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플랜 A (1)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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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플랜 A (1)
2021.09.23.
10월 4일 화요일.
민우는 양손에 책을 한가득 들고 307호에 나타났다. 손에 든 책은 이번에 민우와 민식이 공저한 바로 그 책이었다.
‘중고차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요즘 민우는 차 욕심이 생겼다. 최근 벌이가 생겨서 중고차를 알아보고 있는데, 유지비가 좀 부담스러워 미루고 있었다.
“뭔 책이야?”
마침 307호에는 진섭이 있었다. 인터넷 서핑을 하던 그가 일어서더니 민우에게 다가왔다.
“아, 선생님들한테 드릴 책? 뭐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도서관에 기증도 할 생각이라 좀 넉넉하게 챙겨왔지.”
“그렇군.”
민우는 물티슈로 땀을 닦으며 소파에 뻗었다. 책은 약 서른 권 정도. 국문과 교수들과 다른 지인들에게 돌릴 책이었다.
“나 부르지 그랬어? 집에서 이거 들고 오려면 꽤 힘들었겠네.”
“웬일로 착한 척을 다 하냐.”
“곧 크리스마스니까 착한 일 많이 해서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아야지.”
민우는 피식 웃었다. 과연 한진섭다운 개그였다. 아니,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꼭 받고 싶은 선물이 있었으니까.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 줄 알고 그런 부탁을 해. 그냥 좀 힘들더라도 내가 들고 오고 말지.”
“짜식. 사람을 못 믿냐.”
진섭이 수북이 쌓인 책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한바탕 순례를 해야겠네. 제일 처음은 역시 송현우 선생님이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명인대 국문과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송현우 교수였다. 국문학계의 거목이자 대한민국 학술원 정회원이기도 했다.
민우는 사적으로 그와 자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인사한 게 전부였다. 그만큼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저서 목록만 봐도 알 수 있다. 현대문학 부문에서 그만큼의 업적을 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민영환 교수와 면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매도 그냥 빨리 맞는 게 낫겠지?’
그런 생각에 민우는 미리 봉투에 넣어둔 책을 꺼내 송현우 교수의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봉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일단 가 봐야지. 계실지 안 계실지 모르니까.”
“하긴. 요즘 외부 강연이 많아서 학교엔 거의 안 나오신다고 하더라. 잘 다녀오셔.”
민우가 307호를 나갔다.
송현우 교수의 연구실은 3층 복도 맨 끝에 있었다. 민우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민우 선배.”
그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민우에게 말을 걸었다.
명인대 국문과 학부생들이었다. 익숙한 얼굴도 몇 보였는데, 인문학 강연을 계기로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민우는 잠시 돌아섰다. 그들이 꾸벅 인사했다. 민우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출판 축하드립니다. 저번 주에 기념회 있었다고 들었는데. 못 가서 죄송하네요.”
“죄송하긴. 불금을 그런 쓸데없는 행사로 낭비하면 쓰나. 한창 놀 때인데. 안 오길 잘했어.”
“하하하하.”
그들은 어렸다. 기껏해야 스물셋. 이수빈 또래였다. 민우는 이렇게 축하의 인사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나중에 책 사서 들고 가겠습니다. 꼭 사인해 주세요.”
선두에 선 남학생이 말했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입대하는 친구였는데, 졸업 후에 대학원 진학에 뜻이 있다고 했었다.
이름이 정일주라고 했던가. 눈앞에 있는 학생들 중 민우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도서관에도 기증해 놓을 거니까 괜히 무리하지 마.”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인데요. 나중에 선배가 유명해지면 프리미엄이 붙을 게 분명하잖습니까.”
“짜식, 투자할 줄 아는구나? 그래도 주식은 하지 마라.”
민우의 너스레에 학부생들이 한차례 웃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학부생들은 꾸벅 인사를 하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민우는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도 선배가 된 건가?’
대학원 신입생들이 선배라고 하는 것과 학부생들이 선배라고 불러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자대 출신이 아니었으니까.
느낌이 좋았다.
덕분에 긴장도 풀렸다. 민우는 약간 고양된 기분을 느끼며 송현우 교수의 연구실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살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책 냄새가 훅 밀려와 코를 자극했다.
책에 둘러싸여 있다고 표현해야 할까. 작은 도서관 같은 연구실 한가운데에 송현우 교수가 앉아 있었다.
“자네는…… 박민우?”
“예, 선생님. 민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민우는 조심스레 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뭔가?”
“이번에 민식 선배와 같이 쓴 책입니다. 저번 주 금요일에 출간이 되어서 선생님께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송현우 교수는 침묵했다.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그의 손이 봉투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표지를 펼치니 정성껏 들어간 민우의 서명이 보였다.
송현우 교수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서명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민우 군.”
“예?”
“순서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민우는 깜짝 놀랐다.
순서가 잘못됐다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자네와 접점이 없지 않나. 학부 때 내 수업을 들은 적도 없을뿐더러,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민식 군이 이 책을 가져오는 게 순서에 맞다고 보네만.”
