?”

“재정에 문제가 없다면 하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섭이도 끌고 다니지 않냐? 있는 것과 없는 건 정말 차이가 크거든.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져.”

“삶의 질이요?”

“질이라기보다는 양식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막차 걱정할 필요 없고, 가고 싶은 데로 훌쩍 떠날 수도 있고. 차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곳도 갈 수 있고. 아무튼 내가 처음 차 샀을 때는 그랬다. 신나게 돌아다녔지.”

민식은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일단 <더 위자드> 판매 부수를 보고 결정하자. 대박이 난다면 못 살 이유도 없을 테니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두 사람이 내렸다. 복도 끝에 원장실이 있었다.

민식이 물었다.

“수빈이가 차 가지고 뭐라고 하지 않아?”

“네, 특별히는.”

“아직 어려서 뚜벅이 생활도 나쁘지 않나 보네.”

그렇게 두 남자는 원장실에 들어갔다. 원장실 안에 방 하나가 더 있는 구조였는데, 여직원 한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 원장님 뵙기로 한 최민식입니다. 이쪽은 박민우 선생이고요.”

“아, 명인대에서 오신 선생님들이죠?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직원이 노크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곧 그녀가 문을 열고 민우와 민식을 안으로 안내했다. 도유진 원장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어서들 오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민식이 대표로 인사를 했다.

정말 먼 길이었다.

처음 출판기념회에서 도유진 원장이 한번 놀러 오라고 했을 때,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었다. KERIS가 서울에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사실 KERIS가 서울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조금 막막했어요.”

“가끔 그렇게 알고 계신 분들이 좀 있으시지요. 요즘 정부 기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는 추세라서. 저희도 이전한 지 3년 좀 됐습니다.”

“그랬군요. 청사가 굉장히 멋지던데요.”

“새 건물들은 으레 그렇죠. 자, 일단 앉으실까요?”

세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안락한 느낌에 곧 잠이 들 것 같았다. 민우는 정신을 붙들었다.

원장실 직원이 시원한 음료수를 가지고 들어왔다. 세 사람은 목을 축이며 가볍게 사담을 나누었다.

도유진 원장이 물었다.

“최민식 선생님은 지금 명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요?”

“예, 이번 학기부터 학부 교양강의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무슨 과목이죠?”

“대학국어입니다.”

대학국어는 문과계열 신입생들이 공통적으로 수강하는 교양필수 과목이다.

논리적인 글쓰기와 문법을 다루는 과목이고 중요도가 전공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명인대 국문과 박사급들이 주로 강의를 맡는다.

사실 최민식은 다른 학교에서 전공 강의를 꽤 했다. 명인대 출신이라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강의 청탁이 들어온다.

이번엔 도유진 원장이 민우에게 물었다.

“박민우 선생님은 아직 강의를 하시려면 좀 시간이 필요하지요?”

“예. 이제 석사 2학기니까요. 아무래도 박사 수료할 때까지는 하기 좀 어렵지 않을까요?”

수료 전에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모교인 상아대에 자리가 난다면 강의를 할 수 있다.

대학마다 다르긴 하지만 보통 시간강사로 활동하려면 석사학위를 따야 한다. A급과 B급으로 구분하는데, A급은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이고, B급은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강사료에 차등이 있다.

민우 같은 타대생 출신들은 보통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자대에서 강의를 얻는다. 인맥이 좋으면 다른 학교에서도 강의하는 경우가 간혹 있긴 하다.

하지만 국문과 입학 정원이 줄고 있는 추세고, 강의도 폐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강의경력을 쌓기가 빠듯한 것이 현실이다.

도유진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강의 역량이 상당하신 것 같던데요. 무투브에 올라온 인문학 강의,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께서 보시기에는 많이 부족한 강의였을 텐데요. 부끄럽네요.”

그 강의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도유진 원장은 그 강의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하나하나 짚었다.

“학생들에게는 무척 훌륭한 교재가 될 것 같더군요. 여러 언어로 번역이 되기도 했고. 해외에서도 반응이 나쁘지 않은 거 같던데.”

덕분에 인센티브가 생각보다 많이 붙어서 이제는 지음사에서 지급하는 연구비와 비슷해졌다,

민우의 고정 수입이 월 200만 원을 넘어섰다. 여기에 번역 외주 일까지 하고 있으니 생활이 예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경훈 교수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1년 수업료가 면제된 것이 컸다.

이제는 조금이긴 해도 매달 어머니와 누나에게 용돈을 보내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우가 웃으며 설명했다.

