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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비 온 뒤에 땅이 굳을까 (2) (89/500)


089. 비 온 뒤에 땅이 굳을까 (2)
2021.08.26.


“보잘것없는 학교지. 소위 말하는 지잡대잖아.”

강예진도 답답했는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시원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강예진은 손목으로 입을 슥 닦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넌 지금 명인대에서 누구보다도 잘 해내고 있잖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일부잖아요. 절 모르는 사람들은 상아대 출신이라는 것만 보고 저를 판단하려 하지 않을까요? 명인대 대학원에 온 것도 학력 세탁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겠죠. 수빈이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고.”

맞는 말이었다. 현실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강예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꿋꿋한 어조로 민우를 타일렀다.

“지금이야 네가 석사 2학기니까 실력을 펼쳐 보일 기회가 많지 않잖아. 응? 하지만 인문학 강의도 그렇고 단행본 출판도 그렇고. 번역도 그렇고. 너 앞으로 계속 성장할 거잖아.”

민우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분명한 목표도 있었다.

명문을 번역해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타고, 루카치의 유고를 완성해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계적인 석학이 되겠다는 꿈을 이룰 목표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살다 보면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 일도 생긴다. 이번 이수빈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민우는 그저 외국어에 출중한 대학원생일 뿐이다.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맥주를 더욱 빨리 마셨다.

“수빈이는 너에게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어.”

강예진의 한마디에 민우가 맥주병을 내려놓았다.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만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돼. 수빈이의 마음이 변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괜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알았지?”

“알았어요.”

어느새 맥주 열 병이 모조리 끝났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 병을 정리했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고마워요 누나. 덕분에 마음이 좀 진정이 됐네요.”

“고마우면 밥 사라.”

상투적인 농담 한마디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민우는 웃었다.

“그 얘기 왠지 누나 만날 때마다 듣는 거 같은데요?”

“내가 다이어리에 다 적어 두고 있어. 걱정하지 마. 너 잘되면 한 개도 빼놓지 않고 착실히 뜯어먹을 거니까.”

“먼저 갈게요.”

민우는 웃으며 307호를 나섰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네. 에휴. 말년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그렇게 한마디 중얼거린 강예진은 다시 박사연구실로 돌아와 맥주를 땄다. 민우의 서글픈 표정을 보니 마음이 저릿했다.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수빈을 민우에게서 떼어낼 좋은 기회.

하지만 강예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한 사람의 여자가 되는 것보다, 두 사람의 선배로 남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욱 먼 미래를 본 것이다.

그날 박사연구실은 새벽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 * *

다음 날, 민우가 눈을 떴다.

씻기도 전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톡이 몇 개 와 있었는데, 대개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간단히 답장하고 어플을 껐다.

민우는 곧장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수빈은 전화를 받았다.

― 미안해. 오빠.

“미안할 게 뭐 있어. 잠은 좀 잤어?”

― 으응.

“아침은?”

― 아직요.

다행스럽게도 수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민우는 아이를 어르듯 자상하게 말했다.

“밥은 잘 챙겨 먹어야지. 집에 먹을 거 없어?”

“이제 일어나서 그래. 이따가 먹을 거야. 아, 오빠가 해 준 비빔국수 먹고 싶은데.”

“지금 갈까?”

“안 돼.”

“맨날 안 된대.”

사적인 대화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민우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수빈은 솔직하게 답했다.

민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랬구나. 아버지께서 알게 되셨다고?”

― 동문회에 나가셨다가 우연히 듣게 되셨나 봐. 우리 과 박창민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 같아. 학부 때 같은 동아리셔서 가끔 만나시거든.

강예진의 예상이 적중했다. 우연한 계기로 딸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격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는 것.

하지만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수빈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하는 말은 그랬다.

― 연애잖아. 결혼도 아니고. 부모님이 이래라저래라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민우는 문득 몇 달 전 일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고, 수빈이를 누나에게 소개해 준 그날이었다. 그때 누나는 집안의 차이를 언급했다. 쉽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빈은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고 했다. 물론 민우는 그 짐을 수빈에게 모두 떠넘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민우가 말했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네가 마음고생만 하네. 화가 난다 정말. 고등학생 때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면…….”

― 아니야.

이수빈이 말을 끊었다. 민우는 입술을 깨물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 오빠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야. 아버지가 그걸 몰라주시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건 내 인생이야. 다른 사람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오빠는 자괴감 가질 필요 없어. 상아대는 오빠를 키워낸 명문이야. 지잡대가 아니라구. 알았죠?

민우는 울컥했다. 본인이 제일 힘들 텐데, 이렇게 자신까지 챙겨주는 모습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알았어. 그런데 집안 분위기는 어때?”

― 그냥 그래. 아무튼 미안해요. 어제 그렇게 소리 지르고 도망쳐 버려서. 다들 깜짝 놀랐을 텐데.

“괜찮아. 사람이 살다 보면 기분 나쁠 때도 있는 거지.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정도로 속 좁은 애들은 아니잖아?”

