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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또 다른 길 (1) (96/500)


096. 또 다른 길 (1)
2021.09.10.


“안녕하세요. 선생님.”

연구실 안에는 이경훈 교수 혼자였다. 다른 멤버 한 명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어서 와라. 그러고 보니 내일 출판기념회 하지? 금요일이었나.”

“예. 벌써 내일이네요.”

민우는 며칠 전에 이경훈 교수에게도 초청장을 준 적이 있었다.

전공은 좀 다르지만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미래의 지도교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잘 챙겨야 했다.

“혹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이경훈 교수는 아쉬운 어조로 답했다.

“시간이 나면 가려고 했는데 내일 갑작스럽게 일정이 잡혀서 아쉽게 됐군. 대신 근사하게 사인해서 한 권 줘. 읽어보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연주는 오늘 못 온다고 했지?”

“예. 오늘 사내 행사가 있는 날이라 자리를 비우기 곤란하다고 하더군요.”

이경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이미 그는 정연주의 실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가 들리고 처음 보는 사내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중저음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짙은 갈색으로 염색을 했는데,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견실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키가 컸다. 180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다. 나이는 서른이 좀 넘어 보였다.

“인사들 하지. 이쪽은 불문과 박사과정 이희문. 이쪽은 국문과 석사과정 박민우.”

민우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박민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능력은 출중하신데 정작 국문과에서는 주목을 못 받으신다고. 하하핫.”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갔나요? 아직 많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부족하긴요. 우리나라 대학의 고질적인 병폐지. 실력이 아니라 라인으로 승부를 보는. 하아, 이거 정말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이희문이 힘내라는 듯 민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민우는 왠지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친형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 한마디로 이희문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다. 나름 깨어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희문이 붙임성 있게 물어왔다.

“듣자 하니 랑느 박사님하고 친하다면서요?”

“친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안부 묻는 사이입니다.”

“그게 친한 거지 뭐. 부러운데요. 저도 내년쯤 소르본으로 건너갈 생각인데. 그때 다리 좀 놔 주십쇼.”

“노력해 보겠습니다.”

시원시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민우는 왠지 이번 프로젝트도 기대가 되었다.

프로젝트는 단순히 일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지난 학기에 연주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처럼,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이희문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 이런 것이 민우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아무튼 사담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에 대한 개요에 들어갔다. 이경훈 교수가 나서서 작업 방식을 설명했다.

“이번에는 좀 특이한 방식으로 번역을 진행해 볼까 한다.”

“특이한 방식이요?”

“세 권이니까, 한 사람이 한 권을 통으로 번역을 하는 거지.”

민우는 물론 이희문도 깜짝 놀랐다. 보통 학술번역은 챕터별로 나눠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효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이 높아지는 만큼 문제가 생긴다. 경험이 많은 이희문이 그것을 지적했다.

“용어 정의 부분이 애매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번역해야 하는 게 세 권인데, 같은 용어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면 곤란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뭐, 선생님께서 복안이 있으시니 그렇게 말씀하신 거겠지만.”

“그렇지. 내가 이런 일을 하루 이틀 한 줄 아나?”

그렇게 운을 뗀 이경훈 교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용어 검색용 데이터베이스를 하나 만들었다. 용어와 풀이를 입력하면 서버에 저장되고 미리 저장된 용어를 검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지. 아, 직접 보는 게 빠를까?”

이경훈 교수는 책상에서 노트북을 가져와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디자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투박한 프로그램 창이 열렸다.

크게 두 개의 필드가 있었는데, 원어와 해석을 입력하는 곳이 따로 나뉘어 있었다.

이경훈 교수가 각 필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은 원어 용어를 적는 곳이고, 이쪽은 해석된 말을 적는 창이야.”

“적은 다음 입력 버튼을 누르면 됩니까?”

“그렇지.”

이경훈 교수는 원어 창에 ‘engagement’를, 해석 칸에 ‘앙가주망’을 입력했다. 입력 버튼을 누르니 저장이 되었다는 알림창이 떴다.

“이제 서버에 저장이 된 거야.”

“신기하네요. 이런 프로그램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는 친구한테 부탁했지. 아무튼 기능이 더 있는데, 잘 봐. 이 돋보기 버튼을 누르면 서버에 저장된 단어를 검색할 수 있다.”

