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플랜 A (3)
(103/500)
103. 플랜 A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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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플랜 A (3)
2021.09.27.
10월 7일 금요일 아침.
민우는 오전 일찍 도서관에 앉아 <더 위저드> 2권 번역을 마무리했다. 메일창을 열어 완성 파일을 이유리 편집자에게 보냈다.
‘전화해 두는 게 좋겠지?’
민우는 잠시 열람실에서 나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세요! 민우 씨. 좋은 아침이에요.
“예, 유리 씨. 안녕하세요. 지금 <더 위저드> 2권 최종 번역본 메일로 보내드렸어요. 확인해 보시고 이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 와, 감사합니다! 전에 출판기념회에서 늦어질 것 같다고 말씀하셨을 때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 혹시 3권 일정은 어떻게 될지 여쭤봐도 될까요?
목소리만 들어도 다음 일정에 대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빨리 받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 연말이고 하니까.
머릿속에서 날짜를 계산한 민우가 답했다.
“3권은 예정된 날짜에 맞춰서 드릴게요. 10월 14일, 그러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가능하면 날짜를 좀 당겨 볼게요.”
― 다행이네요! 잘하면 이번 크리스마스 전에 책을 낼 수 있겠어요.
“아무래도 그때가 대목이죠?”
― 그렇죠. 이벤트도 걸고 할 수 있으니까 판매량이 많이 늘어나거든요. 작품 분위기도 크리스마스와 잘 어울리는 면이 있으니까, 느낌이 좋아요.
느낌이 좋다.
이유리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편집자로서 이유리의 감은 매우 뛰어났다. 그녀가 그렇게 느꼈다면 이번 작품도 잘 풀릴 것이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고 편집 잘 부탁드려요.”
― 민우 씨도 건강 조심하시고요!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사실 연말 이벤트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라온북스에도 좋은 일이라니 기분이 좋았다.
민우는 다시 열람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방에서 <더 위자드> 3권을 꺼냈다.
‘연말까지는 좀 바쁘니까 치트키 좀 써 볼까?’
최근 민우는 번역할 때 안경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의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제비교문학회 겨울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로 결정된 이상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야 했다. 3권 번역은 처음부터 안경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민우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왠지 오랜만에 써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민우는 독서대에 <더 위자드> 3권을 고정시켰다. 영어로 써진 그 책은, 이미 모두 한글로 바뀌어 있었다.
민우가 한글 파일을 열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타다다닥!
민우의 손가락이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 * *
팀 307호 멤버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민우는 카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민우를 제외한 세 사람은 수다 떨기에 한창이다.
‘발표가 확정됐으니 민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
시기를 잘 잡아야 했다. 그에게 1930년대 농민소설에 대한 공부를 하겠다고 말한 상황이다. 어설프게 시간을 끌었다가는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최대한 빨리 말하는 게 낫겠어. 그래야 민 선생님도 납득을 하시겠지.’
민우는 오늘 오전 연구실로 들어가는 민영환 교수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오늘 바로 이야기를 해 보자.’
민우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307호로 돌아와 어제 번역해 놓은 논문 세 편을 인쇄했다.
얼마 전 랑느 박사가 보내준 프랑스 학자들이 쓴 논문이었다. 민영환 교수가 메일로 정보를 요청한 그 논문들이기도 했다.
‘일이 계획대로 잘 풀려야 할 텐데.’
다른 학회에서 발표하게 됐다고 말하면 민영환 교수는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민우는 이 논문들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민영환 교수가 ‘별사탕’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인쇄한 것들을 파일에 잘 정리한 민우는 바로 민영환 교수 연구실을 노크했다. 마침 민영환 교수는 자리를 뜨지 않고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시간 괜찮으십니까?”
“뭐 잠깐은.”
민영환 교수는 논문을 쓰고 있었다. 테마는 민우가 가져왔던 것과 거의 흡사한 것이었고, 연구방법론도 거의 똑같았다.
그는 경험이 풍부한 학자였다.
잘 다듬어진 연구계획서만으로도 벌써 논문을 7페이지나 채운 것이다.
핵심 이론은 논문을 읽지 못해 아직 넣지 못했지만, 논문에 쓰일 작품을 분석하고 나름의 결론까지 내놓은 상황이었다.
그가 급진적인 방식이라고 지적했던 통계 부분은 아예 빼버렸다.
이미 그는 학계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무리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논문을 게재할 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이 소파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래. 할 얘기라는 게 뭐냐?”
“바쁘신 것 같으니 본론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 드렸던 연구계획서 기억하십니까?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요.”
“이미 끝난 걸 또 왜?”
민영환 교수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다. 잠시간의 침묵을 거두고 민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민영환 교수에게 나직이 고했다.
“그 논문계획서, 국제비교문학회에서 수용해 주었습니다. 이번 12월에 열리는 학회에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뭐라고?”
민영환 교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다른 학회에서의 발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제가 블로그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요. ‘별사탕의 문학세계’라는 블로그인데, 거기서 우연히 한일대 교수님 한 분을 알게 됐습니다. 영문과의 박진영 교수님이요.”
“별사탕…….”
민영환 교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우는 일부러 블로그의 이름을 흘렸다. ‘별사탕의 문학세계’라고. 예전에 민영환 교수가 자신에게 메일을 보냈으니 분명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민영환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치심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물론 민우는 대놓고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민우는 이번 일을 조금이라도 좋게 풀고 싶었다.
“우연히 이야기를 하다 제 연구계획에 대해 살짝 말씀을 드렸더니 굉장히 흥미롭다고 하시더군요. 연구계획서를 보내 달라고 하셔서 보내드렸고, 얼마 전에 발표 청탁을 받았습니다.”
