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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출판기념회 (3) (100/500)


100. 출판기념회 (3)
2021.09.20.


살짝 숟가락을 올리러 온 것 같다는 진섭의 예감은 적중했다.

마이크를 쥔 민영환 교수는 이번에 출판된 책에 대한 언급을 짧게 끝내고 제자들을 키운 자신의 노고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마이크 안 쥐여 드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야.”

“그러게 말이다…….”

식장 한쪽에서 민우와 진섭이 잡담을 떠드는 사이, 민영환 교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에, 그리고 말입니다. 우리 최민식 선생은 아주 고집스러운 면이 있지요. 학문적으로 말입니다. 조금의 타협이 없습니다. 지도하는 입장에서는 가끔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만, 역시 고진감래라고 할까요. 그 결과는 훌륭했지요. 당당히 박사 논문을 써 줬고,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모든 사람이 민영환 교수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사실 걱정할 만큼의 특별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지도교수로서 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인상적인 것은 민우와 민식을 ‘선생’이라고 칭해준 것이다. 민영환 교수도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민영환 교수의 말이 계속되었다.

“사실,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처음 봤을 때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조금 위험한 시도가 되지 않을까, 학계에서 용인될 수 있을까 하는, 지도교수라면 으레 하는 그런 걱정이 들었지요. 하지만 최민식 선생은 당당히 이겨내고 박사학위를 따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박민우 선생도 치하받아 마땅하지요. 이 두 사람을 제자로 둘 수 있었던 전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갈채가 나왔다. 민영환 교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기만 했다.

민 교수의 말을 듣던 한진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민우에게 귀엣말했다.

“웬일로 너까지 띄워 주냐? 저 양반이.”

“그래야 자기의 체면이 사니까. 이런 자리에서 한쪽만 추켜세워 봐라. 자기 망신이지.”

“하긴. 그래도 캠벨의 이론을 자기가 가져온 거라는 말은 안 하네.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분은 아니지.”

민영환 교수의 차례가 끝나고 다음 식순으로 이어졌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말씀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이번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인 두 분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저자의 소감을 듣는 차례였다. 가장 먼저 최민식이 나서서 담담히 소감을 전했다. 그의 성격답게 짧고 간단했다.

으레 그렇듯 감사의 말이 시작되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민우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짠한 감동을 느꼈다.

“박민우.”

차례를 끝낸 최민식이 민우를 부르며 마이크를 건넸다. 민우가 마이크를 받아들고 연단에 서서 참석자들을 바라보았다.

살짝 떨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긴장되는데? 만년필이라도 차고 나올 걸 그랬나.’

민우가 마이크에 입을 댔다. 그때 막 식장으로 서강일이 뛰어 들어왔다.

지각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인사했고, 민우는 눈짓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여기 계신 최민식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은 저에게 선배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이제는 그때가 온 거 같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겁니다.”

최민식이 살짝 당황했다. 눈을 깜빡이며 민우를 쳐다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예전의 일을 민우가 이런 식으로 풀어낼 줄 몰랐던 것이다. 내막을 알고 있던 수빈과 진섭은 미소를 지었다.

반면 자신의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될 줄 알았던 민영환 교수의 표정이 굳었다. 민우는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이 이론을 찾은 것은 제 학문적 노정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해외 서가 코너에서 캠벨의 이론을 찾기 위해 일주일 넘게 꼬박 새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결국 찾는 데 성공했고, 이렇게 단행본 출간까지 해낼 수 있었습니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민우가 돌아서서 꾸벅 인사했다. 민식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이보다 더욱 돈독한 선후배 관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네요. 우선…….”

민영환 교수의 이름을 시작으로, 모교의 서지훈 교수의 이름이 이어졌다. 송승현 실장의 이름은 물론, 팀 307호 멤버들의 이름도 껴 있었다.

그제야 민영환 교수의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 자신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왔으니까.

이름을 열거하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대학원 입학 이후 인연을 맺고 도움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빠짐없이 흘러나왔다.

그 과정에서 민우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도움을 받았구나. 그만큼 내 실력도 많이 늘었고.’

민우는 흡족한 미소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행사가 2부로 이어졌다.

민우와 민식은 나란히 앉아 단행본에 사인하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 부씩 나눠주었다. 민식 쪽의 줄이 조금 더 길었다.

* * *

“왜 이렇게 늦었어?”

민우가 사인본을 건네며 타박했다. 서강일이 멋쩍게 웃으며 책을 받아들었다.

“좀 일이 있었지. 누군가가 불쑥 찾아와 내 경쟁심에 불을 지르고 가 버려서 말이다.”

“경쟁심?”

테이블에 앉아 다음 책의 사인을 준비하던 민우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서강일을 올려다보았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국제비교문학회에 가입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네.”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기가 좀 뭐해서 말이야.”

민우는 피식 웃었다. 서강일이라면 그러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물론 호승심까지 갖추고 있는 사내였다. 인문학 공모전에서는 자신에게 패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민우가 물었다.

“너도 발표하려고?”

