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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또 다른 길 (2) (97/500)


097. 또 다른 길 (2)
2021.09.13.


다음 날, 민우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자취방을 나갔다. 어제 미리 수빈이가 코디한 대로 입었는데 상당히 잘 어울렸다.

셔츠에 재킷은 기본이었다. 대신 바지는 얇은 슬랙스를 입었다.

여름이라 덥긴 했지만, 일단 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민우였다. 오늘은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수업 없으니까 바로 지음사로 가서 연구계획서 좀 써야겠다. 번역 문제는 이따 기념회에서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민우는 따가운 햇볕을 맞으며 버스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타야 하는 버스가 방금 지나갔는지 쉽게 오지 않았다.

우우우웅―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니 의외의 이름이 보였다. 한일대학교 영문과 박진영 교수였다.

무슨 일일까?

그에게는 출판기념회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었다. 일단 민우는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예. 교수님. 안녕하세요.”

― 민우 씨. 잘 지냈죠? 전화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한번 연락을 드린다는 게 경황이 없었네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지야. 하하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그런지 반가웠다.

확실히 최근에는 연락이 조금 뜸했다. 민우가 블로그는 물론 다른 일에도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수님. 무슨 일로 연락을 주셨나요?”

― 경한신문을 읽다 보니 우연히 민우 씨 이름이 보여서 전화를 했습니다.

“아, 인터뷰를 보셨군요.”

그때 저 멀리 민우가 타야 하는 버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민우는 핸드폰을 바꿔 쥐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 인문학 공모전 있잖습니까. 우리 학교 국문과 팀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했더군요.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활약이 기대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아, 교수님 잠시만요. 버스 좀 타겠습니다. 지금 출근하는 길이라서요.”

민우가 재빨리 버스에 올라 카드를 태그했다. 그리고 빈자리에 앉아 다시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말씀하세요.”

― 다른 건 아니고, 이번에 외서를 하나 번역하신 거 같아서.

경한신문 인터뷰 기사에 번역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가 있었다. 인터뷰를 읽었다면 당연히 그 소식도 접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리차드 와일즈의 <사각 살인>이라는 작품을 번역했어요.”

―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지 뭡니까. 제가 리차드 와일드 작품의 서평을 쓰고 있었거든요. 박민우라는 이름을 봤을 때는 민우 씨인지 몰랐습니다. 프로필이 워낙 심플해서. 학교 이름이라도 넣지 그랬습니까?

기막힌 우연이었다.

리차드 와일드는 영미권에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였다. 그 작가의 작품을 민우가 번역하고, 그 평론을 박진영 교수가 쓰고 있는 것이다.

왠지 민우는 쉽게 이어진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다.

“그러셨군요. 이거 진작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네요.”

― 그만큼 많이 바쁘셨겠지요. 책을 번역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손도 많이 가는 작업이고. 눈도 많이 아프고.

“맞아요. 교수님은 많이 해 보셨으니 잘 아시겠네요. 전 이제 초짜라서. 노하우 좀 많이 주세요.”

민우는 적당히 보조를 맞췄다. 루카치의 안경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물론 영어 번역 정도는 이제 안경을 쓰지 않아도 쉽게 할 수 있다.

루카치의 안경은 단순히 번역의 효과만 있는 게 아니다. 학습 효과도 있다. 한 번이라도 읽은 단어와 문장은 머릿속에 각인된다.

결국 노력 여하에 따라 안경을 쓰나 쓰지 않으나 효율은 거의 비슷해지는 것이다.

― 그나저나 어제 저희 국제비교문학회에 가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총무간사가 제 지도 제자거든요. 민우 씨 가입신청서를 확인했습니다. 우연히요.

“예. 가입한 건 맞습니다만. 우연히요?”

― 저희 학회 회원만 4백 명이 넘는데, 6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은 민우 씨 한 명뿐이라서요. 특이한 분이 가입신청을 했다고 총무간사가 신청서를 가져오더군요. 그래서 알게 됐지요.

그제야 민우의 의문이 풀렸다.

국제비교문학회는 해외 문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회다. 그만큼 외국어의 비중이 큰 곳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6개 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가입했으니 총무간사가 박진영 교수에게 특별히 보고한 것이다. 이 건은 이미 국제비교문학회 회장에게도 보고가 되어 있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추켜세워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민우는 조용히 웃었다. 쓸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구사 가능한 언어를 써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슬슬 학회 활동을 할까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교수님이 계신 국제비교문학회에 가입신청을 했습니다.”

― 이제 석사 2학기인데 열정이 대단합니다. 역시 제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요. 하하하.

박진영 교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마치 민우를 자신의 제자를 대하듯 했다. 친근하게.

― 그런데 현대문학연구학회 쪽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민영환 교수님이 그쪽에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쪽도 이미 가입은 되어 있어요. 이번에 논문을 하나 발표할 계획인데, 어디에서 할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두 사람은 학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라인이 다른 두 학회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 이건 쉽게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민우가 한일대 라인인 국제비교문학회를 선택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민영환 교수는 탐탁잖게 생각할 것이다.

― 그렇군요. 그럼 제가 제대로 전화를 한 거군요.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연구실에 놀러 오시겠습니까? 전 오늘도 상관없습니다.

