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4. 큰산번역문학상 (1) (94/500)


094. 큰산번역문학상 (1)
2021.09.06.


수빈이 아버지와의 문제는 말 그대로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며칠 뒤, 민우는 이문구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다.

― 내가 지나치게 말한 부분은 사과하네. 수빈이와 잘 지내주게.

문자를 받았지만, 민우는 애초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으니까.

아무튼 두 사람은 평소처럼 달달한 일상을 보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바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모든 것이 평소대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예전에는 단순히 좋아한다, 보고 싶다 정도를 떠올렸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함께 있지 않으면 외롭고 허전해졌다.

― 그 이상의 열정으로 수빈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대면했던 그 날, 민우가 했던 말을 매번 떠올리게 된 이수빈. 그 말을 곱씹을수록 마음이 설레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한마디가 수빈에게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뜬금없이 민우가 보고 싶어졌다. 과제를 해야 했지만 수빈은 읽던 논문을 한쪽으로 치우고 민우에게 톡을 보냈다.

― 오빠 어디야?

울오빠♡: 지금 도서관 열람실. <더 위자드> 2권 초벌하고 있어

― 오래 걸려?

울오빠♡: 아니. 10분 내로 끝날 거 같아.

―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307호에 있던 이수빈은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307호로 들어오던 주예린이 이수빈을 불러 세웠다.

“이수빈. 어디 가?”

“도서관에. 오빠 좀 만나러.”

“회복이 빠르군! 아까 봤는데 또 보다니. 역시 젊음이란 좋구먼! 허허허.”

주예린이 사극 톤으로 흉내를 냈다. 두 친구는 손을 흔들며 각자의 길을 갔다.

이수빈이 도서관으로 오고 있을 무렵, 민우는 <더 위자드> 2권 원고의 번역을 끝냈다. 초벌이지만 퀄리티가 괜찮았다.

민우는 일단 원고를 보기 좋게 조판 양식으로 정리했다. 라온북스에서 보내 준 파일 위에 붙여넣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초벌은 대강 이 정도면 되겠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검토를 해야 하는데. 언제가 좋을까…….’

민우는 플래너를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논문계획서.’

민우는 만년필 촉으로 그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다음 주에 민 선생님께 보여드릴 논문계획서가 문제네. 번역하고 병행하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우선순위를 정해야 해.’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에 더 여유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겨울 학회 발표는 석사 2학기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번역도 중요하지만, 번역은 길게 봐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답이 쉽게 나왔다.

‘번역 마감을 일주일 미루자. 그 정도 시간은 어차피 충분하니까. 계약상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고.’

문제를 해결한 민우는 기지개를 쭉 켰다. 뻐근했던 어깨가 풀리며 시원해졌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내일이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우가 장난스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수빈의 모습이 거꾸로 보였다. 거꾸로 보여도 그녀는 예뻤다.

“맞아. 내일이지.”

민우가 바로 앉아 몸을 돌렸다. 이수빈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기분은?”

“살짝 떨려. 그런 행사는 처음이니까. 아 참. 너한테 초대장 안 줬구나. 형식적이긴 하지만 기념으로 하나 줄게.”

민우는 가방에서 붉은 카드 하나를 꺼내 이수빈에게 건넸다.

겉면에 지음사 로고가 박혀 있었고, 그 옆으로 ‘출판기념회 초대장’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수빈은 카드를 열어보았다.

― 인간과 신화와의 관계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이한 명저 <신화와 인간 :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의 출판기념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저자: 최민식, 박민우

일시: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오후 6시

장소: 지음사 본사 3층 세미나실

카드 내용을 살펴본 이수빈이 생긋 웃었다. 기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자신도 어서 단행본을 내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이수빈이 말했다.

“지음사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나 보네요. 요즘은 출판기념회 같은 거 잘 안 한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출판기획실에 지분 좀 많이 가지고 있잖아.”

“지분이요?”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말이야. 수상한 덕분에 오픈 라이브러리가 살아났으니 송 실장님이 힘 좀 써주신 거지.”