이경훈 교수는 마우스를 움직여 돋보기 버튼을 클릭했다. 오른쪽으로 창이 확장되었다. 그는 방금 입력한 ‘engagement’를 입력했다.

― engagement / 앙가주망 / 이경훈 / 비고

원어와 해석, 그리고 저장자 이름, 비고 순으로 정렬이 됐다. 천성 문과였던 민우로서는 신기한 프로그램이었다.

‘확실히 이 프로그램을 쓰면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이지 않더라도 용어 정의를 쉽게 할 수 있겠어. 이경훈 교수님이 핸들링을 하실 테니까.’

그런데 결과창에 나타난 글자가 노란색으로 되어 있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민우가 질문했고, 이경훈 교수가 답했다.

“좋은 질문이야. 내가 검토를 하지 않은 용어는 이렇게 노란색으로 표시되지.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야.”

“검토는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는 거죠?”

“당연히. 검토가 끝나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는 녹색으로 표시될 거야.”

“그럼 노란색으로 된 용어는 가해석 정도로 이용해야겠네요.”

이경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이 프로그램의 핵심 기능을 설명했다.

“간단히 예를 들면 민우 네가 ‘play’라는 단어를 ‘놀다’라고 번역을 했다고 쳐. 연주는 그 단어를 ‘연주하다’로 번역을 했고. 희문은 ‘하다’라고 등록을 했다. 그러면 내 클라이언트 쪽으로 세 가지 번역본이 전달이 돼. 그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내가 골라서 서버에 등록을 시키는 시스템이야. 그럼 선택된 단어는 검색 화면에서 녹색으로 표시가 되지.”

턱을 쓸어 만지던 이희문이 의문을 제기했다.

“혹시 예외적인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저자가 같은 단어를 다른 맥락으로 쓸 경우요.”

“그때는 내가 비고란에 코멘트를 남겨둘 거야. 그걸 보고 재량껏 번역하면 된다.”

“그렇군요.”

희문은 모든 의문이 풀렸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스템이라면 용어의 정의 문제로 서로 기 싸움을 할 필요가 없이 소신껏 번역만 하면 된다.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민우는 희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기보다 깐깐한 사람 같았다. 이경훈 교수와의 문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희문 씨, 보통이 아닌 거 같아. 만약 이분하고 조를 짰다면 꽤 힘들었겠어.’

그때 이경훈 교수가 노트북을 닫고 한쪽으로 치웠다.

“이 프로그램은 각자 메일로 전송해 주도록 하마. 이따 오후쯤에 확인해 보도록 해,”

그리고 민우를 바라보았다.

“매뉴얼을 보내 주긴 할 건데, 네가 연주에게 직접 가서 설명해 주는 게 좋을 거 같구나. 번역서도 전달해 줄 겸 해서. 연주 학생은 왠지 프로그램 다루는 거에 익숙하지 않을 거 같아서 말이지.”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다녀올게요.”

이경훈 교수가 다시 한번 일어나 원서 세 세트를 가져왔다. 두 세트는 민우와 연주의 몫이고, 나머지 한 세트는 이희문의 몫이었다.

이경훈 교수가 책을 나눠주며 작업서를 정해주었다.

“<문학사회학 입문>은 민우가 담당하고, <근대문학의 현상>은 연주가, <프랑스문학의 역사성>은 희문이가 맡는다.”

그때 민우가 질문했다.

“번역에 할당된 기간은 얼마 정도 됩니까?”

“권당 6개월. 1년짜리 프로젝트니까 여유 있게 간다. 중간에 세미나 열어서 교차검증도 해 볼 거니까 선물로 받은 책도 한번 읽어보는 게 좋을 거야.”

“옙.”

그것으로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민우와 이희문은 연구실을 나섰다.

“박 선생. 만나서 반가웠고, 다음에 또 보자고.”

이희문이 손을 쓱 들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던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배울 게 많은 사람 같았다.

* * *

“망했어.”

“네?”

민우가 깜짝 놀랐다. 307호에 들어오자마자 강예진이 불쑥 그렇게 말한 것이다. 확실히 그녀의 표정은 암담해 보였다.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현대문학연구학회 있잖아. 이번 겨울에도 우리 대학에서 한댄다.”

