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1)
(86/500)
086.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1)
(86/500)
086.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1)
2021.08.19.
“맞아. 그건 일주일 걸렸고.”
“세상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팀 직원들은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관계자인 편집팀원들은 다들 얼었다.
현기혁 팀장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뭐가 어떻게 됐든 일단 일들 하자고. 근데 우 대리. 예전에 <더 위자드> 읽어봤다고 했었지? 원서로.”
질문의 의미를 간파한 우 대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님. 한 번만 봐주심 안 될까요? 저 이따 세 시에 미팅 잡혀있고, 다른 원고도 봐야 하는데…….”
잦은 야근으로 얻은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모습에 현기혁 팀장은 혀를 찼다. 확실히 스케줄이 빡빡하긴 했다.
“알았어. 우는소리 하지 마. 내가 볼 테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팀장님. 제가 내일 보겠습니다. 급한 거 아니니까 좀 미뤄 두시죠.”
“됐어.”
사실 우영훈 대리의 말처럼 좀 늦게 확인해도 상관은 없는 원고였다.
하지만 현기혁 팀장은 궁금했다. 5일 만에 날아온 이 번역 원고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이유리가 손을 들었다.
“팀장님. 저도 <더 위자드> 리뷰해도 될까요?”
“괜찮겠어?”
“원문 대조는 어렵지만 문장이나 문맥이 어떤지는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좋아. 그럼 리뷰는 나하고 유리 씨가 진행하는 걸로.”
우영훈 대리의 못마땅한 눈빛이 이유리를 향했다. 그녀는 늘 자신이 할 일을 자진해서 가져가곤 했다. 뺏기는 느낌이었다.
‘저렇게까지 팀장님한테 잘 보이고 싶을까? 젠장, 정신 바짝 안 차리면 내가 뒤처지겠는데.’
이러다가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던 우영훈 대리도 작업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현기혁 팀장은 이미 우영훈 대리의 표정을 모두 읽었다.
하지만 딱히 질책하거나 하지 않았다.
지금은 회사가 한창 성장할 시기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경쟁과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회사가 안정권에 접어들면 공과(功過)를 엄하게 가릴 생각이지만.
“팀장님. 저 외근 다녀오겠습니다. 미팅이 길어질 거 같으니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그래.”
우영훈 대리가 외근을 나갔다.
때맞춰 현기혁 팀장이 잔업을 마저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 대리가 자리를 비우면 편집팀 분위기가 좋아졌다.
“커피 한잔할 사람?”
“앗, 저요!”
이유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연아 씨는?”
“전 방금 마셔서 괜찮아요. 나가서 사 오시는 거면 제가 다녀올게요.”
“괜찮아. 담배 피울 겸 나가는 거라.”
잠시 후 현기혁 팀장이 얼음을 가득 채운 커피 두 잔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하나는 이유리의 책상에 놓였다.
자리에 앉은 현기혁 팀장은 <더 위자드> 1권 원고를 열었다.
역시나 보기 좋게 조판 양식으로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배경 색도 들어가 있어 눈이 편했다. 따로 손볼 것 없이 바로 읽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심결에 커피를 마시려던 현기혁 팀장이 살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테이크아웃 컵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 얼음까지도.
‘엄청난 몰입감이다.’
시간을 확인하니 원고를 읽기 시작한 지 꼬박 두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읽기만 한 것이다.
현기혁 팀장은 고개를 들어 이유리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헤 벌린 채 원고에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민우 씨를 잡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어. 내 감도 아직 죽진 않았군.’
회심의 미소를 지은 현기혁 팀장은 다시 커피를 채워와 남은 원고를 마저 읽었다. 한 시간 후에 두 사람은 리뷰를 다 끝냈다.
“팀장님도 다 읽으셨어요?”
“지금 막.”
현기혁 팀장이 기지개를 켜는 이유리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미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현기혁 팀장이 물었다.
“어땠어? 솔직하게 말해 봐.”
이유리는 잴 것 없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한효주 님, 김태현 님 작업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퀄리티가 좋아요. 후속권도 빨리 보고 싶네요. 정말 재미있어요. 번역이 잘된 걸 떠나서 작품 자체가 너무 좋아요.”
현기혁 팀장의 의견도 이유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표현대로 중견 번역가들의 작업물에 뒤지지 않았다.