수빈은 민우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했다. 지음사 출판기획실은 오픈 라이브러리 사업권을 최종 확보했다. 이제 본격적인 개발만이 남았다.

민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게다가 학계에서도 좀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캠벨의 이론이 정식으로 들어오는 거라서 그런지 민식이 형 쪽으로 메일이 몇 통 온 모양이야.”

“정말? 잘됐네. 그런데 오빠한텐 안 와?”

“난 아직 짬이 안 되잖아. 박사와 비박사의 차이랄까. 아무튼 한 달 죽어라 밤을 새운 보람을 이제야 느끼네.”

민우는 민식에게 새로운 이론을 찾아주기 위해 해외 서가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사자성어였다.

그때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민우가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니 도서관 열람실에서 너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잠깐 내려갈까?”

“응.”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민우는 짐을 정리하고 도서관 지하 휴게실로 내려왔다.

이수빈이 물었다.

“근데 오빠. <사각 살인> 이거 순위 많이 올랐더라? 포털 검색어에도 가끔 올라가곤 하더라고. 봤어?”

“아니? 못 봤는데.”

최근에 <더 위자드>에 신경을 쓰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민우는 말이 나온 김에 핸드폰으로 한성문고에 접속해 <사각 살인>의 순위를 확인했다.

민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7위까지 올라갔어?”

“7위에요? 어제 확인했을 때만 해도 9위였는데.”

종합순위가 아니라 국외소설 부문이긴 해도 굉장히 높은 순위였다. 한성문고라는 브랜드 파워를 생각해본다면 무척 잘 팔린다는 얘기였다.

민우가 턱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하면 증쇄하겠는데?”

“그러게. 그런데 증쇄해도 오빠한테 떨어지는 몫은 없지?”

“그렇지.”

“아쉽다.”

사실 민우는 크게 아쉽진 않았다. 첫 번역이었고, 조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첫 계약이라 매절로 하는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도 <더 위자드>는 인세 계약을 했으니 잘 팔리면 더 받을 거야.”

“왠지 오빠는 교수 안 하고 번역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교수직은 먹고 사는 문제와는 좀 달랐다. 민우가 거쳐야 하는 분명한 목표점이었다.

이수빈이 이어 물었다.

“그런데 출판기념회엔 누구누구 와요?”

“글쎄. 그날 가 봐야 알겠지만 일단 서지훈 선생님 오실 거고, 라온북스 현기혁 팀장님도 오실 거고. 그리고 어머니랑 누나도 오실 거고. 참. 강일이도 온대더라. 재환이 형이랑 예진누나도 온다고 했고. 정은아 대리님하고 장철호 주임도 온댔어. 뭐 이분들이야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면 되니까.”

“엄청 많이 오네. 민식 오빠네 사람들까지 하면 거진 100명은 오겠는데요?”

“아마도 그렇겠지.”

“근데 오빠네 어머니 오시면…… 처음 인사드리는 거네요.”

왠지 긴장됐다. 그래서 그런지 수빈의 양쪽 볼이 붉어졌다. 그 인사라는 표현이 사전적인 의미의 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우는 수빈의 등을 토닥였다.

“그냥 마음 편히 인사드리면 돼. 우리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처럼 까다롭지 않으시니까.”

“미안해요.”

“아니, 하하하. 사과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농담이었어.”

그때 민우는 놓쳤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연주도 온다고 했다.”

“그래요?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 그간 연락을 잘 못 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잘 지내는 거 같더라고. 이제 제법 이사님 티가 나. 정장도 잘 어울리고.”

그렇게 말하며 민우는 수빈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의 걱정이나 질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확신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이수빈이 물었다.

“그런데 연주도 프로젝트 하기로 했어요?”

“응. 프로젝트비 받아봐야 그 녀석 통장 잔고에는 티도 안 나겠지만, 어쨌든 하기로 했어.”

“하긴, 것도 그렇겠네. 부럽다.”

두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뭔가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린 민우가 수빈에게 제안했다.

