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큰산번역문학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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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큰산번역문학상 (2)
2021.09.09.
“유리 씨.”
이유리가 깜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했다.
“앗, 예?”
“뭘 그렇게 놀라? 죄지은 사람처럼.”
“아, 그게요. 이렇게 따로 회의실에 불려오는 건 오랜만이라서. 좀 긴장이 되네요. 뭐 나쁜 일은 아니겠……죠?”
전형적인 사회 초년생 같은 반응이었다. 현기혁 팀장은 웃었다. 2년 차인데도 늘 신입 같은 느낌. 그만큼 매사에 열심이었다.
현기혁 팀장은 얼른 이유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달 월급날에 유리 씨한테 특별 보너스 나갈 거야. 아까 회의 때 사장님이 지시하셨어.”
“정말요?”
“오늘 정말요 라는 말 자주 듣네. 유리 씨 직접 서점에 가서 시장 반응도 살피고 인터넷 반응도 정리해서 올렸었지? 거기에 대단히 만족하신 거 같아. 사장님께서. 평소 유리 씨를 좋게 보고 계신 거지.”
“담당 편집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사양하진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현기혁 팀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왠지 자신의 젊은 시절과 꼭 닮아 있었다. 키우는 보람이 있는 친구였다.
“사소한 게 쌓이다 보면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낼 때가 있어. 유리 씨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좋은 성과를 만들어낸 거야. 이번 일,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 봐.”
현기혁 팀장의 진심 어린 조언에 이유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이죠.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겁니다!”
“그래. 기분이 어때?”
“날아갈 거 같은데요?”
현기혁 팀장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조금 전 임원 회의에서 최근 실적을 내고 있는 이유리를 주임으로 올리자는 의견이 나왔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사장 결재가 떨어지면 직급이 올라갈 것이다.
물론 직급이 올라간다고 해서 연봉이 크게 오르는 건 아니었다. 동결될 때도 많다. 출판사란 으레 그런 곳이니까.
“날아갈 거 같다라…… 우리 회사에 유리 씨 없으면 큰일 나. 날아갈 거 같다고 다른 회사로 훌쩍 가버리면 안 된다? 알았지?”
“당연하죠! 전 이미 라온북스에 뼈를 묻을 각오예요. 무엇보다도…….”
이유리는 현기혁 팀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아녜요. 그냥.”
“싱겁긴. 참, 개인적으로 하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으려나?”
“뭔데요?”
현기혁 팀장이 붉은색 카드를 꺼냈다. 겉면에 초청장이라고 써 있었다. 이유리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카드를 열어 보았다.
“이건 뭐예요?”
“박민우 씨 출판기념회 초대장이야. 지음사 본사에서 열린다고 하더군. 견학 겸 대신 다녀오도록 해. 마침 내가 그날 출장이 잡혀서 못 가게 됐거든.”
“출판기념회요?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유리 씨가 민우 씨 담당이잖아. 당연히 가도 되지. 마침 기념회 겸 강연도 열린다니까 쉰다고 생각하고 듣고 와. 기회가 되면 2권 번역 진척상황도 살짝 여쭤보고.”
사실 이유리를 출판기념회에 보내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생 출판사인 라온북스는 아직 출판기념회를 연 적이 없었다. 언젠가 열릴 그날을 위해 미리 교육을 해두려는 것이다.
현기혁 팀장은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행사 참여가 아니라 업무가 되어버리니까.
아무튼 이유리는 초대장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힘차게 대답했다.
“그럼 잘 다녀오겠습니다!”
* * *
일과를 끝낸 민우는 307호에 앉아 논문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 진섭이 잔뜩 지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박민우, 뭐해? 집에 안 가고. 오늘 수업 쫑 아냐?”
“논문 쓴다.”
진섭은 혀를 내둘렀다. 괜히 물어봤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논문? 그거 겨울에 발표할 거 아냐? 아직 멀었는데 과제랑 데이트는 언제 하려고 붙잡고 있냐.”
“어차피 이번 학기 수업도 대부분 번역 발제잖아. 과제 정도야 금방 할 수 있고. 데이트는 뭐 학교에서 매일 얼굴 보는데 따로 할 필요 있나. 가끔 놀러 나가면 그만이지.”
“너 오늘따라 되게 재수 없네.”
혀를 찬 진섭이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민우가 잠시 프린트물에서 시선을 떼고 그에게 물었다.
“예린이는?”
“몰라.”
민우는 신경을 끊고 다시 논문 개요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했던가.
루카치의 만년필을 이용해 개요를 잡았기 때문에 구성은 완벽했다. 이제 내용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됐다.
물론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우는 미리 써둔 개요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신중히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예전에 랑느 박사가 먼저 보내 준 그 논문이었다.
‘클리멍 베르나르가 쓴 통계법을 우리나라 사정에 맞게 바꿔야 해. 그러려면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검색엔진을 골라야 하는데…… 역시 네이비보다는 구굴이 낫겠지?’
민우는 구굴에 접속했다.
검색에 들어가기 전에 검색어를 정했다. ‘실존주의’, ‘실존주의 문학’, ‘실존주의 철학’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 그 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실존주의의 비교 대상으로 상정한 검색어 항목은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그리고 구성주의였다. 이 세 사상 모두 실존주의 이후 세계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민우는 다시 클리멍 베르나르의 논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논문을 보면 실존주의 관련 키워드가 우세를 보였어. 하지만 이건 프랑스의 통계야. 우리나라는 좀 다를 수 있어.’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민우는 국내 포털에서 통계자료를 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민우가 양손을 털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방법은 간단했다. 각 사상을 표현하는 어휘를 검색하여 사용 빈도수를 측정한다. 그리고 그 결괏값으로 실존주의에 대해 평가했다.