“작품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외서일 경우는 번역자의 능력도 중요하지. 오역은 물론 번역이 이상해지면 작품이 지루해질 수도 있거든.”
“맞아요. 번역이 이상하면 읽기 힘들죠.”
현기혁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수히 많은 외서들이 잘못된 번역으로 묻히는 것을 많이 봐왔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순조롭게 1권 번역이 끝났다. 다음은 2권, 그리고 3권 차례였다.
현기혁 팀장은 자신의 책상에 놓아둔 <더 위자드> 2, 3권 원서를 이유리에게 건넸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박민우 씨 댁으로 이거 택배로 좀 보내. 기다리고 계실 거야.”
“알겠습니다!”
이유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원서를 받아들었다.
* * *
사흘 뒤 오전, 민우는 집에서 택배를 받았다. 아침에 도착한다는 말에 학교에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택배 사원이 내려놓은 상자를 본 민우는 잠시 멍해졌다.
‘무슨 상자가 이렇게나 커?’
각대봉투에 책을 넣어 보내줄 줄 알았는데, 한 아름이나 되는 박스가 도착했다. 민우는 의아함을 느끼며 테이프를 뜯었다.
곧 상자가 열리자 민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라온북스에서 나온 신간들이 열 권 넘게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민우의 관심을 끄는 책도 몇 개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다른 책들도 보내주셨네. 어? 이건 메모잖아?’
맨 상단에 놓인 책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민우는 그것을 떼고 읽기 시작했다.
― 박민우 님! 이유리입니다. <더 위자드> 2, 3권 보내 드리는 김에 다른 책도 같이 보내 드려요. 선물이니 부담 없이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참, 1권은 정말 잘 읽었어요! 앞으로도 민우 님이랑 쭉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파이팅팅! ^▽^
소녀 감성이 묻어난 글씨체였다. 굉장히 귀여웠다. 어느새 민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얼마 전 한성문고에서 우연히 이유리와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원고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좋은 편집자였다.
‘이거 혼나지 않게 정신 차리고 잘해야겠다. 기대한 만큼은 돌려 드려야지.’
포스트잇을 잘 보이는 책상 위에 붙여넣고 책을 정리했다. 일단 증정본으로 받은 책은 책장에 모조리 꽂아 넣었다.
<더 위자드> 2, 3권은 가방에 바로 넣었다. 학교에 가서 초벌로 읽어볼 계획이었다.
민우는 이번에 번역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
‘한번 읽고 번역하는 것과 바로 하는 것엔 차이가 있어.’
시간이 좀 들더라도 독자의 시각에서 책을 뜯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콘셉트를 세운 다음 번역을 시작하면 훨씬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민우는 후속권도 차분히 읽어본 다음 번역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지음사 쪽 단행본 작업도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시간은 민우의 편이었다.
물론,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전에 민 선생님께 연구계획서 확인을 받아야 하긴 하지만.’
이번 겨울에 열리는 현대문학연구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기로 한 민우.
발표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완성된 논문을 학회 사무국에 제출해야 했다. 적어도 11월이 되기 전에 논문을 완성해서 보내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11월 완성까지는 크게 문제가 안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를 바꿔 버렸다.
딸칵―
민우는 컴퓨터를 조작해 어제 완성한 연구계획서를 출력했다. 고작 다섯 장짜리 연구계획서지만,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졌다.
‘까딱하다간 이면지함으로 직행할지도 모르겠는데? 멘탈 단단히 붙잡고 들어가야지.’
원래 민우는 최인훈론을 준비했었다. 1학기 과제로 제출한 것이었는데, 최인훈 소설에 나타난 바다라는 공간을 상징적으로 해석한 논문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하계 학술대회를 경험하며 생각을 바꾸었다.
완성도가 높은 것을 택하는 것보다,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연구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연구 테마를 바꾸었다. 1950년대 실존주의 소설로.
‘랑느 박사님과 만난 게 컸지.’
그와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논문 테마를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거장이 가볍게 던진 화두가 이제 막 학문을 시작한 학생에게 큰 영감을 준 것이다.
곧 프린터가 움직임을 멈췄다.
