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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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2)
2021.09.02.
배불리 고기를 먹고 나온 두 사람. 연주는 살짝 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약속대로 2인분을 먹었다.
고기를 부지런히 집어 먹는 모습을 보며 민우는 조금 걱정을 하긴 했다. 갑자기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건 당연하니까.
“소화 안 돼?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닌가.”
“아뇨. 배가 좀 나온 거 같아서 신경 쓰여요.”
“하하하. 많이 먹으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좀 걸으면 들어갈 거야.”
두 사람은 회사 쪽으로 걸었다. 수행비서가 회사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는 그곳에서 차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때 머뭇거리던 연주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오빠.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하실래요?”
“커피?”
평소라면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나의 잔소리가 민우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이제는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보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었다.
“잠깐 어디 들러야 해서. 다음에 마시자.”
“아, 그래요.”
연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실망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 민우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
곧 선우기획 건물이 보였다.
연주가 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민우는 즉시 이경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금 연주 만나고 나오는 길인데요. 연주도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 오, 그래? 집안 사정도 있고 해서 별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너 나름 수완이 좋구나. 마침 잘됐어. 이쪽에서도 한 명 구했으니 바로 프로젝트 시작할 수 있을 거 같다.
“선생님까지 포함해서 총 네 명으로 가는 거군요. 나머지 한 명은 어떤 분입니까?”
― 우리 과 박사과정 중에서 한 명 낚았지.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알겠습니다. 일단 내일 선생님 연구실로 가겠습니다.
― 그래.
전화가 끊겼다. 바로 이어 진동이 한번 울렸다. 수빈에게서 온 톡이었다. 민우가 화면을 터치해 내용을 확인했다.
애기♡: 미안요. 한숨 자고 있어서 톡 이제야 봤네. 아무래도 오늘은 나가기 힘들 거 같아…….
그게 다였다.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오전에 통화했을 때 오늘은 좀 쉬고 싶다고 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민우는 답장을 적었다.
― 알았어. 그럼 푹 쉬어.
그렇게 적고 발송 버튼을 누르려던 민우는 우뚝 멈췄다. 왠지 이렇게 끝을 내면 안 된다는 직감이 발동한 것이다.
누나가 한 말이 떠올랐다.
‘확신을 주면 돼. 어떤 일이 생겨도 변하지 않을 확신.’
민우는 버스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타야 할 버스가 하나둘 지나쳐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론을 내린 민우는 톡으로 보내려던 내용을 싹 지웠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 지금 집 앞으로 갈게. 잠깐이면 되니까 나와. 아파트 놀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다.
민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몇 번 진동이 오긴 했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러 안개꽃 다발을 주문했다. 예전에 안개꽃을 좋아한다는 수빈의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한참을 걸어 수빈이가 사는 고급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놀이터에는 민우 혼자뿐이었다. 간혹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꽃다발을 들고 그네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수빈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무리수였나.’
민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쥐었다. 기다리지 말라고, 오늘은 나가지 않겠다는 식의 답장이 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확인하진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때 민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보고 싶던 사람의 모습이 저 멀리 나타난 것이다. 조금 초췌해 보였지만,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걸어오는 것은 분명 수빈이었다.
곧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민우가 그네에서 일어났다.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나왔네.”
“안 그러면 밤새 기다릴 거 같아서요. 답장도 안 보는 것 같고. 오늘 쉰다고 얘기했는데 대뜸 온다고 하면 어떡해요?”
“보고 싶어서.”
여자의 준비 시간에 대해 일장 연설을 준비하고 있던 수빈이 미소를 지었다. 잔소리가 쑥 들어갈 정도로 기분 좋은 말이었다.
이수빈은 민우가 건넨 꽃다발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어머, 웬 꽃다발이에요? 안개꽃이네. 나 안개꽃 진짜 좋아하는데. 너무 예쁘다.”
꽃에 얼굴을 파묻었다. 은은한 풀 냄새가 났다. 기분이 좋아졌다.
“앉아.”
수빈은 민우와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잠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민우는 그네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수빈은 안개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람 불러냈으면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그게. 생각을 좀 정리하고 오려고 했는데 아직 정리가 안 끝났어.”
“무슨 생각?”
민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해도 되나 하는 고민이 끝까지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민우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랑 사귀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마음고생 할 일 없었겠지?”
“오빠랑 사귀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행복하지도 않았겠죠.”
뚱한 표정을 짓는 수빈을 보니 미안해졌다. 화를 내고 투정을 부려도 되는데 끝까지 그녀는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
“박민우 씨. 고작 그 이야기 하러 온 거예요? 그럼 실망인데.”
“아니. 아까 누나를 잠깐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내 주변 사람들 때문에 네가 걱정을 많이 할 거라고.”
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꽃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민우를 바라보았다.
“주변 사람들 문제는 또 뭐예요?”
“내 주변에 쓸데없이 여자가 많대. 네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아.”
수빈이 포근하게 웃으며 꽃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언니가 거기까지 신경을 써줄 줄은 몰랐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때가 가끔은 있어. 오빠가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면 이유 없이 불안할 때가.”
