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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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3)
2021.09.03.
“아버지!”
이수빈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문구는 민우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의 의도는 그의 치부를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수빈은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한편으로 민우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수빈이 넌 가만히 있어라.”
“그래도요. 초면에 가정사를 묻는 건 실례잖아요. 다른 할 말도 많을 텐데.”
그때 민우도 나섰다.
“난 괜찮아. 아버지 말씀대로 해.”
“오빠.”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수빈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민우는 이문구의 질문을 곱씹었다.
‘부모님이 뭐하시냐고? 진짜 상투적인 질문이네.’
언젠가 수빈의 부모님을 만난다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그래서 민우는 속으로 웃었다.
한편으로는 오기도 들었다.
‘우리 부모님 체면도 있으니 이렇게 된 이상 한번 부딪쳐 볼까?’
확률은 반반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우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장사를 하시며 생계를 이어 오셨는데요. 지금도 시장에서 야채와 과일을 팔고 계십니다.”
“시장에서 장사를?”
“예, 2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하시면서 저와 누나를 키우셨죠.”
민우의 대답엔 조금의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질문을 던진 이문구의 표정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민우의 집안이 보잘것없다는 것은 건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당당하다니?
보통은 위축되거나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눈앞의 청년은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냐.’
그렇게 이문구가 수를 읽는 사이 민우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제가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니, 꽤 당돌한 거 같아서 말이네.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지. 적당히 둘러댈 줄 알았는데.”
“직업에 귀천은 없으니까요.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물건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민우는, 예전에 인사동에서 랑느 박사와 나눈 이야기의 일부를 떠올렸다.
“예전에 피에르 랑느라는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이렇게 말했죠. 학문을 하는 것과 노동자가 벽돌을 나르는 일은 같다고.”
목이 조금 탔다. 민우는 하경아가 준비해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사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뭔지 알겠더군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은 그럴듯하게 하기 쉽지. 하지만 사회의 인식이라는 게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건 자네도 잘 알 텐데?”
“잘 알고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겐가?”
처음에는 화가 났다. 눈앞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청년이 소중한 딸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조금씩 호기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민우가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장사를 하시면서 저와 누나를 훌륭하게 키우셨습니다. 생전의 아버지도 그러셨고요. 그래서 저는 누구보다도 부모님을 존경합니다.”
잠시 말을 끊은 민우는 하경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희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시든 전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노력과 헌신 덕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런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간단한 논리죠.”
거실이 조용해졌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하경아였다. 그녀는 민우의 말에 공감했다.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문구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대강 큰소리를 쳐서 내쫓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민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찬 모습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문구는 대학 강단에서 잔뼈가 굵었다. 수많은 토론과 발표를 경험했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의 정론에 말문이 막힐 줄이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적당히 기죽여서 보내려고 했건만.’
작게 한숨을 내쉰 이문구가 질문을 바꾸었다. 아니, 본론으로 들어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자네를 왜 싫어하는지 알고는 있지?”
“제가 상아대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잘 알고 있군. 명인대에는 학력 세탁을 위해 들어간 건가? 요즘 유행이라고 들었네만.”
불편한 질문이었지만 민우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원래는 상아대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했습니다만, 모교 지도교수님께서 명인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좁은 우물에서 나가 더 큰 세상을 경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원은 왜 진학하게 된 거지? 상아대에 입학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공부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을 텐데. 도피성 진학이었나?”
“아버지!”
이수빈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이 정점을 찍었다. 이건 민우라는 한 개인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그만 하세요. 네? 대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왜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몰아세우시는 거예요? 우리 오빠가 뭘 잘못했다고요!”
하지만 오히려 수빈을 말린 것은 이문구가 아니라 민우였다.
“수빈아. 지금 아버님하고 얘기 중이잖아. 진정하고 앉아 있어.”
“오빠!”
“괜찮으니까.”
민우는 예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공모전 본선 무대에 오를 때의 그 모습. 이수빈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민우가 답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소설의 이론>이라는 루카치의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고,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세계적인 학자? 허허허허!”
그 말에 이문구가 큰소리로 웃었다. 엄청난 말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풍처럼 들렸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나? 학부가 상아대라면 우리나라에서 교수 자리 하나 얻기 힘들어 보이는데?”
“힘든 것과 불가능한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힘들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정중함은 잃지 않았다. 그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최대한 정중히 자신을 알려야 했다.
“공저이긴 하지만 곧 인문서를 출간합니다.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이번 달에 번역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번역 일은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국문학 전공자가 번역을?”
“우리 문학을 세계로 알리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수입니다. 하지만 국내의 번역 사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죠. 일단 저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노린다고? 자네가?”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꿈꾸지 않으면 기회도 오지 않는 법이죠.”
이문구는 침음을 흘렸다. 그는 민우가 6개 국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이문구는 더 이상 민우를 추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온 대화를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다.’