“겨울에도 한차례 강의가 잡혀 있습니다. 그때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첫 강의만큼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련히 잘하시겠지요.”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켠 도유진 원장이 민우와 민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본론이 나올 느낌이었다.

도유진 원장이 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다소곳이 올렸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사실 두 분을 초청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픈 코스웨어라고 들어 보셨지요?”

오픈 코스웨어는 쉽게 말해 강의와 콘텐츠를 조건 없이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다. 2002년 마이크로소프트와 MIT의 공동 프로젝트가 그 시발점이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유진 원장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기관에서도 오픈 코스웨어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KOC라고 하는데, 이용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있습니다.”

민우가 대답했다. 물론 민식도 KOC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KOC.

Korea Open Courseware의 약자로, 각급 단체와 연계하여 강의자료 및 콘텐츠를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러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발전 가능성이 큰 곳이기도 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두 분의 강의를 특강 형식으로 제작해서 KOC에 공개하려고 합니다. 다른 기관을 거치지 않고 우리 기관에서 직접 제작해서 제공하는 형식이 될 거고요.”

두 사람이 잠시 침묵했다. 예상 범위 내에 있는 제안이긴 했지만, 조금 갑작스럽긴 했다.

최민식이 물었다.

“특강이라면 강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저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겁니까?”

“굳이 분야를 한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번에 두 분께서 출간하신 책을 베이스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그제야 민우는 출판기념회에서 신화학에 관심이 많다는 도유진 원장의 말을 떠올렸다. 이런 포석이 있을 줄이야.

그녀가 덧붙였다.

“두 분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지음사와 협의를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라이선스 문제가 걸릴 테니까요.”

“그게…… 쉽게 결정을 할 수 있는 제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좀 갑작스러워서. 이 친구와도 상의를 해봐야 하는 부분이고.”

민식의 말에 민우가 난처하게 웃었다. 도유진 원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서두를 것 없지요. 일단 저녁 식사나 같이하실까요? 거기서 천천히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지요.”

* * *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과 도유진 원장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민우는 살짝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졌다.

“배 엄청 부르네요. 간만에 포식했어요.”

“대구까지 내려온 보람은 있네.”

두 사람은 참치회집에서 고급 참치회를 원 없이 먹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이 차에 올랐다. 민우가 보조석에 타자 민식이 시동을 걸었다. 곧 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너 본가에 들른다고 했지?”

“옙.”

“내비에 주소 찍어라. 서울 가는 길에 들르게.”

민우는 사양하지 않고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 곧 경로가 잡히고 민식은 길을 따라 운전을 시작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 무렵에야 최민식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 때문에, 아니 너 덕분에 이런 제안을 받게 된 거지?”

“그런 셈이네요.”

민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도유진 원장은 두 사람에게 솔직히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은 박민우 선생 때문이라고.

인문학 공모전 본선에서 만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무투브에 올라온 그의 인문학 강의는 제법 인상 깊었다.

때마침 단행본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들은 도유진 원장은 프로젝트를 구체화했고, 거기에 최민식을 옵션으로 넣은 것이다.

“할 거냐? 너 강연 요청 와도 안 한다고 들은 거 같아서 말이다.”

“이건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우리가 쓴 책을 베이스로 하는 강의니까요. 뭣보다 형이 더 좋은 제안을 받았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도유진 원장은 명인대에 신화와 문학에 대한 강의를 개설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교양이고, 강사는 최민식으로 지정할 계획이다.

이번 학기는 이미 시작되었으니 일이 잘 풀리면 내년 1학기에 개설될 것이다.

KERIS의 영향력이라면 통과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미 KERIS와 명인대는 업무협약이 되어 있어 행정상의 문제는 없다.

최민식의 강의를 영상으로 담아 KOC에 서비스하겠다는 것이 도유진 원장의 또 다른 계획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민식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남들이 쉽게 쌓을 수 없는 커리어를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인문학 연구자에게 이름값만큼 더 큰 재산은 없으니까.

“시기는 우리보고 정하라고 했으니까. 언제 시작하지?”

“내년 봄 어때요? 형도 이번 학기는 강의하시니까 힘드실 거고. 저도 겨울학회에 발표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겨울 방학에 프랑스도 나가봐야 하고.”

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자신보다 민우가 더 바쁜 거 같았다. 그걸 깨닫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내가 원장님께 말씀드리마. 내년 봄에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게끔 하면 되겠지?”

“예.”

운전대를 잡은 민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의 한숨이었다.

“내년 봄에도 바빠지겠구나.”

“그러게요. 그래도…….”

민우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까맣게 물든 밤하늘 너머로 달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달을 두 눈에 담으며 민우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바빴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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