“아까 내가 준 초대장 있지? 오늘 집에 가서 너희 아버지께 한번 드려 봐. 꼭 오시라고 말씀드리면서.”

“그래도 돼?”

“아직도 날 못 미더워하시니 이번 기회에 쐐기를 박아야지. 그리고 궁금해졌어. 초대장을 받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그것은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민우의 말대로 저녁에 아버지에게 초청장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는 아직도 우리 아버지한테 잘 보이고 싶어?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사실 정이 떨어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민우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까. 헤어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것을 일종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강해질 수 있는. 거기에 수빈의 마음까지 얻었으니 일석이조였다.

“더 잘 보여야지. 교제는 허락하셨지만 결혼은 허락하지 않으셨다면서. 그럼 점수를 계속 더 따 놔야지.”

수빈이 살짝 놀랐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랑 결혼하려고?”

“일단은?”

수빈의 가슴이 격동했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민우의 미래에 자신의 모습이 있다는 게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태연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참 멋대가리 없는 프로포즈네. 일단은 거절.”

“그럼 어쩔 수 없고.”

민우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수빈이 민우의 팔꿈치를 살짝 꼬집었다.

* * *

현기혁 팀장이 장시간의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왔다. 하지만 힘든 모습은 조금도 없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잠시 다들 주목.”

박수 소리에 편집팀원들이 일시에 손을 멈추고 의자를 돌렸다. 그래 봐야 팀장을 포함해서 네 명뿐이지만.

곧 현기혁 팀장이 좋은 소식을 전했다.

“<사각 살인>의 증쇄가 결정됐습니다. 시장 반응이 생각보다 좋아서 잘 팔리고 있다고 하네요.”

“정말요?”

“정말이고말고요. 내일 바로 천 부 증쇄 들어갈 겁니다.”

그중 가장 기뻐한 것은 이유리였다. <사각 살인>의 담당자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표지 디자인까지 총괄했으니 보람은 그 두 배였다.

무엇보다도 출판시장이 전반적으로 안 좋은 상황이다. 이 시기에 증쇄가 결정됐다는 건 정말 고무적인 일이었다.

“아무튼 이 기세로 <더 위자드>도 증쇄를 노려보도록 합시다. 다들 맡은바 열심히, 알지요?”

“네!”

다시 업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기혁 팀장은 이유리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그녀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현기혁 팀장은 이유리가 앉은 의자를 툭툭 건드렸다.

“유리 씨 입사 이후 처음이지? 담당하는 작품이 증쇄 결정된 거.”

“네! 처음이에요.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일인지 몰랐어요.”

“한때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날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어. 뭐, 나한테 한 푼이라도 더 떨어지는 건 아니긴 했지만.”

그때 장연아 주임이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팀장님. 사장님께 보너스 지급 요청해보시는 건 어때요? 유리 씨 <사각 살인> 때문에 이것저것 정말 고생 많이 했는데.”

“아, 아녜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장연아는 이유리와 친했다. 그리고 이타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영훈 대리는 아니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뭔 보너스입니까. 그냥 다 같이 회식 한번 하면 되는 걸 가지고. 개인의 공과보다 팀의 공과로 보는 게 더 타당하죠.”

장연아 주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별로, 아니 많이 좋지 않았다.

“외서 단행본 증쇄 거의 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이대로 넘어가면 직원들 사기에 문제가 있을걸요?”

“그럼 다들 공평하게 받아야지. 본인 혼자 고생했나?”

장연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여간 저 인간하고는 말이 안 통해, 라는 표정이었다.

현기혁 팀장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그만들 하고. 우 대리 말대로 조촐하지만 다음 주에 회식 한번 합시다. 간단하게 치맥으로. 오케이?”

“좋아요!”

“좋슴다.”

분위기가 정리되자 현기혁 팀장은 이유리를 따로 회의실로 불렀다. 그녀는 작은 메모장과 펜을 들고 다소곳이 앉았다.

조금 긴장이 됐다.

현기혁 팀장이 이렇게 따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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