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번역가와 편집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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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번역가와 편집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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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번역가와 편집자 (1)
2021.08.13.
민우는 일부러 안경을 끼지 않고 번역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안경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의 결과물을 비교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벌 번역을 끝낸 다음, 민우는 다시 안경을 쓰고 교차 검증을 했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보완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안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거야. 실력이 향상될 테니까.’
민우는 안경에 의지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의 실력이니까.
민우에게 안경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소모품과 다름이 없었다.
초벌 번역본을 검토할 무렵 전화가 왔다.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이었다. 민우는 열람실을 나가 계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 밤늦게 죄송합니다. 통화 괜찮으시죠?
“물론이죠. 덕분에 좀 쉬네요. 마침 <더 위자드> 작업하고 있었거든요.
― 이런. 얼른 끊어야겠습니다.
현기혁 팀장의 너스레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사무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농담도 할 줄 아나보다.
“전 또 맥주 한잔하자고 하실 줄 알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죠.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시원한 게 땡기네요.”
― 하하하. 오늘은 좀 어려우니 이번 주중에 꼭 가겠습니다.
몇 마디 안부가 오가고 현기혁 팀장이 본론을 꺼냈다.
― 내일 <사각 살인> 판매가 시작됩니다. 한성문고 광화문점에 추천 매대 잡혔고요. 일찍 번역을 끝내주셔서 일정을 당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계약서대로 한 것뿐인데요. 뭘.”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자신이 번역한 소설이 책으로 만들어져 국내 최대 규모의 서점 추천 매대에 올라간다.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서점에 한번 가볼까?’
자신이 직접 창작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번역을 하는 내내 마치 자신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에 김억 선생도 그렇게 말했지. 번역은 창작과 같다고. 제2의 창작.’
민우는 막연히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번역하며 참뜻을 깨달았다. 번역 작업은 창작과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단어의 의미가 정확한지, 문장이 잘 읽히는지, 행간의 분위기가 국내 정서에 통용될 수 있는지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한 편의 번역본이 탄생하는 것이다.
민우가 말했다.
“안 그래도 책 사러 나갈 일 있었는데, 내일 한번 들러봐야겠네요.”
― 저희가 증정본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구매는 하지 마세요.
“제가 책을 한 권이라도 사야 출판사에 좋은 거 아닙니까?”
민우의 농담에 현기혁 팀장이 웃었다.
― 아닙니다. 대신 주변 분들에게 많이 추천 좀 해 주세요. 저희 출판사에서도 기대를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마케팅도 빵빵하게 들어가고 있고요.
“당연히 그래야죠.”
― 참, <더 위자드>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재촉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말이 나온 김에 한번 여쭙고 싶어서 말입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일에 맞춰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민우 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더 위자드> 나머지 원서는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미리 받아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 준비되는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가능할 거 같습니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곧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경을 쓰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 * *
다음 날, 수업을 마친 민우는 바로 인문관을 나섰다. 같이 나오던 이수빈이 물었다.
“오늘 어디 가? 서두르는 느낌이네.”
“잠깐 한성문고 들렀다가 지음사 가려고.”
“오늘 출간일이구나? 깜빡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전국 서점에서 <사각 살인> 판매된다. 이수빈이 민우의 손을 잡으며 격려했다.
“고생 많았어요. 잘됐음 좋겠네.”
“잘될 거야.”
“<더 위저드>였나? 그거 작업은 다 끝났어?”
“검토까지 다 끝냈지. 이제 보내기만 하면 돼.”
“진짜 빠르다…….”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이수빈의 모습에, 민우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이수빈이 말했다.
“오빠. 저녁에 지음사로 갈게. 같이 저녁 먹자. 응?”
“오케이.”
그녀와 헤어진 민우는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핸드폰으로 <사각 살인> 서평을 검색해 보았다.
‘아직 이른가? 하나도 안 떴네.’
곧 지하철이 광화문역에 섰다. 민우는 역사에 연결된 한성문고 입구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라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한가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민우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소설 쪽 서가에 있겠지?’
자주 와본 곳이기에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서가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민우가 기대감을 품으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소설 신간 추천 코너가 눈에 보였다. 작은 매대 위에 <사각 살인>이 수십 권 놓여 있었다. 그럴싸한 카피가 적힌 패널이 보였다.
― 은밀한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대담한 연쇄살인사건. 지금 추리하라!
민우가 책을 쥐었다. 책 표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자 이름 옆에 ‘박민우 옮김’이라는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책을 낸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가슴이 설렜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달이면 최민식과 공저한 단행본이 출간될 것이다. 왠지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아, 맞다. 프로필. 확인해 봐야지.’
민우는 책날개 면을 살폈다. 안쪽에 작가와 번역가의 약력이 적혀 있었다.
민우의 프로필은 간단했다.
― 책을 좋아하는 커피중독자
딱 한 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라인북스에서 자신의 요구를 받아준 모양이었다.
