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9. 출판기념회 (2) (99/500)


099. 출판기념회 (2)
2021.09.17.


“오빠. 언니.”

연주가 민우와 수빈 두 사람 앞에 서서 인사했다. 하지만 시선은 민우 쪽을 향했다.

“출판 축하드려요.”

“고맙다. 근데 복장이 좀 과한 거 아냐? 무슨 파티에 온 것 같은데.”

“그래요? 이상한가…… 보통은 행사에 초대받으면 이렇게 하고 가거든요.”

연주가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옷차림을 둘러보았다.

“아니야. 예뻐.”

수빈의 한마디에 연주가 환하게 웃었다. 사실 두 사람은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다. 학교에서 본 이후로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때 최민식이 민우를 불렀다.

황급히 뛰어가는 민우의 뒷모습을 보던 연주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수빈 쪽으로.

“언니.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너 학교 그만둬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

“죄송해요. 제대로 말씀도 못 드리고…….”

그때 연주는 민우와 수빈이 같은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혹시나 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을 때의 실망감이 연주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수빈과 이야기를 나눴다.

“민우 오빠랑 같은 반지 끼고 계시네요.”

“아? 응. 그러고 보니 얘기 안 했구나. 우리 사귄 지 좀 됐어.”

잠시 어색한 기운이 돌았다. 하지만 오히려 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엽게 물었다.

“축하드려요. 오빠가 잘해줘요? 연애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할 때가 많아요.”

교묘하게 주어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애하면 어떤 느낌일까’가 아니라, ‘민우 오빠와 연애하면 어떤 느낌일까’였다. 물론 수빈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잘해주지. 그런데 은근히 민우 오빠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라서 말야. 큰아들 키우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긴 해.”

연주는 부러움을 애써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 민우는 이재환, 강예진과 인사를 끝내고 다시 수빈과 연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때 어떤 중년 여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인데.’

분명하진 않지만 얼굴을 보니 왠지 낯이 익었다. 민우가 잠시 멈춰 섰고,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중년 여성이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박민우 선생님.”

선생님?

민우는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싶어 더욱 미궁에 빠졌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고다.

“안녕하세요. 저, 그게, 실례지만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말입니다. 언제 뵈었었지요?”

“기억이 안 나실 법도 하지요.”

중년 여성은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것을 확인한 민우가 깜짝 놀랐다.

“아, 공모전 본선에서 심사위원으로 계셨던…….”

중년 여성의 정체는 바로 도유진이었다. 인문학 공모전 본선 심사위원이자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선 때부터 민우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물론 문철수 심사위원이 민우에 대해 설명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기억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당시 도유진은 KERIS로 복귀한 뒤 바로 민우의 강연 영상을 시청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교육적 역량이 매우 훌륭한 젊은이야.’

도유진은 민우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출판기념회에 찾아온 것이다.

도유진이 악수를 청했다. 민우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이번에 신간을 내신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더군요. 이렇게 불쑥 찾아왔는데 실례가 되진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해서요.”

민우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단순히 축하하기 위해서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비즈니스적인 이유가 있어서였다.

도유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공저를 하신 최민식 선생님도 좀 뵙고 싶은데. 어디에 계시죠?”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도유진 원장을 민식에게 소개했다. 통성명이 오가자 최민식은 깜짝 놀랐다. 그만큼 KERIS는 영향력 있는 기관이었다.

“출판 축하드립니다. 최민식 선생님. 앞으로도 종종 뵈었으면 하네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뇨 뭘요. 사실 저도 신화학에 관심이 많았죠. 이번에 새로운 이론을 소개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 중에 한번 저희 기관으로 놀러 오지 않으시겠어요? 박민우 선생님과 같이.”

민우와 민식이 눈빛을 교환했다. 둘 다 오케이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목요일 오후쯤이 괜찮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민우와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고마워요.”

살짝 묵례한 도유진 원장이 자리를 떴다. 아는 사람들이 좀 있는지 몇몇 인사들이 찾아와 그녀에게 인사를 청했다.

그 모습을 보며 최민식이 물었다.

“민우 너 도유진 원장님하고 아는 사이였냐?”

“아뇨. 아는 사이는 아니고, 전에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본선 있었잖아요? 거기 심사위원으로 오셨던 분이에요.”

“그렇군. 그런데 왜 여기에 오신 거지? 신화학에 관심이 있다고 찾아왔다는 건 좀 이상한데. 그냥 책을 사보면 되잖아.”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큰 기관의 수장이 한가하게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초대를 할 리는 없었다. 민우와 민식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민우가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다음 주에 찾아가 보면 알 수 있겠죠.”

“그래.”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민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식장에 들어오고 있었다.

“형, 저기.”

“응?”

민식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세미나실 입구 쪽으로 뛰었다.

“선생님, 오셨어요?”

“그래. 생각보다 꽤 크게 준비를 했구나. 승현이 녀석이 신경 좀 써줬나 보지? 크흠.”

정장을 입은 민영환 교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최민식은 남은 자리 중 가장 좋은 좌석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다.

‘못 온다고 했으면서 대체 왜 오신 거지?’

민우가 그렇게 의문을 품을 때 한진섭이 옆에 와 말을 걸었다.

