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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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1)
2021.08.30.
“안녕하세요? 이사님 뵈러 왔습니다. 자리에 계신가요?”
“예. 말씀 전달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집무실로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곧 여직원이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서류에 결재하는 연주의 모습이 보였다.
예전엔 그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이었는데, 지금은 나름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이가 어린 임원이라는 것을 빼고도 말이다.
‘일하는 모습도 이제 잘 어울리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적응한 탓인가?’
연주가 펜을 멈추고 생긋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민우를 반갑게 맞았다.
“오셨어요?”
“방해한 건 아니지? 한창 일하는 중인 거 같은데.”
“급한 일은 아니라서 괜찮아요. 어서 앉으세요.”
연주는 인터폰을 눌러 시원한 음료를 준비시켰다. 그 모습이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제는 정말 한 회사의 임원 같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민우가 툭 던졌다.
“너 좀 변한 거 같다.”
“제가요?”
“진짜 직장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야. 이제는 정장도 잘 어울리고. 처음엔 안 맞는 옷 입은 사람처럼 이상했었거든.”
그때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가리며 부끄럽게 웃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잖아요. 이게 다 오빠 덕이에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응원 많이 해주셨잖아요. 제 얘기도 들어 주시고. 그래서 이렇게 버틸 수 있었어요. 아직 좀 힘들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좋아지겠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민우는 대견스러운 눈으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근데, 조금 야윈 것 같았다. 안색도 초췌한 게 나빠 보였다. 안 그래도 날씬한 체형인데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
“너 살 좀 빠진 거 같다? 꽤 많이.”
“요즘 식사를 잘 못 해서요. 더워서 그런지 입맛이 없어요.”
“그래도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안 그러면 나처럼 쓰러진다.”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말이라면 뭐든 곧잘 듣는 그녀였다. 억지로라도 먹어서 살을 좀 찌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럼…… 삼겹살 2인분 먹을게요.”
“하하하. 괜찮겠어?”
연주는 비장한 각오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소주를 마시고 주정을 부리던 그때의 모습이 떠올라 민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때 너 취해서 주정 부린 거 생각나서.”
“그, 그건요…….”
연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대로 기억도 안 나지만,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심호흡한 연주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오빠. 줄 게 있다고 하셨는데…… 뭐예요?”
“별건 아니고, 책이야.”
민우는 가방에서 책을 두 권 꺼냈다. 하나는 <사각 살인>이고, 나머지는 랑느 박사의 신간 <근대문학의 이론>이었다.
“이건 내가 이번에 번역한 추리소설이야. 얘긴 들었지? 첫 번역 작품인 만큼 친한 사람들한테만 선물로 주고 있어. 그리고 이건 랑느 박사님 신간이고.”
“우와, 고마워요 정말. 안 그래도 사서 보려고 했었는데…….”
연주는 랑느 박사의 신간보다 <사각 살인>에 관심을 두었다. 표지에 적힌 민우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책날개를 열어 프로필을 읽었다.
민우는 내심 긴장을 했다. 연주도 약력을 보고 비웃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프로필 이상하지 않아? 수빈이랑 우리 누나는 보고 엄청 비웃었는데.”
“오히려 심플하고 좋은데요? 왠지 차분하고 상냥한 오빠 성격과 잘 어울리는 워딩인 것 같아요. 약간 신비스럽기도 하고.”
“바로 그거지. 잘 짚었어.”
민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연주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그런데 <사각 살인>을 뒤적이던 연주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추리소설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는데 한번 시도해 봐야겠어요.”
“싫어해?”
“그게…… 현실 배경에서 사람 죽는 거 보는 게 좀 힘들어서요. 추리 소설에는 늘 사람이 죽으니까. 하지만 이건 꼭 읽어볼게요. 오빠가 번역한 거니까.”
민우는 좀 이해가 안 갔지만, 연주라고 생각하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의 순수한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민우가 물었다.
“혹시 판타지 소설도 좋아하나?”
“판타지요? 으음, <황좌의 게임>이랑 <반지의 대왕> 정도는 읽어 봤어요.”
“내가 얼마 전에 새로 받은 번역 일이 하나 있거든. <더 위자드>라는 소설인데. 그것도 출간되면 하나 줄게. 분위기가 비슷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근데 오빠. 번역 일 본격적으로 하시려고요?”
민우는 번역용 명함을 하나 꺼내 연주에게 건넸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했다.
“단순히 돈벌이로 시작한 일은 아니야. 우리나라 문학을 해외에 알리고 싶어서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어. 좋은 작품을 맡으려면 업계에서 유명해져야 하니까 이것저것 열심히 번역하고 있지.”
“역시 오빠는…….”
연주는 뒷말을 흐렸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꺼내지 못했다. 얼굴을 살짝 붉히는 것으로 끝냈다.
“그럼 전공을…… 비교문학으로 바꾸시는 게 좋은 거 아녜요? 마침 강철훈 선생님도 비교문학 전공에 참여하고 계시니까…… 얘기 잘 통할 거 같은데요.”
“안 그래도 이경훈 선생님이 제안을 하긴 하셨는데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일단 석사 논문부터 쓰는 게 먼저니까.”
