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5. 번역가와 편집자 (2) (85/500)


085. 번역가와 편집자 (2)
2021.08.16.


민우는 브이넥 티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자취방을 나섰다. 간만에 머리에 힘을 줬는데, 오늘은 경한신문과 인터뷰를 하는 날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에 오르니 수빈에게 전화가 왔다.

― 일어났어요?

“벌써 버스 안이야. 늦잠 잘까 봐 전화했어?

― 어제 민식 선배랑 술 마시느라 늦게 들어갔잖아요. 혹시나 했지. 가끔이긴 하지만 오빤 중요할 때 지각하곤 하잖아.

“솔직하지 못하네.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 다 아는데.”

잠시 말이 끊겼다. 핸드폰 너머에서 이수빈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우리 오라버니 요즘 좀 능글맞아진 거 같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더위 먹었다든가.

“그래서 싫어?”

― 아, 아뇨.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민우가 웃었다.

“예쁘게 하고 와. 오늘 사진기자도 따로 온다고 했으니까.”

― 그거 왠지 평소엔 안 예쁘다는 식으로 들리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피식 웃은 민우는 서두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버스가 큰길로 들어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오늘 인터뷰는 307호에서 진행된다. 적당히 책으로 꾸며져 있고, 공간도 넓어서 경한신문 기자들을 그곳으로 불렀다.

어차피 주말이라 307호는 비어 있을 것이다. 비어 있지 않더라도 잠시 양해를 구하면 됐다.

‘개인 연구실이라도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교수들이 뉴스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 언제쯤 연구실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생각의 끝엔 늘 한숨이 따라 나왔다.

‘멀었지. 박사 따고 삼사 년은 보따리장수 노릇 해야 하고. 논문도 빡세게 써야 하고…….’

정신을 차린 민우가 벨을 눌렀다. 어느새 버스가 명인대 안으로 진입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40분 정도가 남았다.

그때 저 앞에서 익숙한 뒤태가 보였다.

전력 질주로 따라잡은 민우가 이수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녀가 돌아서자 민우는 깜짝 놀랐다. 수빈의 몸에서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왜 놀래?”

“아니. 뭔가 좀 많이 달라진 거 같아서.”

“누가 잔소리한 덕에 신경 좀 썼지. 옷도 새 옷 입었고. 사진빨 잘 받아야지. 메이저 일간지면 포털에도 뉴스가 올라갈 거잖아?”

“그렇겠지. 그래서, 연예계에 진출이라도 할 생각이야?”

“기회가 되면 한번 해보는 것도?”

이수빈은 신이 난 모양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문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왠지 민우는 뉴스 댓글에 어떤 게 달릴지 뻔히 보이는 듯했다. 새삼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오늘 그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명인대 여신이었다.

“오빠. 인터뷰 끝나고 약속 있어?”

“딱히 약속은 없는데 다음 주에 민 선생님께 연구계획서 보여드려야 해서 그거 작업을 좀 하려고. 왜 있잖아. 겨울에 발표하기로 한 거. 그거 연구 테마를 바꿀 생각이거든.”

“그렇구나.”

이수빈의 표정에 아쉬움이 살짝 걸렸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이제는 그런 표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이렇게 꾸미고 나왔는데 집으로 바로 간다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이따 종로에 나가서 맛있는 거나 먹자. 청계천도 걷고. 날씨 좋네.”

“응!”

수빈의 표정이 다시 해맑아졌다. 돌발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한 민우는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307호엔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가방에서 <사각 살인>을 꺼내 책장에 꽂아 두었다.

그 모습을 보던 수빈이 말했다.

“그 책 재미있더라. 어제 나도 사서 읽었어.”

“뭐하러 샀어? 나한테 달라고 하지.”

“오빠가 열심히 일해서 만든 책인데 사 봐야지. 인터넷 보니까 평 좋던데? 번역 잘했다는 얘기도 많고. 역시 울 오빠라니까.”

칭찬에 기분이 안 좋을 사람 없다.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민우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민우가 지갑을 꺼냈다. 얼마 전에 새로 만든 명함을 하나 꺼내 수빈에게 건넸다.

