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플랜 A (2)
(102/500)
102. 플랜 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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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플랜 A (2)
2021.09.24.
민우의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일까.
평소라면 건성으로 연구계획서를 검토했을 민영환 교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페이지가 뚫릴 기세로 계획서를 읽고 있었다.
곧 연구의 목적에 대한 서술이 시작되었다. 논문의 당위성이 설명된 부분이었다.
‘이건…….’
민영환 교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우가 사용한 통계학적 방법에 깜짝 놀란 것이다. 일반적으로 순수문학연구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굉장히 젊은 방법이었다.
‘흥미롭군.’
어느새 민영환 교수는 민우의 연구계획서에 빠져들었다. 민우의 연구계획서는 멋을 부리지도 않고 담백하게 쓰여 있어 읽기가 매우 편했다.
‘기본기가 잡혀 있어. 이 녀석의 실력이 이 정도였던가?’
이어서 연구방법론 부분이 나왔다.
이 부분에서 민영환 교수는 또다시 놀랐다. 최근 프랑스에서 연구된 참고문헌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리된 내용에 따르면, 1950년대 발표된 한국 실존주의 문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민영환 교수가 놀란 것은 프랑스의 연구물들이 발표된 시기였다.
‘허…… 모조리 올해 발표된 논문들이잖아? 그것도 석 달 내에서. 어떻게 이 논문들을 찾아낸 거지?’
국문학은 다른 학문에 비해 해외 이론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그 수용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 외국어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민우는 최근에 발표된 세 편의 논문을 참고문헌으로 들고 왔다.
‘대체 어떻게?’
민영환 교수는 잠시 논문에 시선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민우가 들고 온 연구계획서는 지난번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테마는 같지만, 그 방법과 동기 부분에서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연구계획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민영환 교수의 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는 집중을 놓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의 레퍼런스가 있다면 꽤 괜찮은 논문이 나오겠어.’
꽤 괜찮은 논문.
이 대목에서 민영환 교수의 탐욕이 발동했다. 머릿속에서 이미 논문의 서론이 작성되고 있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안타깝게도 이걸로는 어렵겠는데. 프랑스의 연구물들을 레퍼런스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통계학적 방법에서 너무 급진적인 느낌이 드는군.”
“그렇군요.”
민우의 연구계획서가 또다시 이면지함으로 들어갔다.
순간 민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논문계획서가 이면지함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우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원안대로 1930년대 농민소설로 계획서를 잡아 와. 그걸로 겨울에 발표하고, 좀 더 보강해서 내년에 석사 논문을 쓰는 걸로 하자.”
민영환 교수가 자상한 어조로 민우를 타일렀다. 마치 아이를 어르듯 조심스러웠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주제를 바꾸게 되면 지금 남은 시간으로는 겨울 발표까지 논문을 쓰기가 어려울 거 같네요.”
“아무래도 힘들겠지.”
“1930년대 농민소설에 대해 다시 공부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작품도 다시 읽어봐야 하니까요.”
“급하게 갈 거 뭐 있나. 정 발표를 하고 싶다면 내년 학회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가상의 체스판에서 말을 옮기며 민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체크메이트(checkmate).
“그럼 현대문학연구학회 겨울 발표는 신청하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무리할 것 없다. 넌 이제 석사 2학기니까.”
민영환 교수는 내심 한숨을 돌렸다.
민우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 몰랐다. 계속 달려들어 자신의 계획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할 줄 알았는데, 일이 쉽게 풀렸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그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기던 민영환 교수는 이면지함에 넣은 민우의 계획서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운 아이디어지.’
그가 다시 민우의 논문계획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선 확인해야 하는 것은, 민우가 연구방법론에 적용한 세 편의 프랑스 논문이었다.
‘레퍼런스로 사용한 프랑스 논문들이 번역되어 있으려나?’
민영환 교수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른다. 원어 논문을 구하는 것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읽는 것에 큰 문제가 있었다.
일단 민영환 교수는 네이비 검색창에 민우가 참고문헌으로 사용한 논문 하나를 입력했다. < Existentialisme et de la littérature contemporaine >, ‘실존주의와 현대문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이었다.
‘오, 마침 있군.’
블로그 하나가 검색에 걸렸다. 씨익 웃은 민영환 교수는 링크를 클릭해 블로그로 접속했다.
‘누군가 번역을 해 둔 것 같은데.’
포스팅을 살펴보던 민영환 교수의 눈에 아쉬움이 맺혔다. 논문 전체가 아니라 초록만 번역되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민영환 교수는 블로그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전문이 번역된 포스팅은 찾을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좀 검색을 해 볼까?’
민영환 교수는 다른 포털에서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논문이었기 때문에 정보를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는 처음 초록이 번역되어 있던 블로그로 돌아갔다.
‘주인장에게 메일을 보내봐야겠군. 논문에 대한 정보를 좀 얻어야겠어.’
평소라면 민우에게 번역을 시켰겠지만 이번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민영환 교수는 은밀히 일을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영환 교수가 마우스를 움직여 블로그 주인장의 아이디를 클릭했다.
‘어디 보자…… 별명이 별사탕? 희한한 별명이군.’
한차례 웃은 민영환 교수가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그 블로그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 * *
면담을 마친 민우는 바로 307호로 돌아왔다. 진섭과 수빈이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섭이 물었다.
“어떻게 됐냐?”
“실패. 발표는 못 하는 걸로 됐어.”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민우가 이번 발표에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빈이 가까이 다가와 민우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응. 아무렇지도 않은데?”
“진짜?”
“정말이라니까.”
수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민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확실히 민우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아니, 조금 다른 게 있었다.
민우는 뭔가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수빈이었기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거죠?”
민우는 씨익 웃고 말았다.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때 진섭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쩔 거야?”