“헉.”

민우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확실히 그 이유라면 강예진이 한숨을 내쉴 만하다.

“왜 동정표를 날리니? 넌 발표자로 나갈 예정이니 행사 준비 열외잖아.”

“아, 그렇죠.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하나도 석사 논문 때문에 도와주기 어려울 거 같고. 너도 그렇고. 경험자들이 빠지니 눈앞이 캄캄하다.”

“제가 일 잘하는 친구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누구?”

그때 민우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307호를 나가려던 주예린을 지목했다. 마치 도둑질을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하며 놀랬다.

주예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호, 혹시 저 부르셨어요?”

“이리 와.”

민우는 손을 까딱거렸다. 주예린이 얌전히 민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예진이 누나 도와서 겨울 학회 준비 좀 해. 힘들긴 해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선생님들한테 점수 딸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알았어요.”

유독 강예진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는 주예린이었다. 민우가 강예진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예린이는 원 플러스 원이니까, 한 명이 더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원 플러스 원?”

“곧 알게 되실걸요.”

강예진은 그 말을 나중에서야 이해했다. 주예린이 학회 준비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한진섭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한진섭이 당찬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제가 접수 데스크에 앉겠습니다. 민우보다 우월하다는 걸 실력으로 보여드리죠.”

“이번에도 해외 연사들 오시는데?”

진섭이 움찔했다.

“역시 전 접수 데스크보단 행사장 안내가 체질에 맞는 거 같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죠!”

강예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뻘쭘했던 한진섭이 한마디 덧붙였다.

“열심히 하겠슴다!”

“뭐, 됐어. 이렇게 된 이상 박민우가 겨울 학회 발표에서 탈락되기를 바라야겠네.”

“그건 좀 너무 나가셨는데요.”

“그런가? 아무튼 예린이랑 진섭이는 나 따라와. 이야기 좀 하자.”

강예진이 두 사람을 데리고 박사 연구실로 돌아갔다.

세 사람이 나가고 나자 307호가 텅 비었다. 민우는 자리를 잡고 플래너를 열었다.

‘학회 하니까 생각이 나네. 국제비교문학회에 가입해야 하는데.’

확실히 플래너에도 붉은색 글씨로 ‘학회 가입’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하는 게 좋겠어. 민 선생님 보여드릴 논문계획서는 주말에 시작하고, 다음 주 목요일쯤에 찾아뵈면 되겠네.’

세부 계획을 모두 세우고 플래너를 닫았다.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국제비교문학회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아이디를 먼저 만든 다음 약관을 살펴보며 회원 가입 절차를 확인했다.

‘석사과정 이상만 가입을 할 수 있구나. 일단 자격요건은 충족됐고. 가입비는 5만 원, 연회비도 5만 원. 총 10만 원을 입금하면 되겠네.’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일전에 강예진을 도와 현대문학연구학회 학술대회를 준비했던 경험이 컸다. 입회 절차는 서로 비슷했다.

민우는 우선 가입신청서를 다운받아 인쇄를 한 다음 빈칸을 하나씩 채웠다.

관심 분야 항목이 나왔다.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고민한 민우는 만년필을 움직였다.

― 비교문학, 번역(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내용을 채워 넣고 기밀서약에 체크를 한 다음 서명을 했다. 그리고 학회 사무국으로 팩스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가입비와 연회비를 납부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이제 연락만 기다리면 되겠다.’

잠시 후 메일이 도착했다. 국제비교문학회 총무간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가입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학회 관련 소식을 빠짐없이 전달하겠다는 공손한 어조의 메일이었다.

이로써 민우가 가입한 학회가 두 개로 늘었다.

현대문학연구학회와 국제비교문학회.

민우는 바로 답장 버튼을 눌러 겨울 학회 발표 자격이나 절차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

‘발표 신청이야 어떻게든 될 거고. 문제는 민 선생님이야. 떡밥을 제대로 물어야 할 텐데.’

민우는 노트북 앞에 앉아 얌전히 답장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답장이 도착했다. 민우는 다리를 꼬고 앉아 메일을 읽었다.

곧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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