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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비 온 뒤에 땅이 굳을까 (1) (88/500)


088. 비 온 뒤에 땅이 굳을까 (1)
2021.08.23.


민우가 물었다.

“혹시 휴학생도 프로젝트에 참여가 가능할까요? 외주 형식으로요.”

“휴학생이라면 가능하지. 학적이 남아 있기만 하면 돼. 아는 사람 중에 프랑스어 잘하는 사람이 있나? 아! 그렇군.”

이경훈 교수가 무릎을 탁 쳤다.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민우와 자신의 접점에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혹시 정연주?”

“네. 지금은 선우기획 이사로 있긴 한데, 외주 형식으로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전에 랑느 박사님 책을 권해준 적이 있었는데 흥미롭게 읽었다고 했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었다는 얘기는 그 책을 제대로 소화시켰다는 얘기인데.”

아귀가 딱 맞아떨어졌다. 이경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확실히 연주 학생 정도라면 믿고 맡길 만하지. 연락 자주 한다고 했었지?”

“네.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경훈 교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정연주를 가르쳐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분명 전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섭외 좀 부탁하마. 휴학 상태니까 연구비 지급은 문제가 없을 거야. 뭐, 사실 그 정도 집안이라면 연구비 정도는 돈도 아니겠지만.”

“알겠습니다.”

민우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섭외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해.”

“옙.”

책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온 민우는 연주에게 톡 하나 보냈다.

― 바빠?

까똑!

바로 답장이 왔다.

정연주: 아뇨! 괜찮아요.

삼겹살에 소주를 한 그날 이후로 연주는 답장을 꼬박꼬박했다. 가끔은 먼저 톡을 보내기도 했다. 예전보다 훨씬 친밀해졌다.

― 이따 지음사로 출근하는 길에 잠깐 선우기획에 들를게. 시간 괜찮지?

정연주: 예^^ 비서에게 미리 얘기해 둘게요!

왠지 웃는 이모티콘을 보니 환하게 미소 짓는 연주의 얼굴이 생각났다. 민우는 핸드폰을 넣고 307호로 걸음을 옮겼다.

‘얘기가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연주는 나이에 비해 경력이 많다. 말 그대로 적임자였다. 무엇보다도 외주 작업이라면 공간적인 제약이 적으니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민우는 얼마 전 우연히 이사실 앞에서 만났던 그녀의 부친, 정만학을 떠올렸다.

‘집안에서도 뭐라 하지 못할 거야. 일종의 취미라고 보면 되니까.’

계단을 내려가며 민우는 연주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낼지를 생각했다.

신중히 접근할 일이다. 자칫하다가는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만 줄 수 있으니까.

‘랑느 박사님 신간을 주면서 슬쩍 얘기를 꺼내 보자. 자연스럽게.’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연주였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민우는 잠시 복도 창가에 기댄 채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야?”

― 오빠. 정말 죄송한데요. 오늘 갑자기 임원 회의가 잡혀서…… 제가 시간을 못 낼 거 같은데…….

“그래? 그럼 그냥 톡 남기면 되지 뭐하러 전화를 걸어. 바쁜 사람이.”

― 그건 좀 예의가 아니잖아요.

민우는 웃었다. 지극히 연주다운 행동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연주만 같다면 참 평화로울 텐데.

“그럼 어떻게 할까? 내일 시간 괜찮으면 내일 들를게.”

― 내일은 괜찮을 거 같아요. 오빠 괜히 바쁘신데 무리하는 거 아니죠?

“괜찮아.”

― 저…… 그럼 내일 오후 5시쯤 오셔서 말씀 나누고 같이 저녁도 먹으면 안……될까요?

연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민우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저녁?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 전에 갔던 거기요.

“아, 삼겹살. 하하하. 너 완전 꽂혔구나. 대신 술은 마시면 안 된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가고 전화가 끊겼다. 창가에서 몸을 돌린 민우는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눈앞에 이수빈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해?”

“오빠 있길래 통화 끝나는 거 기다리고 있었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말투가 평소와는 좀 달랐다. 낮고, 차가웠다. 기분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자 목소리던데 누구예요?”

