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0. 비 온 뒤에 땅이 굳을까 (3) (90/500)


090. 비 온 뒤에 땅이 굳을까 (3)
2021.08.27.


“어머니는 별말씀 안 하신다는 거 같더라. 그런데 아버지 쪽이 워낙 완강하시니까. 그게 문제지.”

“흐음, 전형적인 가부장 스타일이신가 보네.”

진섭이 생각에 잠겼다. 평소와는 다르게 폼을 잡고 있어서, 민우와 예린은 그가 어떤 아이디어를 꺼낼지 집중했다.

“두 분이 모두 반대하신다면 힘들겠지만, 아버지만 그런 거라면 오히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맞아. 생각보다 심각하진 않은 거 같은데.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

“어머니를 공략하면 되지. 편을 하나라도 더 많이 만들어 두는 게 낫다. 어머니도 교수라고 하셨지? 무슨 과야?”

“전기전자공학과.”

막연히 인문사회계열 쪽일 거라고 예상했던 진섭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쥐쥐요.”

“야이!”

민우가 한 대 때리려다 참았다. 주예린도 굉장히 실망한 표정이었다.

진섭이 말했다.

“이공계 쪽 교수면 인문학 관련 업적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확률이 높잖아. 뭔가 어필을 할 수가 없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머지 두 사람은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민우는 인쇄가 완료된 논문을 스테이플러로 찍고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야.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어. 조금 빨리 터졌을 뿐이지.”

“낙천적이네.”

“그렇게 봐준다면 고맙고.”

민우는 여유로웠다. 이수빈의 변함없는 마음을 확인한 후였다. 조급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진섭이 말했다.

“아무튼 행운을 빈다. 무사히 결혼까지 골인해야 할 텐데. 그런데 둘이 결혼하면 축의금은 누구한테 주지?”

“개념은 국회도서관에 반납하고 왔냐? 당연히 봉투 두 개 준비해야지.”

“오빠. 저는 옆에서 열심히 응원할 테니 봉투 하나로 줄여주세요.”

“안 돼.”

동료들의 애정이 느껴졌다. 덕분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렇게 민우는 307호를 나섰다. 이제 곧 약속 시간이었다.

* * *

버스에 오른 민우는 가방에서 <더 위자드> 2권을 꺼냈다. 이번에도 번역하기 전에 정독을 해서 분위기를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신비로운 모험이 시작됐다.

무기를 든 주인공이 웅장함을 준다면, 마법을 사용하는 주인공은 신비로움을 선사한다. 판타지는 그런 매력이 있는 장르였다.

압도적인 감동이 느껴졌다. 민우는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이 부분이 핵심이다. 체크해 둬야지. 한국 독자들도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문장에 신경을 써야겠어. 단어를 여러 개 놓고 고민을 해봐야겠다.’

민우는 포스트잇 플래그를 하나 떼어 해당 페이지에 표시해 놓았다.

사실 민우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그의 번역 스킬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노력과 열정.

적어도 그 두 가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민우에게 다른 재능은 필요하지 않았다.

민우는 계속 책을 읽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덕에 하마터면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화들짝 놀란 민우가 잽싸게 벨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좀 내릴게요!”

다행히 버스는 정류장에서 벗어나기 전에 다시 멈춰 섰다.

황급히 내린 민우는 한숨을 돌리며 가방에 책을 집어넣었다. 앞으로는 편한 장소에서 읽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일단 민우는 바로 선우기획 건물로 올라갔다.

그 전에 약속대로 박민아를 만났다. 그녀는 옥상 난간에 기댄 채 민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

“바쁘신 몸이라서.”

“용돈 필요할 때는 뻔질나게 연락하더니만 이제 돈 좀 만지니까 연락도 안 한다 이거지?”

“삐딱하게 구는 게 오늘 딱 상사한테 깨졌구만?”

속내를 들킨 민아가 흠칫했다. 과연 28년 내공은 허투루 쌓인 게 아니다. 민아는 곧 헛기침하더니 말을 돌렸다.

“뭐. 하긴,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지. 연애 전선엔 이상 없고?”