“허!”
민영환 교수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민우가 그 틈을 치고 들어갔다.
“그래서 이번 12월에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하게 됐습니다. 저도 뜻하지 않게 기회를 얻게 된 거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했습니다.”
민우는 조용히 민영환 교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얌전히 물러설 민영환 교수가 아니었다. 곧 이성을 되찾은 그가 꼬투리를 잡고 나섰다.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라는 연구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됐다고?”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해 보고 싶은 테마여서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지 알고는 있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민우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당당히 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학자라면 좋은 연구를 세상에 공개할 의무가 있다고. 무척 인상 깊은 말이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민우는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번역된 논문 세 편. 민영환 교수가 ‘별사탕’에게 메일을 보내게 만든 그 논문이었다.
민우가 조용히 말했다.
“얼마 전에 저한테 메일 보내셨죠?”
민영환 교수가 움찔, 반응을 보였다. 민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메일로 번역본이 있는지 여쭤보셔서 번역을 해봤습니다. 사실 전 블로그에 초록만 번역해 놔서 전체 번역은 하지 않거든요.”
“이걸 왜…….”
“앞으로 연구에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민우는 자료를 공손히 민영환 교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당신이 메일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내 연구가 가치가 있다는 거잖아?’
물론 민우는 굳이 그것을 말로 풀어내지 않았다.
민영환의 자존심을 더 이상 건드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학자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을 믿었다. 민우가 아는 민영환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자, 이제 무슨 수를 두실 겁니까? 민영환 선생님.’
민우는 기다렸다. 벼락을 내릴 것이냐 물러설 것이냐. 그것만큼은 민우도 예측할 수 없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진 않았다. 곧 민영환 교수가 입을 뗐다.
“뭐…… 그런 일이 있었지. 어쨌든 이렇게 번역을 다 했구나. 고생했다. 그게 네 블로그일 줄은 꿈에도 몰랐군.”
민영환 교수가 논문을 집었다. 자료를 한번 훑어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물러서는 것을 택한 것이다.
민우가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도 번역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진심이었다.
민우는 그 마음을 민영환 교수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민영환 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책상으로 돌아온 민영환 교수는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완전히 당한 느낌이었다.
‘호랑이 새끼가 아니었어.’
민우는 이미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호랑이로 성장해 있었다.
‘지훈이가 괜히 이쪽으로 보낸 게 아니군. 그만큼 버틸 능력이 있었던 거야!’
민영환 교수는 민우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 민우와 부딪혔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자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면 서지훈 그 녀석과 꽤 닮은 구석이 있지?’
그는 송승현 실장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곧 담배 연기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뽀얀 연기 너머로 그가 쓰고 있던 논문이 보였다. 민우가 발표하기로 한 이상, 이 논문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아니,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어떤 감정이 깨어나며 그의 손을 움직이게 했다.
‘써서는 안 된다.’
그는 워드 창을 껐다. 그리고 미련 없이 파일을 선택해 SHIFT키와 DEL키를 눌렀다.
― 이 파일을 영구적으로 삭제하시겠습니까?
YES.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끼리릭―
그가 의자를 돌려 벽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비췄다. 살집이 오르고 주름살이 진 모습이 오늘따라 추악해 보였다.
볼을 어루만지며, 그는 언젠가 지도교수가 했던 한마디를 떠올렸다.
‘나도 선생이 아니라 교수가 되어버린 건가?’
곧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걸렸다.
민영환 교수가 책상 맨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두꺼운 앨범이 보였다. 그가 그것을 꺼내자, 먼지가 일어나며 세월의 흔적을 남겼다.
* * *
“뭐 좋은 일이라도 있냐?”
“예. 있죠.”
민우는 처음으로 최민식의 차를 얻어 탔다. 도유진 원장을 만나기 위해 KERIS로 향하는 길이었다. 본청은 대구에 위치해 있었다.
신호에 걸렸다. 민식이 기어를 중립에 놓고 물었다.
“뭔데?”
“발표하기로 했어요. 현대문학연구학회가 아니라 국제비교문학회에서요.”
“뭐?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된 거야?”
민우는 그간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민영환 교수가 부린 탐욕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호, 제법이네. 민 선생님 설득이 쉽지 않았을 텐데.”
“민 선생님도 이제 나이가 드신 게 아닐까요? 젊음의 패기에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 주신 거겠죠.”
“오버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민영환 교수도 허락했고, 또 겨울 학회에 발표하게 됐으니 어쨌든 일이 잘 풀린 것이다.
신호가 바뀌고 민식이 기어를 올렸다. 곧 차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너도 참 많이 컸다. 입학해서 어리바리 떨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학회에 나가서 발표도 하고 말이야.”
“그러게요. 세월 참 빠르네요.”
“세월이 빠른 게 아니라 네 세월만 빠른 거다. 너처럼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놈은 처음이야. 들어본 적도 없고.”
이 모두가 루카치의 유품 덕이다.
만약 그때 보존서고에 들어가 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민우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력과 도전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유품만 믿고 게으름을 피웠다면 이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을 거라고.
결국 그 중심에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우우우웅―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민우는 가볍게 터치해 메일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박민우 선생님.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 안유진입니다. 발표 일정 관련하여 안내 메일 드리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발표명: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의 재조명
발표일시: 2016년 12월 16일 금요일 오후 2시 30분(2부)
발표자: 박민우(명인대)
토론자: 서강일(한일대)
토론자 부분에서 민우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익숙한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심장이 격동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어디 한번 해 보자는 거냐?’
그는 여유롭게 웃었지만, 두 눈은 어느새 경쟁심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