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2)
(87/500)
087.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2)
(87/500)
087.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2)
2021.08.20.
“Allo?”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곧바로 영어로 답했다.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명인대의 박민우입니다.」
「오, 미스터 박! 웬일로 전화를 다 하셨소?」
전화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민우와 랑느 박사는 메일로 자주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민우는 국제전화비를 물더라도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글자 몇 개로 부탁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부도 물을 겸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바쁘시진 않으신지요? 지금쯤이면 한가하실 것 같아서요.」
「잘했소! 마침 한가하던 차에 미스터 박의 전화를 받으니 반갑군.」
민우는 스마트폰을 활용해 파리의 시간을 매번 체크하고 있었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그에게 연락을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서울과 파리의 시차는 7시간. 지금 서울이 오후 다섯 시니 파리는 오전 열 시쯤 됐을 것이다.
민우가 잠시 화제를 돌렸다.
「얼마 전에 이경훈 선생님께서 프랑스에 가서 박사님을 뵙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 그랬지. 닥터 리가 갑작스럽게 찾아와 놀랐지만 이야기는 흥미롭게 잘 끝냈다오. 내 저서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출간이 될 거라고 하더군.」
「들었습니다. 저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영광스럽게도요.」
「하하하! 그랬군. 미스터 박이라면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지. 모쪼록 잘 부탁하오.」
밀려있던 안부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민우는 본론을 꺼냈다.
「박사님. 일전에 제가 보내드린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좀 보셨습니까?」
「물론이오. 보내준 그 주에 모조리 읽었지. 특히 장용학이라는 사람이 쓴 <요한시집>이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소. 소설 원문을 읽고 싶어서 사방으로 뛰어다녔는데 구하기가 어렵더군.」
「제가 알기로 프랑스어로 번역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영어판도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한국 문학이 의외로 번역에 취약한 것 같소. 적어도 영어로는 번역이 되야 해외에 알릴 수 있을 텐데 말이오. 내 짧은 식견으로도 학술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이 꽤 보이니.」
그때 민우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딜을 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우려는 것이긴 하지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뒤 민우가 말했다.
「박사님. 제가 <요한시집>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단편이라 금방 할 수 있을 겁니다.」
「오, 정말이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이거 늘 내가 받기만 해서 미안하군. 내 도움이 필요할 일은 없소?」
「안 그래도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오늘 연락을 드린 겁니다. 하하하.」
핸드폰 너머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랑느 박사는 민우의 이런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말해 보시오. 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소.」
「제가 1950년대 실존주의 소설의 수용 양상에 대한 논문을 하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의 소설은 프랑스의 실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렇지.」
「그런데 기존의 연구방법론이 지나치게 많이 쓰였다는 지적이 들어왔습니다. 다른 사상적 배경이라든지, 연구방법론을 소개해 주실 수 없나 해서요.」
민우는 민영환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1930년대 농민소설도 마찬가지로 연구가 많이 된 분야다. 상황이 동일하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는 게 맞다.
무엇보다도 민우는 이런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해야지 왜 남의 잣대에 끌려다녀야 해?’
이면지함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민우는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계획서를 버전업해서 다시 민 교수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호통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논리적으로 그에게 당하지 않을 방법은, 1950년대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찾는 것이었다.
곧 랑느 박사가 답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일단 미스터 박의 연구계획서를 좀 봐야겠소. 어떤 부분이 상투적인지를 알아야 할 테니까.」
「제가 박사님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실존주의에 대한 프랑스 내의 최근 연구와 흐름 정도만 있어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문제없지. 잘 알겠소.」
일단 목표는 달성했다. 민우는 한숨을 돌리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참 박사님. 혹시 한국 방문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다음 달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할 생각이오. 내 와이프도 대추차에 꽂혔다오. 하하하. 가이드를 부탁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제 아는 동생이 명인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석사과정까지 했는데요. 박사님의 저서를 읽더니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함께 자리를 마련해도 괜찮겠습니까?」
연주 이야기였다.
그녀와 소주를 마실 때의 일이다. 연주는 랑느 박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고, 민우는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었다.
랑느 박사가 살짝 놀란 어조로 말했다.
「내 저서를 읽었다고? 이거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겠군. 자리를 꼭 마련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번에 내가 신간을 냈소. 닥터 리에게 보냈으니 그에게 가서 받으시오. 미스터 박의 몫은 두 권이오.」
「두 권이요?」
「하나는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시오. 아, 방금 전에 말한 프랑스문학 전공하는 동생에게 선물하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박사님.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고요. 그럼 끊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들어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307호에는 석사들이 바글바글했다. 다들 민우가 영어로 통화하는 걸 듣고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다.
영어를 잘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통화 내용 때문이었다. 연구물에 대한 이야기를 외국인과 나누는 게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 민우는 가방을 챙기고 307호를 나섰다. 잊어버리기 전에 이경훈 교수에게 들러 책을 받기로 했다.
마침 이경훈 교수는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어, 왔어?”
“안녕하세요. 선생님.”
“앉아라. 안 그래도 마침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네.”
이경훈 교수는 인쇄된 종이 한 장을 꺼내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프로젝트 참가자들 명부야. 산학협력단에 올려야 하니 빠짐없이 정확하게 기입해.”
“알겠습니다.”
민우는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필기를 시작했다. 수빈과 진섭에게 선물을 받은 이후 줄곧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었다.
“젊은 녀석이 만년필을 쓰네. 폼 잡는 건가? 하하하.”
“이번에 출간 기념으로 선물 받은 거라서 좀 써보려고요. 서걱거리는 느낌이 참 좋아서.”