사실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

하지만 민우는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회사 일에 치여 있는 누나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별문제 없다고 대꾸하며 가방에서 <사각 살인>을 꺼내 누나에게 건넸다.

“오, 드디어 나온 거니?”

“책하고 담쌓은 누나랑은 전혀 안 어울리는 선물이지만 일단 받아. 가보로 잘 간직하라고.”

책을 받아든 민아는 활짝 웃었다.

“마침 냄비 받침대가 필요했는데 잘됐네. 천원샵 안 가도 되겠다.”

“아 진짜.”

“그나저나 영포자였던 동생이 외서 번역을 하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민아는 책을 어루만지며 감격했다. 스물여덟. 한 살 어린 동생이 당당하게 번역서를 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언제 번역 일까지 해낸 걸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기특한 마음이 더욱 컸다.

민아는 동생과는 달리 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이 책만큼은 어떻게든 읽기로 결심했다.

“역자 프로필은 그럴싸하게 썼어?”

“뭐, 그냥.”

반응이 시원치 않자 민아는 책날개를 폈다. 저자와 번역가의 프로필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읽곤 웃음을 빵 터트렸다.

“푸하하하! 아, 이거 걸작이네. 무슨 프로필을 이렇게 허접하게 써 놨어? 책을 좋아하는 커피 중독자? 장난해?”

“요즘 그게 유행이야. 일종의 신비주의라고 할까.”

“신비주의는 얼어 죽을. 명인대 석사 이력 정도는 넣지. 비싼 돈 주고 대학원 다니는 건데.”

“소설 번역하는데 학력 같은 거 넣어서 뭐해.”

“뭐, 아무튼 축하해! 이제 번역도 하기 시작했으니 곧 돈방석에 앉겠구나.”

“그 정돈 아니지. 부업으로 하는 건데 뭘.”

마음만 먹으면 한 달에 수십 권의 번역서를 쏟아낼 수 있다. 하지만 민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한 달에 딱 세 권만.’

그것이 민우가 잡은 상한선이었다. 너무 많이 작업을 맡았다가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공장을 돌린다느니, 대리인이 여럿 있다는 식의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책을 훑어보던 민아가 물었다.

“근데 번역료는 얼마나 받았니?”

“아직 못 받았어. 원고지 장당 3천 원 받기로 했는데, 대충 계산해 보니까 240만 원 정도 들어올 거 같더라고.”

“오호라. 생각보다 많이 받네.”

그때 민아가 사악하게 웃었다. 대악마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은 미소였다. 디아블로가 다시 돌아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동생아. 빚은 천천히 갚아도 돼. 누나 시집 보내준다는 거 잊지 않았지? 누나 호텔에서 결혼하는 게 꿈이었는데. 골든팰리스 호텔이 그렇게 좋다더라.”

“내가 몇 번을 말해? 그 전에 시집갈 사람부터 만들어 놓으라고. 과연 누가 누나를 데려갈까 싶기도 하지만.”

“이 짜식이!”

민아가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쳤다. 민우는 으악,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민아가 손을 털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행차야? 나 얼굴 보러 온 건 아닐 거고.”

“잠깐 연주 좀 보러 왔지.”

민우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연주에게 안부를 물을 겸 책을 전해주러 왔다고. 그러자 민아의 표정이 조금 불편해졌다.

“너 여기 자주 들락거리는 거 별로 안 좋지 않아?”

“누나가 낙하산이라서?”

민우는 한 대 더 맞았다. 이번에는 등짝이 아니라 뒤통수였다.

“뜬금없이 뭔 개소리야. 수빈이 말이다. 수빈이한테 연주 만나러 간다고 이야기했어?”

“얘기했지.”

“별말 없었고?”

“딱히?”

연주와 통화한 이후에 과민반응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와 다른 심리상태일 때였다.

수빈은 민우가 연주와 평소에 연락하고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우의 사생활을 인정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민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동생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이 한심아.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다른 여자 만나러 간다고 하면 수빈이가 좋아하겠어? 속이 새까맣게 탔겠다. 어쩐지 어디서 탄내가 난다 했더니만.”