“못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몰라 나도.”

“뭔가 살짝 숟가락을 올리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날카롭게 들지 않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확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박사 논문을 베이스로 쓴 단행본이다 보니, 지도교수의 역할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우는 연단에서 사회를 준비하는 직원에게 다가가 살짝 귀띔했다.

“저희 지도교수님이 오셨는데요. 본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축사 같은 걸 하실 수 있게 일정을 살짝 조정할 수 있을까요?”

“아, 뭐 그 정도야 문제없지요. 5분 정도면 적당할까요?”

“10분이요.”

민우는 민식과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민영환 교수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선생님.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이따 행사 시작하면 한 말씀 해 주셔야죠.”

“아, 그래도 되나? 내가 못 온다고 했다가 온 거라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그 정도는 문제없지요.”

“그럼 그렇게 해. 흐음, 무슨 이야기를 한담.”

그런데 민영환 교수가 돌연 인상을 굳혔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서지훈 교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민 선생님. 그간 별고 없으셨지요?”

“……그래. 후배님도 잘 지냈나?”

“저야 뭐 늘 그렇죠. 시골에서 밭 갈면서 조용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학술대회 성공적으로 치르셨다고 들었는데요. 축하드립니다.”

“아, 그래.”

민영환 교수는 별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서지훈 교수도 그것을 느꼈는지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민우는 잠시 서지훈 교수와 식장을 나섰다. 할 말이 밀린 탓이다.

“너 요즘 딴짓하느라 바쁜 거 같더라?”

“딴짓이요?”

“번역 말이야. <사각 살인> 말고도 다른 거 하나 더 하고 있다며.”

서지훈 교수가 흥미진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대체 누가 말한 걸까. 아무래도 주예린이 일러바쳤을 확률이 높았다.

“용돈이 필요해서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지금은 영한번역을 하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한영번역을 해 보려고요. 국내 작품들 중 괜찮은 것들을 해외에 소개해 보고 싶어요.”

“혹시 맨부커 노리고 있는 거냐?”

민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훈 교수는 역시나 하는 표정이다.

“왠지 일차원적인 결정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굳이 박사를 국문과에서 할 이유는 없어지는 거 같은데. 너도 피부로 느끼고 있구나. 민 선생이 박사 안 받아줄지도 모른다는 걸.”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선생님께 상의를 좀 드리려고 했어요.”

서지훈 교수가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행사가 시작되려면 아직 2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는 민우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엔 공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송승현 실장이 늘 기대 서 있던 그곳에서 서지훈 교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얘기해 봐.”

“명인대 불문과에 이경훈 선생님이라고 계시는데, 비교문학 전공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하시더라고요.”

“이경훈 교수라.”

서지훈 교수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흔쾌히 허락해줄 줄 알았는데, 의외의 태도였다.

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평이 나쁘지는 않은 사람인데, 누구나 그렇듯 장단점이 있는 양반이지.”

“장점은 알겠는데 단점은 뭔가요?”

“실적주의자야. 실력이 있는 사람만 가까이하려는 경향이 있지. 네가 꾸준히 성장한다면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겠지만, 잠깐이라도 삐걱거린다면 금방 내쳐질 수도 있어.”

서지훈 교수가 평소보다 담배를 빠르게 빨았다. 그만큼 민우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장할 자신이 있으면 지도교수로 삼아도 좋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리고 오라고 할 때 가는 게 좋기도 해. 어차피 네가 국문과에 아득바득 버티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잖냐.”

“차라리 상아대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너 박사 입학할 즈음엔 우리 과 없어질지도 몰라. 요즘 프라임 사업이니 뭐니 말들이 많아서.”

반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긴 했지만, 민우는 진담처럼 들렸다.

“박사도 명인대에서 해라. 그래야 나중에 박사를 따고 나서도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비교문학 전공으로 마음을 굳힌 거지?”

“예.”

고개를 끄덕인 서지훈 교수가 담배를 짓이겨 껐다. 최근 민우가 외국어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민우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것.

그리고 한국 문학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우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국문과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즉, 박사과정은 민우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서지훈 교수가 생각에 잠겼다.

‘비슷한 전공이라고 해도 엄연히 그쪽만의 룰이 존재해. 과연 녀석이 견뎌낼 수 있을까?’

새로운 도전엔 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생각했다. 제자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

곧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열정, 그리고 노력과 성실성 모든 면에서 민우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기왕 국문과에서 나올 거면 민 선생한테 한방 크게 먹이고 나와.”

“예? 그게 무슨…….”

“석사 논문 기가 막히게 쓰고 나오라고. 불후의 명저급으로. 민 선생이 너 박사과정 들어오라고 바짓가랑이 붙잡는 것도 꽤 즐거운 경험이 아닐까? 하하하.”

그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민우는 그럴 생각이었다.

출신으로 역량을 평가하는 민 교수에게는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제자라고 해서 지도교수를 가르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향후 100년 동안 꾸준히 피인용되는 명저를 쓰겠습니다.”

민우의 어깨를 한차례 다독인 서지훈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려가자. 곧 시작하겠네.”

“옙.”

두 사람이 세미나실로 돌아왔을 땐, 이미 식장이 만석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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