예전에 민우가 주예린과 따로 이야기하러 나갈 때가 떠올랐다.
그때 민우가 톡으로 상황을 설명해 줘서 넘어가긴 했지만, 언젠가는 이 문제에 대해 민우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가 좀 그랬다. 그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연주 일로 예민하게 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그렇게 말하며 그네에서 일어섰다.
몇 발자국 걸으며 발꿈치로 바닥을 쿡쿡 찍었다. 예전에는 모래였는데, 지금은 고무 매트로 되어 있어 느낌이 달랐다. 그게 좀 아쉬웠다.
수빈이 말했다.
“오빠가 한눈을 파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 예진 언니는 일 때문에 가까이 지내는 거고, 연주는 프로젝트 때문에 만나는 거고, 예린이는 직속 후배니까 잘 챙겨주려는 거겠지.”
민우도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놀이터를 빠져나와 아파트 단지 안을 걷기 시작했다. 사이좋게 손을 잡으며.
수빈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말이죠. 솔직하게 말하면……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는데, 가끔은 마음이 이상해질 때가 있어요.”
“질투?”
“비슷해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서.”
민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나가 한 말에 힌트가 있었다.
“확신이 없어서 그렇지?”
정답이었다.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도 해요. 오빠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의심을 하게 되고. 고민을 하게 되고…… 그런 게 반복되다 보니 좀 힘들어지고. 우울하고.”
수빈은 늘 상냥했다. 모든 걸 포용해 줄 것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민우는 방금의 대화로 그것을 확신했다.
잠시 멈춰선 민우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미안해. 내가 좀 더 네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는데. 내가 많이 부족했어. 내 생각만 한 거 같아.”
“아뇨.”
수빈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오빠 문제가 아니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내 좁은 속이 문제인 거지.”
“수빈아.”
“심심해서 연주 만나러 간 거 아니잖아. 예린이한테 사심이 있어서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예진 선배랑 어떻게 해 보려고 도와주는 것도 아니잖아.”
어느새 수빈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민우는 그녀의 앞에 서서 팔을 벌렸다. 꼭 안아주었다. 말없이 그렇게 한참이 흘렀다. 왼쪽 어깨가 젖어 따뜻해졌다.
“미안해요. 요즘 좀 감성적으로 되네. 아,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약속 하나 할까?”
“어떤 약속이요?”
“앞으로는 서로 눈치 보지 말고 속마음 얘기하기.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기. 싫으면 싫다고 얘기하기.”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포옹을 풀었고, 민우는 소매로 남은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수빈.”
굵고, 나이 든 목소리였다.
이수빈은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렸다. 민우도 그쪽을 주목했다. 차콜색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엄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는 대번에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수빈이 아버지?’
얼굴 모양새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수빈이가 아파트 단지에서 보고 놀랄 사람은 그밖에 없다.
“아버지.”
이수빈이 본능적으로 잡은 손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민우는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손을 잡아 보였다.
“자네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수빈이 남자친구 박민우라고 합니다.”
이수빈의 아버지 이문구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표정을 풀고 정중하게 나섰다. 대학교수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래. 그런데 내 딸이 왜 울고 있는지 설명을 좀 해 줄 수 있겠나?”
“뜻하지 않게 제가 수빈이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하고, 달래주고 있었습니다.”
“힘들게 했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저희 둘의 교제를 반대하신다고요. 그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이문구는 좀 놀랐다.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막연히 추측하고 있던 딸 애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만약 만나게 된다고 해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민우의 당당한 태도를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문구가 말했다.
“그럼 힘들게 하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간단한 문제인데 어렵게 생각하는군.”
“헤어지는 게 모범답안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오빠.”
이수빈이 말렸다. 하지만 민우는 물러서지 않고 이문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문구는 대학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상대해왔다. 한 가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요즘 청년들에게서 보기 드문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잠깐 들어오겠나? 차나 한잔하고 가지.”
“감사합니다.”
이문구가 앞장을 섰다. 수빈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보였지만, 민우는 등을 다독여 주었다.
수빈의 집은 17층이었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민우는 가방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화술이 필요해 도움을 받을까 했다.
그렇게 품속에 넣으려고 했는데, 그만두었다.
‘이번 일만큼은 내 힘으로 해결해 보고 싶어.’
민우는 다시 만년필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때 이문구가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자네 나이는?”
“올해로 스물여덟입니다.”
“수빈이 네가 스물넷이었지?”
“네.”
좋은 분위기였다면 궁합도 안 볼 나이라는 농담을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냉장고같이 썰렁했다.
17층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아한 모습의 중년 여성이 거실로 나왔다.
이수빈의 어머니 하경아였다. 수빈의 외모는 그녀에게 물려받은 것 같았다. 젊었을 적 굉장히 아름다웠을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응? 이분은 누구?”
하경아가 묻자 수빈이 남자친구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남편을 흘끔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곧 뜨거운 차 네 잔이 거실에 놓였다.
민우는 수빈이와 같이 앉았고, 맞은편에 이문구와 하경아가 함께 앉았다.
“자네 부모님은 뭘 하시나?”
이문구의 첫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