하얀 바탕에 심플한 문양이 들어간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번역가 박민우.

학력이나 거창한 수식어는 하나도 없었다.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만 들어있었다.

“와, 오빠 명함도 만들었어?”

“앞으로 이쪽 일 계속하려면 필요할 거 같아서. 매번 연락처 알려주는 것도 일이더라고.”

“그럼 이제 명함 두 개네. 지음사 명함까지 포함해서.”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음사 명함은 거의 쓸 일이 없다. 회사에서 영업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 명함은 앞으로 쓸 일이 많을 거야. 최대한 이름을 많이 알려야 한다.’

돈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민우는 최대한 빨리 번역계에서 주목을 받고 싶었다. 명망 있는 사람에게 좋은 원고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니까.

‘두어 작품 성공시켰다고 좋은 제안이 들어오진 않을 거야. 차근차근 일을 키워봐야지. 최선을 다해서.’

지금은 영한번역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민우는 한영번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상을 못 받아도 상관은 없어. 우리나라의 좋은 작품들이 해외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니까.’

민우는 기대치를 크게 잡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만 집중을 했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언젠가 운이 따라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찍들 왔네?”

그때 문이 열리고 한진섭이 나타났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손에 든 작은 백을 민우에게 건넸다.

“원고 마감했다며? 받아. 단행본 마감 및 번역서 출간 기념 선물이다. 수빈이랑 같이 돈 모아서 샀어.”

“오, 땡큐. 그런데 이건 뭐야?”

“열어보면 알겠지.”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정도 두께의 박스였다. 조금 기다랗다. 민우는 박스를 꺼내 포장지를 뜯었다. 목재 케이스가 나왔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검은색 펜이 상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펜 뚜껑을 열었다. 크롬으로 도금된 날카로운 촉이 보였다. 만년필이었다.

이수빈이 설명했다.

“오빠가 쓰는 만년필 되게 낡아 보이더라. 앞으로는 이걸로 써.”

“고마워.”

그 낡아 보이는 만년필이 실은 엄청난 능력이 있는 만년필이라는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뜻밖의 선물이라 기분이 좋았다.

민우는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손에 쥐어 보았다.

‘느낌이 좋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장을 입은 여자와 카메라를 든 남자였다. 여자 쪽이 일전에 연락했던 박윤지 기자인 듯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에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경한신문에서 나왔습니다. 팀 307호분들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박윤지입니다.”

박윤지가 명함을 꺼냈다. 민우가 먼저 나서 명함을 주고받았다. 지음사 명함이 아니라 일부러 번역용 명함을 건넸다.

‘문화부 소속 기자네. 학술 쪽인가.’

마찬가지로 명함을 살펴보던 박윤지가 살짝 놀랐다.

“어머, 민우 씨는 번역 일도 하시나 봐요?”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기술번역 위주로 하다가 최근에 일반번역을 시작했어요. <사각 살인>이라는 책을 번역했습니다. 지금은 <더 위자드>라는 소설을 번역 중이고요.”

그녀는 문화부 기자다. 적극적으로 번역물에 대해 어필을 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박윤지 기자가 흥미를 보였다.

“국문학 전공이셔서 이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못 했네요. 시간 되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안녕하세요?”

박윤지는 다른 팀원들에게도 명함을 전달했다. 인사를 나누는 사이 민우는 가방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메이저 일간지 인터뷰인 만큼, 화법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만년필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아니, 잠깐만.’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은 이걸로 할까?’

방금 동료들에게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집었다.

그것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만년필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씨익 웃은 민우가 만년필을 안쪽 포켓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일단 앉아서 얘기 나누시죠.”

팀 307호 멤버와 박윤지 기자가 둥그런 테이블에 앉았다. 함께 온 사진기자는 주변을 옮겨 다니며 앵글을 맞췄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들렸다. 베스트 앵글을 찾은 모양이다. 그제야 박윤지가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공모전 1회 대상 수상이라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소감을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상을 탄 것보다 친한 친구들과 같이 뭔가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이쪽으로는 공동연구를 할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그렇군요. 논문을 준비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이번엔 수빈에게 질문이 들어갔다. 이수빈이 살짝 당황했다.