“연주.”

“연주가 왜?”

“랑느 박사님 신간 나온 거 전해줄 일이 있어서 잠깐 통화했어. 할 얘기도 있어서 내일 잠깐 선우기획에 들르기로 약속 잡은 거야.”

이수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연주랑 할 얘기는 뭔데요?”

“그게, 프로젝트 이야기지. 이경훈 선생님이 판을 하나 짜고 계시거든. 랑느 박사님 단행본을…….”

“연주 학교 그만뒀잖아요.”

그녀가 말을 잘랐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만둔 건 아니잖아. 정확히는 휴학 중이야.”

“…….”

수빈은 가만히 민우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안색도 창백한 게 평소와 달랐다.

‘오늘따라 되게 예민한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래서 민우가 물었다.

“어디 아파? 기분도 별로인 거 같고.”

“그냥 몸살.”

“여름 감기 독하다던데. 미리 병원 가보는 게 좋지 않아? 같이 갈까?”

“이 정도로 무슨 병원이야. 그냥 좀 쉬면 나을 거야.”

“그래도.”

민우는 수빈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어 보였다. 자상한 행동이었지만 오늘따라 짜증이 났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수빈이 민우의 손을 툭 걷어내고 앞장섰다.

“들어가요. 사람들 쳐다보잖아.”

민우는 무안해진 오른손을 쥐었다 펴며 이수빈의 뒤를 따랐다.

307호는 오늘도 썰렁했다. 한진섭은 컴퓨터를 붙들고 있고, 주예린은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머지 두 석사들은 잡담을 나눴다.

한진섭이 제일 먼저 알은척했다.

“왔냐?”

“안녕요.”

“응?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벌써 민우한테 차였…….”

그때 뒤에 있던 민우가 미친 듯이 수신호를 보냈다. 까불지 말라는 의미였다. 진섭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컴퓨터에 집중했다.

하지만 저기압 주의보를 알아보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다. 주예린이 노트를 들고 쪼르르 민우에게 다가왔다.

“오빠. 한가하죠?”

“아니.”

“다행이네요. 바쁘실 줄 알았는데.”

그때 뒤에 있던 한진섭이 자기도 한가하다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주예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놉시스 다 썼는데 좀 봐주세요. 이번에 신작 들어가는 건데. 꽤 괜찮게 나온 거 같아요. 현대 판타지고요. 회귀 코드를 살짝 비틀어봤어요.”

“요즘도 회귀가 유행이냐?”

민우가 노트를 받아들었다. 옆에 착 달라붙은 주예린이 펜으로 가리키며 설정부터 설명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나갔다.

한편, 소파에 편히 앉아있던 이수빈은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머리가 지끈거려 수빈은 다시 눈을 감았다.

민우가 시놉시스를 끝까지 읽고 평했다.

“실제로 글이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대로라면 꽤 괜찮겠다. 집안의 장남이 인생을 두 번 살 수 있다는 게 흥미롭네. 일단 작업 들어가 봐.”

“넹!”

그때 한진섭이 다가왔다.

“나도 좀 보여줘. 나름 판무 마니아라고. 매달 결제하는 돈이 20만 원이 넘을 정도야.”

“싫은데요?”

“나중에 너 유료연재 들어가면 안 읽을 거다? 나 달피아 레벨 99인데. 내가 추천 한 방 때리면 캬! 조회수 쭉쭉 올라갈걸?”

“바로 드리겠습니다!”

주예린이 두 손으로 공손히 시놉시스를 내밀었다.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한편 민우는 수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쉬고 있었다. 늘 건강하던 그녀였다. 민우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빈아.”

“왜?”

“집에 가서 쉬어. 데려다줄게. 오늘 오후 수업 없잖아. 응?”

“괜찮다니까 왜 자꾸 그래요!”

순간 307호에 정적이 찾아왔다.

수빈의 목소리가 조금, 아니 많이 컸던 것이다. 민우는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진섭은 읽던 종이를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입을 가린 수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미안해요. 내가…….”