“플랜 A를 시작해야지.”
“플랜 B도 아니고 플랜 A?”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박진영 교수의 연락처를 찾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위쪽에 푸시 알림이 떴다.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민우는 홈으로 돌아와 메일 앱을 실행시켰다.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빨리 메일이 올 줄은 몰랐는데.’
민영환 교수가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을 클릭한 민우는 자리에 편히 앉아 그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확인했다. 중간중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팝콘이 없다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논문 번역본은 어디다 써먹으려고?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시기는.’
민우는 답장하지 않고 메일 앱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잠시 307호를 나와 조용한 곳에서 다시 박진영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교수님. 박민우입니다.”
― 그래.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은 했나?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하겠습니다.”
― 잘 생각했다. 일단 연구계획서를 좀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논문의 수준을 보려는 게 아니고, 어떤 테마인지 확실히 알아둬야 해서 말이다.
“물론이죠.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5분 뒤에 바로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 그래.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이미 박진영 교수에게 보낼 연구계획서를 따로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통계 방법과 핵심 레퍼런스를 제외한 다른 버전의 계획서였다.
박진영 교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일이 틀어질 것을 대비한 처사였다.
다시 307호로 돌아온 민우는 클라우드에 저장해 놓은 파일을 박진영 교수의 메일로 보냈다. 전송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한 민우는 노트북을 덮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수빈아.”
“응?”
“오늘 저녁은 근사한 데서 먹을까?”
“앗. 좋죠!”
수빈의 얼굴이 환해졌다. 요즘 민우가 연구계획서를 쓰느라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근사한 데? 어디?”
“스테이크 전문점. 합정동 쪽에 있는데, 누나가 어제 모바일 쿠폰 보내줬거든. 오랜만에 칼질 좀 하자.”
“가요!”
수빈이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때 진섭이 옆에서 투덜거리며 한마디 했다.
“나도 칼질 잘하는데.”
“하던 게임이나 열심히 해.”
“나 전사 키우는 거 어떻게 알았냐?”
피식 웃은 민우는 수빈과 함께 307호를 나섰다. 인문관을 나서는 내내 수빈은 콧노래를 불렀다. 즐거운 모양이다.
“근데 오빠. 오늘 KERIS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민식 선배랑.”
“그거 내일로 미뤄졌어. 원장님이 좀 바쁘신 모양이더라고.”
도유진 원장과의 약속은 하루 연기되었다. 그녀가 직접 전화를 걸어 일정을 조정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부른 걸까?”
“글쎄.”
“아까 오빠가 말한 플랜 A는 뭐고?”
“글쎄?”
“자꾸 이러기야?”
“좀 봐주라.”
민우는 수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부풀었던 볼이 다시 쏙 들어가며 보조개가 걸렸다.
* * *
우우우웅―
밤늦게 진동이 울렸다. 민우는 옆에서 곤히 잠든 수빈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 박 선생.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늦어서 문자로 대신하네. 보내 준 연구계획서는 모두 검토를 마쳤어. 이번 겨울 테마 발표로 일정 잡아놨으니 잘 부탁해.
민우는 곧바로 잘 준비하겠다고, 그리고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국제비교문학회 겨울 학술대회가 12월 중순이었지? 2개월 정도 남은 건가.’
민우는 가방에서 플래너를 꺼냈다. 혹시라도 수빈이가 깰까 봐 수면보조등 불을 이용해 내용을 확인했다.
‘<더 위저드> 번역을 우선 마무리해야겠다. 그리고 남은 기간 동안 논문에 올인하면 돼.’
그때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곧 수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거기서 뭐 해?”
스르륵.
이불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며 이수빈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나신이 은은한 불빛에 드러났다.
“잠깐 문자가 와서 보고 있었어. 더 자.”
“이 시간에 문자를? 뭐야, 정말. 그만 보고 이리 와요. 나 잠 안 와.”
민우는 플래너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수빈을 품에 안았다.
* * *
“영차!”
강민희가 책을 한아름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며 서강일을 째려보았다.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자료는 이게 끝이에요. 부족한 게 있으면 한일대 도서관의 장서량을 탓하도록 하시고.”
“고생했다.”
서강일은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논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책상 앞에도 논문집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두가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논문이었다.
물끄러미 서강일을 바라보던 강민희가 투덜거렸다.
“대체 뭐 하려고 그렇게 공부만 파는 거예요? 논문 쓰려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토론.”
“토론이요?”
그제야 서강일이 손에 쥔 논문을 내려놓았다. 안경을 벗더니 양손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박민우 그 녀석, 이번 겨울에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토론으로.”
“그 사람 발표 테마가 실존주의 문학이었어요?”
“그래.”
“괜히 망신만 당하는 거 아닌감? 보통 아니잖아요. 그 명인대 잡스.”
피식 웃은 서강일이 안경을 다시 썼다. 훈훈한 외모가 살아났다.
“잊었어? 나도 우리 학교에서는 나름 에이스 소리 듣잖아.”
“그건 그렇지만.”
서강일은 적자 라인을 탄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학부 시절부터 교수들의 총애를 받았고, 명인대가 아닌 자대에 진학해 차기 교수직을 노리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두뇌가 명석하고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났다. 지금까지 경쟁에서 밀려본 적이 없었는데, 저번 공모전에서 민우를 만나 보기 좋게 패한 것이다.
그때 서강일은 깨달았다.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었다고.
하지만 서강일은 오히려 민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만약 이대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더라면, 자만에 빠져 발전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요?”
“이건 승패를 건 싸움이 아니라는 거지. 우월을 가리려는 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 중의 하나라고 할까. 아주 고차원적인.”
그렇게 말한 서강일은 다시 논문을 집어 들었다. 강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메로나는 언제 사 올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