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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출판기념회 (1) (98/500)


098. 출판기념회 (1)
2021.09.16.


박진영 교수 연구실에서 나온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오랜만에 한일대에 온 김에 서강일에게 연락을 해 보려는 것이었다.

― 어? 웬일이냐. 전화를 다 하고.

“나 지금 한일대에 와 있어. 시간 괜찮으면 얼굴이나 좀 보고 갈까 해서.”

― 지금 학교에 왔다고? 무슨 일로?

“일단 나오기나 해. 얼굴 보고 얘기하자.”

마침 서강일은 수업이 없어서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민우는 문리대 건물 옆쪽에 있는 카페에서 서강일을 기다렸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흰색 반팔 티를 걸친 서강일이 나타났다. 허술한 복장이었지만 워낙 훈남이라 뭘 입어도 잘 어울려 보였다.

실제로 지나가던 여학생 몇 명이 강일을 보며 소곤거리기도 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강일이 다가왔다. 그는 민우의 옷차림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오올! 기합 단단히 들어가 있는데?”

“이따 올 거지?”

“당연히 가야지. 공짜로 책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마다할 수가 있나. 일단 커피나 한잔합시다.”

커피는 서강일이 샀다. 민우와 강일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야? 올 거면 미리 얘기 좀 하지.”

“여기 영문과에 박진영 교수님이라고 계시는데, 그분하고 좀 인연이 있거든. 학회 일 때문에 상의할 게 있어서 왔어. 좀 갑작스럽게 약속이 잡혀서 연락을 못 한 거다.”

“학회?”

“국제비교문학회. 너 비교문학 쪽으로 연구하니까 그쪽 가입되어 있지 않아?”

서강일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지. 학회 활동은 박사 들어가서부터 해도 안 늦으니까. 굳이 미리 가입해서 연회비 낼 필요 있나? 학회지야 도서관 가면 볼 수 있는데.”

“그렇긴 하지.”

민우는 박진영 교수와 나눈 대화 중 일부를 그에게 말해 주었다.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발표를 하려는 것을.

예상대로 서강일의 반응은 격했다.

“야, 너무 빠르잖아! 석사 2학기생이 벌써 학회에서 발표를 한다고? 이거 완전 반칙인데.”

“마침 적당한 테마가 하나 생겼거든. 서랍에 묵혀두기 아까워서 좀 꺼내 보려고.”

“흐음, 발표라…….”

서강일이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자극을 받았다. 곧 그의 두 눈에 경쟁심이 불타올랐다.

“이렇게 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준비해둔 거 있어?”

“전에 얘기했잖아. 쥘 베른 소설의 수용사 연구. 그거 가지고 발표 신청을…… 아니. 잠깐만.”

서강일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발표를 하는 게 최선일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민우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기다려 주었다.

곧 서강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발표가 최선책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네.”

“마음대로 하셔.”

그때 서강일의 핸드폰이 한차례 울렸다. 알람이었다.

“나 곧 수업이다. 남은 이야기는 이따 지음사에서 하자고.”

“그래. 이따 봅시다.”

서강일과 헤어진 민우는 바로 지음사로 향했다.

* * *

민우는 원고에 집중하질 못했다. 출판기념회 시작 시간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키보드를 누르는 손이 자주 멈췄다.

결국 민우는 쓰던 연구계획서를 저장하고 창을 꺼버렸다.

‘오후 5시. 아직 한 시간 남았네. 이르긴 하지만 미리 내려가 볼까?’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사 준비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지음사니까 알아서 잘해줄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민우는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민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3층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와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과연 출판계의 대기업다운 스케일이었다.

한마디로 크고 화려했다.

무대 위엔 <신화와 인간 :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 출판기념회라는 현수막이 붙었다. 민우와 최민식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민우는 무대를 등지고 돌아섰다. 시선을 움직여 장내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넓다. 사람들이 많이 와도 문제가 없겠어. 100명은 거뜬하겠는데?’

중앙에 붉은 카펫이 깔렸고, 원형 테이블 위에 물과 꽃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뒤쪽에는 뷔페가 한창 준비되고 있었다.

세미나실이라기보다는 호텔의 연회장 같은 느낌이었다.

“벌써 내려왔어?”

장철호 주임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여서. 기념회는 처음이거든.”

“그렇구만. 처음이라 잘 모를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송승현 실장님이 신경 엄청 써 주신 거야. 보통은 이렇게 크게 안 하거든.”

“그래? 아무튼 미안하다. 괜히 너한테까지 일 시키는 느낌이네.”

장철호 주임은 이번 출판기념회의 안내를 맡았다. 민우가 부탁하기도 전에 자청했고, 윤정민 팀장이 허가했다.

장철호 주임은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야 좋지. 일할 시간에 농땡이 쳐도 되니까.”

“노림수였냐? 와, 대박. 우리 철호 주임 달더니 배짱이 두둑해졌네.”

“연봉이 별로 안 올라서 배짱이라도 더 늘리려고. 알잖아. 이쪽 업계 월급 짠 거. 대기업이라고 다를 거 없다.”

가볍게 직장에 대한 험담하며 두 사람은 허물없이 웃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장철호는 안내데스크에 앉아 손님 맞을 준비에 들어갔고, 민우는 선물이 놓인 테이블로 이동했다.

방문객을 위한 선물이었다. 커다란 백에 지음사에서 출간된 책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물통과 다이어리, 캘린더 같은 물건도 들어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민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철호 말이 허풍은 아니었나 보네. 나중에 송 실장님께 따로 인사를 드려야겠다.’