“아, 특별히 어려운 점은…… 처음에 콘셉트를 잡지 못해서 헤맸던 기억은 나네요.”

“한국연구재단에서 공개한 팀 307호의 논문을 읽었는데요. ‘사람다운 것’이라는 콘셉트를 잡으신 것 같은데, 그 과정이 좀 어려웠나 보군요?”

“아무래도 저희들은 뭔가를 깨달을 만큼 학식과 연륜이 깊지 못하니까요.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습니다.”

민우가 대답하자 박윤지 기자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박민우 씨는 무투브에서도 잠깐 인기를 끈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의 강의 내용이 이번 공모전에 영향을 주었나요?”

“어느 정도는요. 저희 팀은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그 해답을 발견하고, 그 콘셉트에 맞게 공모전을 준비한 거지요.”

“잠깐 다른 이야기인데, 저도 그 강연 영상을 봤거든요. 후속 강의는 계획에 없으신지요?”

“있습니다. 이번 겨울에 프로그램을 하나 더 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어요.”

“기대되네요.”

자연스레 민우와 박윤지 기자 둘만 대화를 나누는 형국이 됐다. 이제는 공모전이 아니라 인문학의 위상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그렇게 인터뷰는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자. 이제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겠네요.”

박윤지 기자가 테이블 가운데 둔 녹음기를 정지시켰다. 인터뷰가 모두 끝났다. 양측이 모두 만족할 만한 내용이었다.

“여러분들 덕분에 좋은 소스를 얻었네요.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기사 잘 써주세요. 저희들이 아무리 좋은 논문을 써봐야 별 소용이 없습니다. 언론에서도 인문학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네요.”

민우가 진심을 담아 말했고, 박윤지 기자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추가 인터뷰가 필요할 수도 있는데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오늘 말씀 감사했습니다. 저희들은 이만 가볼게요.”

박윤지 기자와 사진기자가 307호를 나갔다. 수빈과 진섭은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돌렸고, 민우는 웃으며 만년필을 품에서 꺼냈다.

‘이 녀석도 나름 성능이 좋은데?’

민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손 위에서 만년필이 한 바퀴 회전했다.

* * *

라온북스는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갔다. 이유리는 전화와 메일을 번갈아 받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띠링!

그때 기다리던 메일이 도착했다. 유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팀장님. <더 위자드> 1권 번역본 도착했어요!”

“벌써?”

현기혁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서를 건넨 지 5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번역본이 도착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납기일을 한 달로 잡았다. 적어도 열흘 정도로 예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 박민우 씨라면…….’

<사각 살인> 때도 그랬다. 민우는 원고 마감 기한을 일주일로 설정했고, 시간에 맞춰서 완성본을 보냈다. 그것도 완벽한 원고를 말이다.

이유리의 자리로 온 현기혁 팀장이 메일을 확인했다. 확실히 민우가 보낸 게 맞았다.

이유리가 빠르게 손을 놀렸다. 마우스를 클릭해 첨부파일을 서버에 저장해놓고 스케줄표에 리스트를 갱신했다.

“이분 작업 속도가 꽤 빠르신 거 같아요. 전에 <사각 살인> 번역 끝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동시 작업하신 거죠?”

“아니. 원서 넘긴 지 일주일도 안 됐어.”

“일주일이요?”

이유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예전에 함께 작업했던 유명한 번역가들도 이 정도로 빠르게 하진 못했다.

다른 편집팀 직원들도 깜짝 놀랐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현기혁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일반 직원들은 번역 계약이 언제 체결되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때 머리를 짧게 쳐올린 남자가 나섰다. 눈이 작고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편집팀의 우영훈 대리였다.

“팀장님. 요즘 야근 너무 많이 하셔서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번역이 끝날 리가 있나요. 뭔가 착각하신 거 같은데……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고 내일 병원이라도 다녀오십쇼.”

“나 멀쩡해. 정말 일주일도 안 됐어. 정확히는 5일 지났지.”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때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이유리가 물었다.

“혹시 <사각 살인>도 그 정도 속도로 끝내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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