“하긴, 만년필은 그런 로망이 있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학번 등을 기입하고 다시 종이를 이경훈 교수에게 돌려주었다. 이것으로 공식적으로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요즘 랑느 박사님하고는 연락하냐?”
“안 그래도 지금 통화하고 오는 길이에요.”
“무슨 일로?”
민우가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 민영환 교수에게 퇴짜를 맞은 것부터 랑느 박사에게 새로운 관점의 페이퍼를 소개해달라고 한 것까지.
그 말을 들은 이경훈 교수는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었다.
“겉으로 보면 되게 얌전할 것 같은데 송곳니를 감추고 있구나. 너.”
“송곳니라뇨. 무슨 말씀을. 그냥 전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
“예.”
민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민 교수가 항명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 교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술적으로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도 묵살할 만큼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랑느 박사는 분명 좋은 이론을 소개해 줄 것이다.
다만 민우가 걱정하는 것은 민 교수가 나쁜 마음을 품는 것이었다.
바로 아이디어를 훔치는 것.
민영환 교수는 화려한 이력만큼 논문을 빨리 쓸 수 있었다. 민우가 완성해서 발표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면 손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마침 이경훈 교수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학회에서 발표를 하려면 민 선생님의 지도를 받겠지? 아이디어를 뺏기지 않을 자신은 있나?”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두긴 했습니다.”
“들어볼 수 있겠나?”
민우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경훈 교수는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먼저 랑느 박사님이 보내주신 자료를 제 블로그에 번역에서 올릴 생각입니다. 아시죠? 해외에서 번역된 신간 저술을 올리는 용도로 블로그 운영하는 거.”
“알지. 거기 요즘 꽤 유명해졌잖아. 나도 가끔 들어가 보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나?”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 블로그에 제일 먼저 올렸다고 해서 그 이론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선수를 칠 생각입니다. 일단 다른 학회에 가입을 하고, 거기 사무국에 논문초록을 보내서 발표 신청을 할 생각이에요.”
“어디?”
“국제비교문학회요.”
“민 선생님 허가도 없이 일을 진행하려고?”
“어차피 거기는 한일대에서 주관하는 학회니까요. 민 선생님의 입김이 닿지는 않습니다.”
팔짱을 낀 이경훈 교수가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박진영 선생님이라고, 영문과 교수님 한 분 있습니다.”
일전에 블로그 방명록에 ‘성좌’라는 닉으로 글을 남긴 그 사람이었다. 민우는 가끔이긴 해도 박진영 교수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오고 있었다.
박진영 교수는 한일대학교 영문과 교수이기도 했고, 국제비교문학회에서 연구 이사로 일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블로그 운영에 조언을 많이 들었다. 덕분에 민우 블로그의 영미문학 카테고리는 상당한 전문성을 갖추게 되었다.
“용케도 다른 학교에 라인을 잡았네. 아무튼 그래서? 발표 신청을 했다고 민 선생님께 말씀을 드릴 생각인가?”
“아뇨. 그렇게 직접 말씀드리면 화를 내시겠죠.”
“그럼?”
되묻는 이경훈 교수에 얼굴에 흥미가 가득했다. 팝콘이라도 쥐여줘야 할 상황이었다.
“민 선생님께 넌지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일대에 박진영 선생님라고 계시는데, 제 논문계획을 듣고 관심을 가지셨다고. 국제비교문학회에서 발표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다고.”
“오호라. 일종의 경고로군. 괜히 어설프게 아이디어 뺏어서 쓰지 말라는.”
“민 선생님은 리스크가 큰일은 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 섣부르게 행동하진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거기 말고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발표를 하라고 종용하시겠지요. 제자 자랑도 할 겸.”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기던 이경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큰 무리 없는 계획이었다.
“얌전한 줄 알았는데 너 정치 좀 한다? 나중에 국회로 가도 되겠어.”
“주먹다짐을 잘 못 해서 안 될걸요.”
적절히 터진 농담에 이경훈 교수가 큰 소리로 웃었다.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랑느 박사님이 신간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던데요? 제 몫도 있다고.”
“아 참. 그렇지.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선 이경훈 교수가 책상에 놓인 새 책 두 권을 가져왔다. 불어로 쓰여있었지만, 민우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 Théorie de la littérature moderne >. ‘근대문학의 이론’이라는 제목이었다.
‘근대’라는 말은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민우는 하루빨리 읽어 랑느 박사가 말하는 근대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 책도 우리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책인가요?”
“아니. 이건 계약을 못 했다.”
“아쉽네요.”
“아쉬워할 거 뭐 있나? 나중에 볼륨 좀 쌓이면 랑느 박사 전집을 기획해볼 수도 있는 거니까 서운해하지 마라.”
전집 작업이라는 말에 민우는 흥미를 느꼈다. 전집 편찬. 문학 연구자라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그런 일이다.
일단 민우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 프로젝트는 언제부터 시작인가요?”
“인원을 좀 모아야 해. 주력 멤버들이 지금 다 해외로 나가 있는 상황이라 난처하다. 그래도 한 달 내로는 시작을 해 봐야지.”
이경훈 교수의 표정이 조금 답답해 보였다. 생각보다 인력 충원이 쉽지 않은 듯했다.
‘확실히 프랑스어 번역을 꼼꼼하게 하는 사람은 찾기가 힘드니까.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학을 가거나 했겠지.’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는 영어 원서를 번역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력을 구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이경훈 교수의 프로젝트는 기본이 프랑스어다. 난이도가 다르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맞아. 그 녀석이라면 맡아서 잘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