“글쎄.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 중. 어떻게 하면 너에게 패배의 쓴잔을 건넬지 차근차근 고민해 볼 생각이다.”

“어이구. 무서워라.”

농담조로 말이 오가고 있지만,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연구로 포장되긴 했어도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나도 뭘 할지 정하면 얘기해 줄게.”

다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서강일은 말을 아꼈다. 민우는 웃으며 이따 보자고 말했다.

사인회가 끝나고 3부 식순이 시작됐다.

“마지막으로 3부 강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 소개는 박민우 선생님께서, 그리고 최민식 선생님께서는 신화와 문학에 대한 강연을 해 주시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민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에는 떨리지 않았다. 품속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이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민우가 웃으며 서두를 열었다.

“먼저 제가 간단히 이 책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릴 텐데요.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책의 구성과 내용을 토대로 신화가 현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간단히 말씀을 드릴 겁니다. 아마 이 책의 집필 목적에 해당하는 부분이겠죠.”

민우는 일부러 강연이 아닌 브리핑 느낌으로 시작했다. 메인 무대는 최민식의 것이었다. 이미 사전에 약속된 것이었다.

민우가 프레젠터를 눌렀다.

곧 화면에 신화와 관련된 여러 이미지들이 출력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삽화였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림이었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성한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기원을 밝히거나 신적인 영웅들의 모험담으로 가득하죠. 우리와 매우 친숙한 그리스―로마신화를 떠올려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런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부분이죠.”

민우가 잠시 말을 멈추는 사이 화면이 바뀌었다. 유명한 소설 표지들이 나열되었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인간, 혹은 인간적인 것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신화와 소설은 매우 친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민우가 자신의 책을 오른손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화가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떠한 결과물이 나오는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최민식 선생님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다.

신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신화적 요소를 받아들인 소설에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지 낱낱이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민우는 욕망을 억누르고 마이크를 최민식에게 넘겼다.

“박민우 선생님께서 개요를 잘 잡아 주셨는데요. 결국 소설이 인간의 이야기인 만큼, 소설을 뜯어보면 신화적인 모티프들이 상당히 많이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민식은 신화와 소설의 특성을 각각 규정하고, 그것의 상관관계를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설명해 나갔다.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넣어도 될 정도로 밀도 있는 강의였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양 삼아 들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최민식이 20분간 열강을 했고, 3부 강연은 호평으로 마무리되었다.

특히 KERIS의 도유진 원장이 두 눈을 빛냈다. 민식에게는 진짜 실력이 있었고, 민우에게는 루카치의 만년필이 있었으니까.

이제 마지막 멘트가 남았다.

민우는 자연스레 마이크를 최민식에게 넘겼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가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바쁘신 와중에도 찾아와 축하의 말씀을 전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책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최민식도 옆에서 박수를 쳤다. 그러면서도 민우를 향해 조용히 핀잔을 던졌다.

“다음에 언제 책 써서 또 인사드리려고?”

“조만간요.”

민식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잔소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한일대학교로 돌아오며 서강일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오늘 출판기념회에서 보여주었던 민우의 모습은 생각 이상이었다.

‘석사 2학기 학생이 인문서를 냈다?’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쟁심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후자가 더 컸다.

서강일은 민우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을 펼쳤다. 깔끔하게 편집된 글자가 보였다. 슥 훑어본 서강일은 미소를 지었다.

툭.

그가 책을 덮었다.

결심이 선 것도 바로 그때였다. 막연하던 경쟁의식이 분명해졌고, 곧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학교냐?”

― 연구실인데요. 무슨 일이에요? 아까 약속 있다면서 나 버리고 외출해 놓고선.

“연구실로 복귀한다. 거기서 이야기하자.”

― 알았어요. 올 때 메로나.

전화를 끊은 서강일은 문리대 건물로 들어가 10층에 내려섰다. 그리고 곧장 석사 연구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머리를 틀어 올린 예쁘장한 여학생 하나가 혼자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는데도 몸매의 볼륨감이 상당했다.

그녀가 발을 들어 삼선슬리퍼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오빠. 메로나는?”

“지금 그런 거 찾을 때가 아니야.”

“왜 또 진지 빨고 그러셔? 클럽 가서 맘에 드는 사람 찾았는데 전번 못 땄나?”

여자가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는 서강일의 직속 후배이자, 한일대 국문과 석사 1학기 강민희였다. 일전에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에 후마니타스 팀 소속으로 참가하기도 했었다.

“박민우 알지?”

“아, 그 명인대 잡스요?”

명인대 잡스. 그것이 민우의 별명이었다. 워낙 발표를 잘해 강민희는 민우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서강일이 진지하게 말했다.

“빚을 갚을 때가 왔다.”

“어떻게?”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아 와. 나는 작가론을 찾을 테니까, 너는 작품론을 찾아봐. 지금 당장.”

“아, 또 밑도 끝도 없이 부려먹는다!”

하지만 강민희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오히려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엔 자신 있어요?”

“없어.”

문고리를 돌리던 강민희가 돌아보았다. 서강일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질 자신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민희가 미소를 남기고 연구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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