짧게 심호흡을 한 민우가 나섰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지금 제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잠자코 있던 하경아가 경칭을 쓰며 관심을 보였다. 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과거에는 공부를 소홀히 했지만, 지금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민우가 이번엔 이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을 꼭 쥐며 이렇게 말했다.
“그 이상의 열정으로 수빈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만큼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나, 역시 국문학도답게 로맨틱하네.”
하경아는 민우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문구도 더 할 말이 없어 보였다.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기는 잘 들었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게.”
“밤늦게 실례 많았습니다.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우가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수빈도 따라 나왔다. 그녀는 완전 울상이었다.
“오빠. 괜찮아?”
“응? 뭐가?”
“아니, 그게…… 울 아버지가 너무 심하게 하신 건 아닌가 싶어서. 도가 지나쳤잖아. 너무 조마조마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어.”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들어간 거야.”
민우는 수빈의 머리를 한번 헝클었다. 두 가지의 만족감을 느꼈다.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과 만년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해냈다는 것을.
멀뚱히 민우를 바라보던 이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민우의 품에 안겼다.
“오빠 완전 말 잘하더라. 아버지한테 일방적으로 혼날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건방져 보이진 않았지?”
“아니야. 오히려 잘했어. 아버지도 느끼는 바가 있으셨을 거야.”
“잘 풀렸으면 좋겠다.”
“나도.”
그때 아파트 현관에서 하경아가 수빈을 불렀다. 늦었으니 어서 들어오란다. 민우는 현관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아파트를 나섰다.
민우는 버스를 타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왠지 걷기에 좋은 밤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운동을 하고 나갈 준비를 하려던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이수빈이 현관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왜요?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나?”
그녀가 두리번거리자 민우는 싱겁게 웃었다.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렸다. 어느새 이수빈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사랑스러운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오빠.”
“응?”
“좋은 소식 하나랑 나쁜 소식 하나가 있는데 어떤 거부터 들을래요?”
민우는 잠시 고민했다.
“좋은 소식.”
“아버지가 교제 허락해 주셨어요.”
“생각보다 빨리 허락해 주셨네. 한 번 더 찾아뵈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민우가 덤덤한 어조로 대꾸하자 이수빈의 표정이 뚱해졌다.
“왜 그렇게 감흥이 없어요?”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 그러면 그렇지. 울 오빠 자신감이 어디 가겠어?”
그렇게 말한 이수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그래서, 나쁜 소식은 뭔데?”
“아, 그게…… 사귀는 건 좋지만 결혼은 절대 안 된대요.”
민우가 손을 멈칫했다.
“그건 좀 심각한데.”
“그쵸?”
“으음, 어쩐다.”
민우는 수건을 집어 던지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수빈은 바닥에 널린 수건과 옷가지를 정리해 주었다.
한층 더 말끔해진 민우가 수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어루만졌다.
“그럼 일단 사고를 쳐볼까? 미리 혼수 하나 장만한다고 생각하고.”
“그건 안 돼.”
“맨날 안 된대.”
그러면서도 수빈은 저항하지 않았다. 민우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이수빈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긴 머리카락이 시트에 흩날리며 농염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따르르릉!
은밀히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전화벨 소리에 뚝 끊겼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책상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입니다.
“아, 기자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 덕분에 인터뷰도 잘 마무리했고, 기사도 잘 뽑혔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이제 슬슬 기사가 나올 거라고 생각을 했다. 아마 기사 송출 건으로 연락을 한 것이리라.
― 다름이 아니라 오늘 인터뷰 기사 올라갔거든요. 조간신문에 실렸고, 조금 전 네이비, 다울 등 포털 사이트에도 기사가 올라갔어요. 메일로 링크 보내드렸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셨네요.”
― 그리고 사례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선물이요?”
― 오늘 자 경한신문 19페이지를 보시면 아실 거예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간신문 19페이지에 대해 뭐가 실렸다는 걸까.
민우는 일단 메일을 열어 인터뷰 기사를 확인했다. 중간에 사진이 들어가 있는 평범한 인터뷰 기사였다. 기사 마지막에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여신의 탄생’ 정도였다.
예상했던 대로 인문학이 아니라 수빈의 외모가 이슈가 되었다. 가끔 화장발이라는 악플이 달리긴 했지만, 수빈은 개의치 않고 즐거워했다.
민우가 물었다.
“그렇게나 좋아?”
“뭐 예상은 했지만 막상 댓글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헤헤.”
그 사이 민우는 경한신문 인터넷판을 찾아 19페이지를 열람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민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 라온북스 신간 <사각살인>, 정통 추리소설의 계보를 잇는 명작. 탄탄한 내용과 치밀한 번역이 돋보여…….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이었다. 경한신문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수백, 아니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홍보였다.
“오빠.”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빈이 침대 위에 누운 채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