“그냥 온 거 아니잖아. 일이 있어서 온 건데. 그리고 수빈이랑 연주 친해. 만나러 간다고 하면 대신 안부 물어달라고 하는 사이라고.”

“오, 신이시여……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이 불쌍한 중생을 어찌하오리까.”

민아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민우는 성호를 긋는 방법이 틀렸다고 지적하려고 했지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히려 친하니까 더 신경이 쓰일 수도 있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모르니 이 답답아? 입장을 바꿔 놓고 좀 생각을 해 봐.”

“나도 사적으로는 최대한 연락 안 하고 있어. 오해 사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도 개인적인 관계라는 게 있잖아. 프로젝트도 해야 하고.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그 전부터 이어온 관계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정론이었다.

하지만 민아는 민아였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물론 네 말도 맞아. 살다 보면 다른 여자를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생기겠지.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근데 넌 일일이 보고를 하고 다니잖아.”

“솔직한 게 죕니까?”

민아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지옥불이었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하, 이래서 모태솔로란…… 자, 박민우.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오늘은 너 지음사로 출근할 거잖아? 그럼 연주 얘기는 빼고 지음사 간다고만 해도 되지. 그치?”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나중에 연주 만났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해? 둘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는데.”

“그건 그때 둘러대면 되지. 너 잔머리는 탈아시아급이잖아. 아무튼 넌 주변에 쓸데없이 여자가 많으니 신경 써야 해.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야.”

민우는 반박하지 못했다. 국문과 출신이라 후배들도 선배들도 대부분 여자들이다. 그나마 남자들인 친구들은 죄다 대전에 있다.

민아가 계속 말했다. 다그치듯이.

“수빈이 말야. 겉으로는 쿨한 척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마음 졸이고 있을 수도 있어. 아니, 아마 백 프로일 거야. 자고로 여자란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애를 태우는 법이거든.”

“그래서 나도 조심하고 있다니까요.”

“걔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아직 미스테리긴 하다만…….”

“왜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겁니까?”

이제 잔소리는 충분하게 했다.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민아가 싱긋 웃었다.

“언제 자리 만들어서 솔직하게 얘기해 봐. 교통정리 제대로 안 하면 사고 난다. 그러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지. 알았니?”

민우는 왠지 두통이 심해졌다. 수빈이의 아버지 일도 있는데, 이런 식의 일이 더해질지 몰랐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누나가 한 말도 일리가 있어.’

학교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정연주를 시작으로, 학회를 준비하며 강예진과 가까워졌고 학부 후배였던 주예린이 대학원에 들어왔다.

민우는 누나가 괜히 충고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빈이가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질투는 또 다른 문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때 뜬금없이 튀어나온 누나의 한마디.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어.”

“쉽게?”

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충고를 했다.

“확신을 주면 돼. 어떤 일이 생겨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네가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고 다녀도 불안하지 않을 만한 굳건한 확신.”

“확신이라…….”

그게 어떤 것인지 확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왠지 잡힐 듯 말 듯 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알았어. 그러니 잔소리는 거기까지.”

“수빈이 놓치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하라고. 응? 어디 가도 그런 여자 없다.”

“알았다고.”

“먼저 내려가. 난 바람 좀 더 쐬고 내려갈 테니까.”

누나와 대화를 끝낸 민우는 옥상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내내 생각이 많았다. 자칫하다 계단을 헛디딜 뻔할 정도로.

‘확신.’

그 한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민우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 나온 김에 이따 저녁에 잠깐 수빈이 불러내서 얘기를 해 볼까?’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수빈에게 톡을 보냈다. 평소라면 바로 답장을 하는데, 오늘따라 숫자 1이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오늘은 쉬게 하는 게 좋으려나.’

일단 민우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이사실로 들어갔다. 데스크를 지키는 직원 외엔 아무도 없었다.

“어서 오세요. 박민우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사실 전담 여직원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상냥한 말투는 물론, 자신을 ‘박민우 님’이라고 불렀다. 호칭이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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