말을 채 잇지 못한 수빈이 도망치듯 307호를 나섰다. 민우가 뒤쫓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나타난 강예진이 손을 붙들었다.

“넌 여기에 있어.”

따라가지 말라는 의미였다.

대신 뒤를 쫓은 건 강예진이었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거 같았다.

* * *

민우는 307호에 앉아 한없이 시간을 보냈다. 본편 집필에 들어간 주예린도, 인터넷 서핑을 하던 한진섭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졌다. 민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

수빈이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따라갔던 강예진도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민우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이경훈 교수가 준 랑느 박사의 신간이었다. 안경을 끼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데, 민우는 글자를 머릿속에 집어넣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안경을 꺼내 써보았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 답답하네.’

민우는 책을 덮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씩 복기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화를 낼 만한 일은 없었다.

얼마 전 경한신문 인터뷰를 끝내고 나서 했던 데이트도 문제가 없었다.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혹시 연주와 통화한 거 때문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평소에 연주의 안부를 묻는 것은 수빈이었다. 잘 챙겨주라는 말도 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는 건, 수빈의 성격상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아직 안 가고 있었네?”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강예진이었다. 얼굴이 조금 빨개 보였는데, 술을 좀 마신 것 같았다.

“수빈이는요?”

“일단 집에 보냈어. 많이 취했으니까 연락은 내일 해 봐. 마침 잘됐네. 도망가지 말고 잠깐 기다려.”

잠시 후 강예진이 맥주를 잔뜩 들고 왔다. 박사연구실에 쟁여놓은 것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뻥!

그녀는 숟가락으로 맥주 뚜껑을 가볍게 날려버리고는 민우에게 한 병 건넸다.

그들에게 맥주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였다. 안주도 필요 없었다. 건배도 생략했다.

“많이 놀랐지?”

“놀란 정도가 아닙니다. 처음이에요. 수빈이가 그렇게 화를 낸 거.”

“얘기 들어보니 집에 좀 일이 있었나 봐. 아버지랑 크게 다퉜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얘기를 안 해 주더라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요? 짐작 가는 거 없으세요? 학교에선 누나가 수빈이랑 제일 친하잖아요.”

“본인이 입을 안 여는데 알 도리가 있나. 내가 궁예도 아니고.”

강예진도 답답했는지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녀는 벌써 두 병째를 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제일 친한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냐? 지금까지 뭐 들은 얘기 없었어?”

“없으니까 여쭤본 거죠.”

애초에 이수빈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특히 힘든 일은 더더욱. 고민을 마음속에 쌓아두는 타입이었다.

민우는 반성했다.

‘내가 너무 무심했어.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한편, 술집에서 이수빈과 나눴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던 강예진이 불현듯 뭔가를 떠올렸다. 눈매가 좁아졌다.

“혹시 말인데. 수빈이네 부모님이 너희들 사귀는 거 알고 계시니?”

“모르실 겁니다. 일부러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

“알면 안 좋아하실 거 같다고.”

“안 좋아할 이유가 뭐가 있어? 너 얼굴 멀쩡하고 능력 있고 매사에 열심히 하는…….”

강예진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단 하나의 결격사유가 떠올랐다. 민우가 자대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

수빈의 부모는 모두 명인대 출신이다. 조금만 발품을 판다면 자신의 딸이 누구와 만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엘리트 기성세대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바로 학벌이다. 예외도 있지만, 수빈의 부모는 아니었다.

상아대 출신.

그것은 민우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두 사람의 침묵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강 답 나온 거 같은데? 왠지 느낌상 수빈이네 부모님이 사귀는 거 알게 되신 거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내일 연락해 봐야죠. 정확히 어떤 일 때문에 그런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추측일 뿐이지.”

하지만 민우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강예진의 말대로 답이 나온 문제다. 수빈이가 아버지와 다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민우가 늘 걱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아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으니까.

민우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새 그의 앞에 놓인 빈 병이 벌써 세 개째였다. 그가 막 네 개째 병을 따며 입을 열었다.

“누나.”

강예진이 애잔한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맥주병을 쥔 그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 모교가, 상아대가 그렇게 보잘것없는 학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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