민우가 애써 농담조로 말했다. 잠시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찾아왔다. 다시 대화를 시작한 건 이수빈 쪽이었다.

― 섭섭 오빠랑 예린이는 별말 없었어요?

“다들 걱정하고 난리지. 일단 내가 연락은 하지 말라고 해 뒀어. 너도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 어쩐지 조용하더라.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누구 일인데 당연히 신경을 써야지. 미안해. 내가 미리 신경을 써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 아녜요. 갑작스러운 일이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 아무튼 두 사람한테는 오빠가 잘 설명해 줘요. 그리고 어제 연주 일로 툴툴댔던 거, 잊어줘요. 너무 예민해서 말을 막 한 것 같아.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민우는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맞대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수빈아. 괜찮으면 잠깐 볼래? 내가 그쪽으로 갈게.”

― 미안해요.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다음에 보면 안 될까?

“알았어. 그럼 푹 쉬고 먹을 거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알았지?”

― 응.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꼭 해야 할 말 하나를 빼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빈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사랑해. 이 말을 빼먹었네.”

― 나두요.

핸드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소를 되찾은 민우는 인문관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은 기우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두 사람의 마음은.

* * *

307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민우는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열었다. 집중력은 최고조였다. 때마침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수신인을 확인해 보니 랑느 박사가 보낸 메일이었다.

‘벌써 자료를 보내주신 건가?’

민우는 기대감을 품으며 메일을 클릭했다. 첨부파일 하나와 랑느 박사의 코멘트가 짧게 적혀 있었다.

― 프랑스 지식인들의 앙가주망론에 대한 새로운 논문이오. 연구의 필요성 측면에서 미스터 박의 논문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우선 한 편을 보내오.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우선 한 편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페이퍼라는 말이었다. 민우는 재빨리 첨부파일을 클릭했다.

클리멍 베르나르(Climent Bernard)라는 사람의 페이퍼였다. 민우는 우선 목차부터 쭉 훑고 초록을 읽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은데?’

마치 초등학교 때 쓰던 전과를 펼쳐본 듯한 느낌이었다.

첫 챕터가 ‘실존주의의 편재성’이었다. 클리멍 베르나르는 실존주의가 현재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독특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문체. 민우는 그 방식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무엇보다도 순수문학 연구에 통계학을 접목하다니. 쉽게 할 수 없는 방식인데…….’

여러 도표가 들어가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실존’, ‘구조’, ‘해체’, ‘구성’ 등 실존주의와 관련된 키워드들의 사용 빈도수를 조사한 표였다.

실존주의가 출현한 이후로도 그 키워드가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입증한 자료이기도 했다.

그 표를 보며 민우는 논문에 쓰일 만한 한 구절을 떠올려냈다.

― 실존주의는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에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수용자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위축되기는커녕 꾸준한 형세를 이어오고 있다.

민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이거라면 논문의 당위성을 해결할 수 있겠어. 느낌이 좋다.’

민우는 민 교수 설득에 보다 한 걸음 나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구의 당위성은 연구방법론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다. 이 연구가 왜 필요한가. 이 연구가 학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를 따지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민우는 만년필을 꺼내 방금 떠올린 구절을 메모해 놓고는 계속 논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정독하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걸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치면 쓸 만하겠어. 적어도 실존주의라는 사조가 구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려면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야 했다. 클리멍 베르나르의 논문은 자국의 검색 포털을 이용한 거였으니까.

‘일단 한숨 돌렸어.’

민우는 공용 컴퓨터로 이동해 논문을 열고 인쇄를 걸었다. 이동하는 중에 틈틈이 읽어 아이디어를 체크할 생각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진섭과 예린이 들어왔다.

“음? 생각보다 멀쩡하네? 반쯤 폐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드만.”

진섭이 농담 삼아 툭 던졌다. 반면 주예린은 걱정이 한가득이다.

“수빈이랑 싸운 거예요? 어제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어서 연락도 안 되더라고요.”

“싸운 거 아냐.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인데요?”

이수빈이 설명을 잘해달라고 부탁했던 터라 민우는 두 사람을 불러다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하, 그런 일이 있었군.”

진섭이 턱을 쓸어 만지며 중얼거렸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주예린은 썩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도 상아대 출신이었으니까.

한 인간의 가치가 학벌로 평가된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느낀 것이다.

진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수빈이네 아버지가 반대하신다는 거지? 교제를. 네가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렇지.”

“하긴. 빈이 외동딸인 데다가 머리도 좋고 예쁘기까지 하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겠어. 네가 아닌 다른 누가 와도 아버지가 곱게 안 보실걸?”

민우와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같은 여자이자 장녀였던 예린은 공감했다.

“맞아요. 우리 아빠도 저 남친 생겼다고 하면 되게 싫어하시더라고요. 어떤 놈이 우리 딸 빼앗아 가려는 거냐면서.”

“뭐, 그런 느낌이지.”

진섭이 입맛을 다셨다. 작업 대상이 옛날 남친 이야기를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헛기침하며 진섭이 물었다.

“그런데 수빈이네 어머니는 어떠셔? 어머니도 반대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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