민우는 재빨리 오늘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스캔했다. 출근은 미루면 된다. 오후 출판기념회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약속은 없었다.

“오전에 괜찮으시면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오후에는 출판기념회 때문에 어려울 것 같고요.”

― 좋습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일단 버스로 지하철역까지 간 다음 한일대학교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다음 주로 약속을 미뤘을 것이다. 그렇게 한가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학회 발표가 걸린 일이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좋은 기회지.’

그래서 민우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오전에 약속을 잡았다.

예전에 이경훈 교수에게 말한 대로 민우는 박진영 교수에게 자기 연구물에 대한 정보를 흘릴 예정이었다.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할 생각은 없었지만 민영환 교수에게 좋은 자극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때가 맞는다면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를 해도 되겠지.’

민우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간곡한 어조로 자신에게 발표 부탁을 하는 민영환 교수의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쉽게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일이 잘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자. 할 수 있는 데까지.’

30여 분 정도를 지하철에서 보낸 민우는 한일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섰다. 예전처럼 헤매지 않고 바로 문리대 건물을 찾았다.

민우는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진영 교수가 두 팔을 벌려 자신을 맞았다.

“어서 오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근데 얼굴이 좀 타신 거 같네요?”

“미국에 좀 다녀왔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새까맣게 탔네요. 일단 앉으시죠.”

민우는 소파에 앉았다. 박진영 교수가 직접 마실 것을 챙겨주었다.

박진영 교수가 물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출판기념회가 있습니까? 명인대 쪽 교수님 중 누가 책을 내시는 모양이죠?”

“아뇨. 제 책입니다. 같은 연구실 선배와 공저한 책입니다.”

“아하, 예전에 말씀하신 그 책이군요. <신화와 인간>이었던가요. 벌써 출간이 되었습니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박진영 교수가 의외로 관심을 보이자 민우는 내심 아차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도 초청장을 보낼 것을.

민우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들러 주세요. 지음사 본사에서 오늘 저녁 6시에 열립니다.”

“스케줄 확인해 보고 가능하면 가겠습니다. 대학원 강의가 있는데 일찍 끝나려나 모르겠군요.”

그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서운하거나 하진 않았다. 안 그래도 오늘 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나저나 아까 전화로 하신 말씀 있잖습니까.”

박진영 교수는 조금 급했는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음료로 목을 축이던 민우가 그를 주목했다.

“발표 말씀이죠?”

“예. 우리 국제비교문학회에서도 발표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아무래도 제가 연구하는 테마가 이쪽 학회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비교문학 쪽이거든요.”

사실 박진영 교수는 이번 겨울 학회를 걱정하고 있었다.

국제비교문학회는 KCI급 학회이긴 하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근 발표 지원자 수가 감소하는 추세였다.

예전만큼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가 많지 않은 데다가, 새로운 학회들이 생겨난 탓이었다.

학회를 열게 되면 식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연구 이사인 박진영 교수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물론 그는 학회의 내부 사정을 민우에게 말하진 않았다. 대신.

“테마가 뭔지 여쭤봐도 괜찮겠지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관한 논문입니다. 지금까지 자주 다뤄진 테마이긴 한데, 조금 방법론을 새롭게 해서 써볼 생각이거든요.”

“새로운 방법론이라 하시면?”

“사실 프랑스 실존주의라는 게 꽤 오래된 사조잖습니까?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여전히 실존주의의 영향력이 곳곳에 남아 있어요. 그 점을 부각시켜서 1950년대 문학을 재조명해 볼 생각입니다.”

이미 민우는 국내 사정에 맞게 통계자료를 구축하고 있었다. 물론 그 자세한 방법까지는 박진영 교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박진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제가 그쪽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프랑스 실존주의 수용은 저희 학회에서도 많이 다뤄진 부분이기도 하지요. 새로운 관점이 어떤 건지 기대가 되는군요.”

“아직 준비 단계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소르본의 피에르 랑느 박사님과도 교류하고 있고요.”

“그러시군요.”

피에르 랑느 박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은 모른다. 영문학 전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소르본의 위엄은 잘 알고 있었다.

박진영 교수가 말을 이었다.

“혹시 논문계획서가 있으시면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아직 작성 전입니다. 아이디어를 정리만 해 둔 상태라서 보여드리기가 민망하네요. 나중에 완성되면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물론 민우는 핵심 아이템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박진영 교수와 친하긴 하지만,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박진영 교수에게 보낼 논문계획서에는 통계자료 같은 핵심 아이템은 빠져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를 기다리지요.”

“최대한 빨리 완성을 해 보겠습니다.”

박진영 교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은 보다 먼 미래였다.

“앞으로 저희 학회에 많이 참여해 주십시오. 민우 씨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시든 기꺼이 검토를 하겠습니다.”

“예. 노력해 보겠습니다.”

일이 뜻대로 풀렸다. 어떤 것을 가져오든 긍정적으로 봐주겠다는 말이었다.

음료를 들이켠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일이 진척되었을 때 민영환 교수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교수님. 이젠 말씀 편하게 해 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매번 존대를 듣기가 불편해서 말입니다.”

예전에 민우가 한 번 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박진영 교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민우를 포섭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말을 편히 하지. 대신 민우 씨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박 선생이라고 부르마.”

“예. 그렇게 하시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먼 길을 온 보람이 있었다. 이제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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