고개를 끄덕인 연주는 랑느 박사의 신간을 집었다. 그녀의 프랑스어 수준도 상당했기 때문에 읽는 데 사전이 필요하진 않았다.
민우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참, 랑느 박사님 말이다.”
연주가 책을 내려놓고 민우를 바라보았다.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다음 달에 가족들하고 한국에 오시기로 했어.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한번 시간 내. 합석 허락하셨어.”
“정말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본론은 아니었다. 차가운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켠 민우는, 연주를 설득하기 위해 밑 작업을 시작했다.
“기억나? 내가 예전에 너한테 입원비 돌려준 날. 그때 책 하나 줬잖아. 랑느 박사님이 쓰신 책.”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체 민우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전에 소주 마셨을 때 네가 그랬잖아. 내가 준 책 때문에 회사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그랬……었죠.”
연주는 긴장했다. 민우가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또다시 혼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그걸 눈치챈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오해하지 않게끔.
“하나 물어보고 싶어. 결과적으로 봤을 때 내가 그 책을 너에게 준 게 좋은 일이었을까? 아니면 너를 더 힘들게 한 일일까?”
연주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쉬운 질문은 아니었다.
민우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조금 더 쉽게 대답을 할 수 있게 첨언했다.
“실은 나 그때 후회했어. 책을 괜히 준 게 아닌가 싶었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건…… 아녜요. 분명히.”
연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법 단호하게.
“오히려 전 즐거웠어요. 일부러 공부를 멀리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걸 깨달았는걸요. 만약 그때 오빠가 책을 주지 않으셨다면 여기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다행이다.”
그 한마디에 민우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공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들고 온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민우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이 있을 줄은 몰랐다.
“용기를 얻을 수 있었어요.”
“용기?”
“아버지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용기요. 이런 말 하기 좀 부끄러운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걸 해봤어요.”
연주가 반항을?
민우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인데. 아무튼 연주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부끄럽게 웃었다.
“술에 잔뜩 취해서요.”
“잠깐. 설마 그날 술 마시고 들어가서 아버지랑 한판 한 거야?”
“예. 어쩌다 보니…….”
“이야. 많이 놀라셨겠는데? 난 상상도 안 된다.”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연주는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민우가 재차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어?”
“일단 들어가서 자라고 하셨죠.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사실 저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요. 어머니께 대충 전해 들었어요.”
“그 후론 아버지와는 어때?”
“일적인 이야기 말고는 따로 얘기 안 해요. 그래도 요즘은 제 눈치 가끔 보시는 거 같더라고요. 뭔가 아주 조금, 변하긴 했어요.”
23년 동안 얌전히 자라온 딸이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쌓인 것을 토로했다면, 부모의 입장에서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우가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대며 말했다.
“네 말 들어보니 그래도 뭔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치?”
“예. 당장에 뭔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비효과처럼 뭔가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느낌은 분명히 있어요.”
“하나하나 차근히 만들어 가 보자. 그러는 의미에서 네가 좋아할 만한 아이템 하나 들고 왔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민우는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최근에 랑느 박사님의 저서 세 권을 번역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 불문과의 이경훈 선생님 알고 있지?”
“몇 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 선생님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인데 나도 거기에 참가하게 됐어. 가능하면 너도 같이했으면 해서 말이다.”
“제가요?”
“그래.”
연주는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프로젝트 제안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휴학 중이긴 하지만, 사실상 학교를 그만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마음 한구석이 꿈틀거렸다.
학문에 대한 열망. 그것이 연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휴학 중인데…… 할 수 있을까요?”
“가능해. 굳이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되고. 외주 형식으로 하면 되니까. 이미 이 선생님하고 이야기는 다 끝내 놓은 상황이야. 예스냐 노냐. 그것만 말해주면 돼.”
연주는 고민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이 일이 바깥에 알려졌을 경우의 파장을 생각해야 했다.
엄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어 냉정한 오빠와 언니들의 모습도 함께 생각났다. 만약 대학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잡음이 생길 것이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때 불현듯 드는 생각 하나.
‘도망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소주를 처음 마시던 그날, 민우가 자신에게 해줬던 이야기였다.
그걸 곱씹다 보니 생각이 쉽게 풀렸다.
가업을 소홀히 하지만 않으면 된다. 맡은바 충실히 일하고, 취미로 프로젝트를 한다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대학 일에 관여하다 보면 언젠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연주가 미소를 지었다.
먹구름으로 가득하기만 했던 하늘 한쪽이 열리더니 선명한 빛줄기가 내려왔다. 마치 그런 기분이었다.
“할게요.”
“좋아. 잘 생각했어.”
민우는 가방에서 프로젝트 참가자 명부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연주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기록하고 서명을 했다.
민우가 참가자 명부를 회수하며 덧붙였다.
“아 참, 설명을 빼먹었는데. 프로젝트 보수는 1년 치 등록금이야. 넌 휴학 중이니까 따로 계좌로 입금될 거야.”
“알았어요. 그런데 오빠 배고프죠? 바로 저녁 먹으러 갈까요?”
“그러자.”
두 사람은 이사실을 나섰다. 수행비서가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연주는 단호하게 대기를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