민우는 아차 싶었다. 송현우 교수의 말이 맞았다.
원래는 최민식이 돌아다니며 책을 나눠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본가에 내려갈 일이 생겨 민우가 대신 맡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현우 교수는 받은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보류의 의미일까. 여전히 책을 손에 쥔 채로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서지훈 선생은 요즘 잘 지내나?”
“예. 저번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드렸는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그래. 그렇군.”
송현우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작게 미소를 짓는다.
그러고 보니 민우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송현우 교수와 만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서지훈 선생은 잘 지내고 있냐고. 지금도 그는 서지훈 교수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송현우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서지훈 선생의 제자라고 했었지.”
“예. 선생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명인대에 진학한 것도 서 선생의 제안이었나?”
“그렇습니다.”
송현우 교수가 말을 멈췄다. 안경 너머의 눈이 책장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책들 중 어느 책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떤 선생이었나? 상아대의 서지훈이라는 교수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민우에겐 확신이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제가 만난 분들 중 선생이라는 직함에 가장 어울리는 분이었습니다.”
“교수가 아니라…… 선생?”
“그렇습니다.”
송현우 교수의 이마에 주름이 짙어졌다. 찡그려서가 아니라 미소를 지어서였다.
그제야 송현우 교수가 손에 들고 있던 민우의 책을 책상 한쪽에 올려두었다.
“책은 잘 읽도록 하지. 고생했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민우는 송현우 교수 연구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역시 포스가 장난이 아니시네. 괜히 국문학계의 거목이라는 칭호가 붙은 게 아니야. 나도 나중에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민우는 한숨을 돌리며 다시 307호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제목을 확인한 민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발신지는 프랑스. 랑느 박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민우는 내용을 볼 것도 없이 307호로 전력 질주했다.
* * *
랑느 박사의 메일을 확인한 민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같이 있던 진섭과 다른 석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그만큼 반가운 메일이었다.
“야. 왜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그래? 깜짝 놀랐잖아.”
“기다리고 있던 게 왔거든.”
“택배도 아니고 뭔 호들갑이야.”
민우는 진섭의 말을 흘려들으며 메일에 집중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세 개의 첨부파일이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민우가 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프랑스 학자들이 쓴 논문이었다.
적어도 목차는 그랬으니 이제 세부 내용을 살펴볼 차례였다. 민우는 공용컴퓨터에서 파일을 열어 논문 세 개를 모조리 인쇄했다.
“박민우. 뭔 일 났어? 민 선생님이 뭐 시키셨냐? 도와줘?”
“잠깐만. 나중에 얘기합시다.”
민우는 마음이 급했다. 인쇄물을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안경을 꺼냈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읽을 수 있지만, 더 빨리, 정확히 읽으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민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책상을 탁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거라면 충분해. 승산이 있다!’
세 논문은 실존주의에 대한 현대적인 접근법을 논하고 있었다. 잘 가공한다면 하나의 이론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공한다는 것. 예전의 민우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민식과 단행본 작업을 하며 논문 작성 방법을 맨투맨으로 배웠다. 충분히 해 볼 만했다.
민우가 오른손을 가슴에 댔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진정해 박민우. 논문은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야. 차분하게, 이성으로 쓰는 거라고.’
민우는 전율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곧 표정이 차분해지며 심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307호의 문이 열렸다.
“안녕요.”
“안녕하세욥!”
이수빈과 주예린이었다.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왔는지 손에는 테이크아웃 컵이 들려 있었다. 진섭이가 팔자 좋다며 혀를 찼다.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이수빈이 민우를 보며 물었다.
“오빠. 뭐 해요?”
“저분 아침부터 명상하시나.”
그들의 눈에는 민우가 이상하게 보였다. 논문 여러 개를 책상에 늘어뜨려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그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만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민우는 지금 안경 너머로 들어온 지식을 머릿속에서 조합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따져보고 있었다.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저씨?”
주예린이 민우를 툭 치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수빈이 그녀의 팔을 붙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수빈은 지금 민우가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는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잠시 후, 모든 정리를 마친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왔어?”
민우는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이틀 후 목요일, 민우는 연구계획서를 출력해 민영환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계획서의 테마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1950년대 실존주의 소설 연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민영환 교수는 1930년대 농민소설을 연구하라고 지시했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고수한 것이다.
민우가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라.”
민영환 교수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과연 민우가 어떤 연구계획서를 들고 왔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준비는 철저히 했겠지? 이제 10월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발표를 할 수 없겠지.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을 테니.”
“자신 있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민우가 두 손으로 논문계획서를 전했다. 그것을 받아든 민영환 교수가 정독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목을 보자마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박민우. 왜 연구 테마를 왜 바꾸지 않은 거냐? 인쇄 잘 못 해온 건 아닐 테고.”
“아닙니다. 선생님을 만족시켜 드릴 만한 내용을 준비했으니 일단 내용을 읽어 주세요.”
그렇게 말한 민우는 당당히 웃었다.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그 모습에, 민영환 교수는 다시 연구계획서로 시선을 옮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