만약 실존주의에 대한 검색어 빈도가 다른 사상에 비해 많다면, 실존주의 연구의 가치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이용한 방법이다.
프랑스에서는 그러한 방법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다. 이걸 국내 사정에 맞게 바꾸려는 것이다.
그렇게 약 두 시간이 흘렀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히 모았다.’
검색어 결괏값이 기록된 도표가 정리되었다. 민우는 각 셀을 오가며 수치를 대조했다. 곧 유의미한 데이터가 완성되었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예상대로야. 국내 사정도 비슷해.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키워드 검색값이 다른 사조에 비해 월등히 많다. 해체주의도 그렇고.’
이 통계자료를 이용한다면 실존주의라는 사상이 현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쉽게 말해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민영환 교수를 설득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
민우는 즉시 논문의 서두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 실존주의는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에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수용자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위축되기는커녕 꾸준한 형세를 이어오고 있다.
이는 관념적인 추론이 아니라 통계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구굴 검색엔진을 이용해 그 기반이 되는 자료를 수집하였다. 상세 내용은 하기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까지 쓴 민우는 수치를 정리한 도표를 그대로 옮겨 붙였다.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검색 방법에 대한 해설을 달았다.
이것으로 연구의 당위성 부분이 해결되었다.
‘시작이 좋다. 이제 방법론 부분만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료가 좀 더 필요했다. 그냥 자료가 아니라 이론이 포함된 논문이어야 했다.
민우는 잠시 인터넷 창을 열어 메일함을 확인했다. 아직 랑느 박사에게 온 메일은 없었다. 민우는 마우스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고민했다.
‘박사님의 메일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고…… 내가 직접 뒤져봐야 하나?’
이미 민우는 캠벨의 이론을 찾은 경험이 있었다. 안경의 힘을 빌린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민우가 랑느 박사에게 기대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연구물에 대한 안목.
그는 오랜 세월을 연구에 투자한 학자였다. 아무리 안경이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 준다고 하더라도, 그의 통찰력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내일까지 기다려보자. 그래도 답이 없다면 스스로 찾아보는 수밖에.’
그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민우는 논문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껐다. 번역 프로젝트 미팅에 참가할 시간이었다.
가방을 메고 307호에서 나서려던 찰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액정을 확인하니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었다. 민우는 5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며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예, 팀장님, 안녕하세요.”
― 바쁘십니까?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면 바쁘더라도 들어야죠. 말씀하세요.”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민우는 잠시 복도에 멈춰 섰다. 좋은 소식이라면 무엇일까. 그는 현기혁 팀장의 말을 기다렸다.
― 오늘 <사각 살인> 천 부 증쇄 들어가기로 결정됐습니다. 판매 추이가 아주 좋습니다. 독자 반응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고요.
“안 그래도 오늘 한성문고 사이트에서 순위 확인했는데 꽤 올라갔더라고요. 역시 좋은 작품을 발굴하신 팀장님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 무슨 말씀을요. 번역을 깔끔하게 잘해주신 민우 씨 덕이죠. 인터넷 리뷰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다들 번역에 대한 칭찬을 하더군요.
“폐를 끼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민우가 겸손하게 한마디 했다.
몇 마디 인사치레가 오가고 현기혁 팀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 본론을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 계약상 증쇄를 해도 저희가 민우 씨에게 따로 번역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뭐,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데뷔작이기도 하니까요. 번역 업계 관행이 대개 매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죄송한 마음에 저희가 선물을 준비했는데, 내일 댁으로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선물을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온북스에 대한 이미지가 더 좋아졌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가도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선물까지 챙겨줄 줄이야.
― 한우 세트니까 보양식 삼아서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럼…….”
― 아, 잠시만요.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 더?
슬슬 이경훈 교수 연구실로 걸어가려던 민우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왠지 이쪽이 더 진짜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산문화재단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물론이죠.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곳이니까요.”
― 보통은 문학상을 개최하는 곳입니다만, 매년 번역상도 시상하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큰산번역문학상’입니다.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영한번역 부문에 <사각 살인>을 추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군요.”
사실 민우는 국내의 번역상에 큰 관심이 없었다. 태생이 국문과였으니까. 최근 이슈가 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큰산번역문학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전년도에 출간된 해외 번역서를 대상으로 시상을 하는데요. <사각 살인>이 올해 출간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내년 1월에 큰산번역문학상에 추천을 해서 심사에 들어가게 하려고 합니다.
“내년 1월이면 시일이 좀 필요한 거군요.”
지금은 9월. 내년 1월이 되려면 아직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민우에게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4개월 동안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했으니까.
<더 위자드> 번역은 물론 겨울 학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써야 해야 한다. 수업도 들어야 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랑느 박사와 만찬도 즐겨야 했다.
현기혁 팀장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 시일도 필요하지만 운과 실력도 많이 필요합니다. 상금이 2천만 원이나 되는 만큼 경쟁이 치열하거든요.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있어서 조금 유리하긴 합니다만.
세상에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대회는 없다. 민우는 가벼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짜인 제가 이렇게 추천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 전에 술자리에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유명한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미력하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민우도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참, 그리고 내일 출판기념회엔 저 대신 이유리 씨가 참가할 겁니다. 제가 급하게 출장이 잡혀서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 좀 정리되면 일산에 한번 가겠습니다. 맥주 한잔하셔야죠. 이번엔 제가 사겠습니다.”
― 좋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졌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큰산번역문학상이라. 과연 내가 받을 수 있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민우는 잡념을 떨치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경훈 교수 연구실을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