민우는 출력물을 가지런히 모아 스테이플러로 박았다. 나름 체계적으로 완성된 계획서였지만 그래도 한숨이 나왔다.
‘이 계획대로 논문을 완성할 자신은 있는데 민 선생님을 설득할 자신은 별로 없단 말이지. 그게 문제야.’
그럴 만도 했다.
1950년대 실존주의 소설이라는 테마는 이미 저번 학기에 석사학위 논문계획으로 제출했던 것이었다. 그때 보기 좋게 이면지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상아대로 내려가 서지훈 교수에게 위로를 받기도 했었다.
‘석사 논문이 아니라 일반논문이라는 변수가 있긴 해도 민 선생님이 크게 좋아하시진 않을 텐데…… 아니. 됐어. 까짓것 한번 부딪쳐보자!’
결심을 굳힌 민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가방을 메고 자취방을 나섰다.
* * *
민영환 교수 연구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아니, 그것은 적막이 아니라 폭풍전야와 다를 게 없었다. 연구계획서를 읽는 민영환 교수의 얼굴에 시시각각 먹구름이 끼고 있었으니까.
“박민우.”
“예.”
한숨을 내쉰 민영환 교수가 연구계획서를 테이블로 던졌다.
“하나만 묻자. 이거 전에 내가 안 된다고 한 주제 아니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석사 논문 테마였고, 이번에는 일반논문이라서 제가 써보고 싶은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민우에게도 나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석사 논문을 양보했으니 일반논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이런 의미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씨익 웃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사마귀처럼.
“안 된다고 한 테마는 보통 폐기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넌 그게 문제야. 재환이도, 민식이도, 예진이도 모두 내 말을 들어서 잘되고 있잖아? 왜 굳이 흐름에 역행을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그분들은 그분들이고, 저는 저니까요.”
“뭐라고?”
민우의 한마디에 민영환 교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민우는 조금이긴 하지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마치 그것이 오해라는 듯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그분들에 비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가 관심 있는 분야를 파지 않으면 좋은 논문을 쓸 수가 없습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지면 아프기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드린 말씀입니다.”
“뭐…… 그렇긴 하다만.”
민우는 속으로 웃었다.
그는 민영환 교수를 농락하고 있었다. 사실 ‘저는 저니까요’라는 말은 반항이었다. 뒤에 적당한 핑계를 대니 민 교수는 딱히 질책하지 않았다.
민영환 교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허공으로 뿜어내며 말했다.
“그래도 원안대로 30년대 농민소설로 바꿔라. 이번 겨울에 발표하고, 그걸 토대로 석사 논문을 준비한다면 너에게도 이익일 거야.”
“선생님.”
민우가 진지하게 운을 떼자 민영환 교수가 인상을 쓰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이 계획서로 논문을 쓸 수 없는 이유를 학술적인 관점에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뭐라?”
“저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성장할 수가 없어요. 저는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우가 정론을 내세우자 다리를 꼬고 담배를 피우던 민영환 교수가 혀를 찼다. 곧 그가 다시 연구계획서를 집었다.
잠시 후 그가 지적을 시작했다.
“일단 연구방법론이 구식이라는 게 너무 커. 아주 옛날부터 쓰던 방법론이잖아? 관련 논문도 지나치게 많이 나왔고. 이런 틀로 분석해봐야 새로운 연구라고 할 수가 없지. 학부 졸업논문이라면 몰라도.”
“그렇군요. 역시 연구방법론이…….”
“남이 다 해 놓은 걸 관점만 살짝 비튼다고 좋은 논문이라고 할 수 있나?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일뿐이지. 한마디로 종이 낭비다.”
결국엔 민우의 연구계획서가 이면지함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그것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주까지 다시 계획서를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계획서다운 계획서를 가져와.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닌 거 알잖아.”
“명심하겠습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가 복도 난간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법론이 구식이라고?’
냉정히 생각해보니 민영환 교수의 지적도 일리가 있었다. 안전하게 가려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주 쓴 이론을 가져다 쓴 게 화근이었다.
물론 민영환 교수 특유의 표현 방식이 과격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럼 뭐 간단하네. 구식이라면 새 걸로 바꿔주면 그만이지.’
피식 웃은 민우는 307호로 돌아왔다.
플래너를 꺼내 메모해 두었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프랑스로 가는 국제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