선물 구성만 보더라도 송승현 실장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민우는 무대에 올라 빔프로젝터와 마이크를 살펴보았다. 오늘 출판기념회에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강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인 강연은 최민식의 몫이었다. 민우는 사전 브리핑을 잠깐 맡을 예정이었다.

“박민우.”

때마침 식장에 최민식이 들어왔다. 면도하고 이발을 하니 꽤 단정해 보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빔프로젝터 이상 없는지 체크하고 있었어요. 프레젠터도 잘 되네요. 마이크도 빵빵하고.”

“야.”

손으로 허리를 짚은 민식이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널 누가 말리겠냐. 넌 직원이 아니라 오늘의 주인공이야. 엉? 손님 맞을 준비나 해.”

“옙.”

그래도 민식은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후배가 든든했다.

그때 세미나실에 누군가 들어왔다. 민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가장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어머니와 누나였다.

민우는 재빨리 입구로 뛰었다.

“엄마, 왔어?”

“아이구!”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양손으로 민우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주름이 왠지 예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우리 아들. 장하다. 장해. 이렇게 좋은 회사에서 책도 내고 말야. 응? 그간 책 쓰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에휴, 아주 그냥 얼굴이 반쪽이 됐어!”

“고생은 무슨. 엄마가 딸은 몰라도 아들 하나는 잘 키웠잖아.”

“딸은 몰라도? 이 자식이.”

민아가 민우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그때였다. 이수빈의 목소리가 그를 살렸다.

“민우 오빠.”

이수빈은 반팔 원피스에 검은 구두를 신었다. 복장은 단출했지만 미모는 출중했다. 직원들이 일손을 멈추고 그 자태를 감상할 정도였다.

민우가 수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한테 인사드려야지.”

“응.”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민우는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엄마. 내 여자친구.”

“안녕하세요. 어머니. 이수빈이라고 해요. 첨 뵙겠습니다.”

이수빈이 가슴에 손을 모으고 차분히 인사했다. 잠시 수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예전에 사진을 한 번 보긴 했는데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쁘네. 우리 민우 많이 챙겨준다고 들었어요. 앞으로도 잘 지내요. 응?”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낼게요.”

어머니의 미소를 본 수빈은 안심했다. 사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어쩌나 하고 며칠 전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민우가 나섰다.

“엄마. 일단 누나랑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 좀 있어야 하니까.”

슬슬 손님들이 하나둘 입장하고 있었다. 민우는 수빈과 함께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한진섭과 주예린이 나란히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선배인 최민식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민우 쪽으로 돌아왔다.

“축하한다. 박민우. 의리 없게 먼저 출판을 하다니. 섭섭하네.”

“알지? 너 맛있는 거 사주려고 책 낸 거야.”

“역시 우리 민우 형님이 최곱니다!”

진섭의 너스레는 여전했다. 새삼스럽지만 민우는 그와 악수를 했다.

격려의 의미였다. 민우는 이런 일로 으스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진섭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빠. 축하해용.”

“웬 꽃이야?”

주예린은 커다란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보기만 해도 비싸겠다는 느낌이 왔다.

“이거 제가 특별히 주문한 꽃다발이에요. 아주 싱싱한 놈이죠. 향도 아주 진해요.”

“뇌물의 향이 솔솔 나는군.”

“그럴 리가요!”

피식 웃은 민우가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민우 씨.”

그때 뒤에서 얌전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공은 라온북스 편집자 이유리였다.

“안녕하세요. 출판 축하드려요!”

건강한 미소가 보기 좋았다.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귀여운 외모가 돋보였다.

“팀장님이 오늘 출장을 가시게 돼서 제가 대신 왔어요.”

“안 그래도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매번 좋은 작업물 보내 주셔서 저희가 더 감사하죠.”

민우는 꽃다발을 이수빈에게 넘겼다. 잠깐 이유리와 할 이야기가 있었다.

“유리 씨.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넷? 아, 넵.”

민우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여기도 출판사이기 때문에 업무 이야기는 조용히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 위자드> 2권 번역본 말입니다. 다음 주에 마감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원래는 이번 주에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일정이 좀 꼬였습니다.”

“아유, 당연하죠. 기일은 넉넉하니까 천천히 보내 주셔도 돼요. 1권을 너무 빨리 보내 주셔서 저희도 당황하던 중이었어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번에 <사각 살인> 증쇄 들어갔다면서요? 현 팀장님께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이유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게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은 거 있죠? 편집자일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축하해요. 유리 씨가 담당이셨죠? 전체적으로 신경을 잘 써주셔서 결과가 좋았나 봐요. 현장에 나가서 반응도 체크하시던데. 인상 깊었습니다.”

민우는 한성문고 매대에서 이유리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좋은 편집자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이번 결과를 보고 확신을 하게 됐다.

이유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겸손을 표했다.

“아유, 아니죠. 민우 씨가 번역을 잘해주신 덕이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더 위자드>도 잘 부탁드려요.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살짝 부담되는데요?”

“아, 그러면 안 되는데! 그냥 드려본 말씀인데…….”

“하하하. 농담입니다. 아무튼 오늘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따 다시 인사드릴게요.”

민우가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이수빈이 민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누구예요? 저 귀여운 아가씨는.”

“라온북스 편집자 이유리 씨야. 원래는 현기혁 팀장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대신 온 거 같아. <사각 살인> 담당 편집자시고.”

“되게 어려 보이는 데 능력이 좋으시네요. 몇 살이래요?”

“나도 잘 몰라. 그렇게 친하진 않아서.”

그때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의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민우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천천히 식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연주였다.

황금빛 장신구가 불빛에 반짝였다. 평소에 치장을 잘하는 편은 아닌데, 오늘은 뭔가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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