그들은 학력과 경력을 넣는 게 좋다고 말했지만, 민우는 그러지 않았다. 적어도 번역에 있어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얼마나 번역을 잘했는가가 중요하지. 결과물로 평가를 받아야 해.’
‘역시 명인대 출신은 다르다’는 소리를 경계했다. 그것은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학교의 후광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민우는 천천히 책을 둘러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인쇄는 깨끗하게 잘됐네. 종이 질도 좋고. 신경을 많이 쓰셨구나.’
민우가 첫 페이지를 넘길 무렵 누군가 매대에 다가왔다. 호기심에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여자가 책을 집어 들었다.
민우는 한쪽에 서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연 살까 말까, 궁금증이 들었다.
그때 여자가 민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알아본 것 같은 태도였다. 민우는 혹시 아는 사람인가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기억에 없었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박민우 님 아니세요?”
“예. 맞는데요.”
“어머! 신기하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안녕하세요!”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민우는 혹시 자신의 강연 동영상을 본 사람이 아닌가 싶어 얼떨결에 같이 인사했다.
인상이 좋은 여자였다. 활달하고, 무엇보다도 웃는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다.
“저 누군지 모르시죠? 사무실에서 잠깐 지나가시는 거 봤거든요. 아마 저 못 보셨을 거 같은데.”
사무실?
민우가 물음표를 떠올릴 때 여자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민우가 ‘아’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라온북스 편집자님이셨구나. 반가워요. 이런 데서 다 뵙네요.”
그녀는 라온북스 편집팀 이유리였다. 책을 가슴에 끌어안은 그녀가 생긋 웃었다.
“작가님들은 서점에서 가끔 마주치는데 번역가님을 만난 건 처음이에요. <사각 살인> 때문에 오신 거예요?”
“겸사겸사요. 아무래도 좀 신경도 쓰이고. 잘 팔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번역 일은 처음 하는 거라서.”
“아, 처음이셨구나.”
사실 매절 계약을 한 상태라 판매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민우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인 이익이다.
책이 잘 팔리고 평가가 좋게 난다면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민우가 기대하는 것은 무형의 이익, 즉 유명세였다.
이유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눈매가 달처럼 휘었다.
“번역을 워낙 잘해 주셔서 기대 많이 하고 있어요. 입소문 나면 많이 팔릴 거예요. 제 감은 틀리는 법이 없거든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어떤 청년이 매대로 다가왔다.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그 청년을 주목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책을 집어 훑어본 청년은 마음에 들었는지 손에 쥐고 그곳을 떠났다. 책이 팔리는 걸 직접 보니 기분이 짜릿했다.
“신간 나올 때마다 여기에 오는데, 정말 즐거워요.”
“신간 나올 때마다요? 일산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거리도 멀 텐데.”
“이것도 일이거든요. 책상에 앉아만 있으면 독자와 소통을 할 수 없어요. 이렇게 현장에 나와서 사람들도 보고 책도 보고 해야 느낌이 와요. 아, 이건 잘 팔리겠다. 아, 이건 좀 부족하겠네. 아쉽다. 다음엔 더 잘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요.”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책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분야는 살짝 다르지만 동질감을 느낀 민우는 그녀에게 제안했다.
“저 커피 사서 돌아갈 생각인데, 편집자님 것도 하나 사드릴게요. 같이 가시죠.”
“정말요? 커피라면 사양하기 어렵죠.”
그렇게 두 사람은 서점 안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커피를 하나씩 들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 * *
<사각 살인>이 출간된 지 나흘이 지났다.
지음사 인문사회연구실을 지키고 있던 민우는 슬슬 검색을 해 보기로 했다.
‘반응이 올라올 때가 됐지?’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민우는 자신의 작업물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궁금했다.
특히나 해외 도서는 독자들이 번역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다. 읽기 힘들다, 번역이 엉망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한다.
‘일단 한성문고 온라인 샵을 확인해 보자. 그쪽 리뷰가 활발하니까.’
민우는 한성문고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검색어에 <사각 살인>을 입력했다. 별점, 리뷰수, 추천수와 순위가 떴다. 민우는 책을 클릭해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별점이 4.5점. 나쁘지 않네. 리뷰는 네 건. 주간순위는 78위구나.’
민우는 맨 처음 작성된 리뷰를 클릭했다. 간단한 소감만 적은 것도 있었고, 장문의 감상문도 있었다. 민우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집중해 읽었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네 개의 리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잘된 번역.
작품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평이했지만, 읽기 쉬운 문장과 해설이 돋보인다는 평가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신이 난 민우는 키보드를 두드려 다른 인터넷 문고 사이트에 접속했다.
여기에도 리뷰가 세 건 있었다. 모두 평가가 좋았고, 어떤 리뷰에는 번역가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내용이 있기도 했다.
― 해외 미스터리 마니아라 전문 번역가들을 다 꿰고 있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사각 살인>은 처음 보는 번역가의 작품이라 손이 선뜻 가진 않았지요. 그런데 예상외로 잘 읽히더군요…….
그 대목에서 민우는 확신을 얻었다. 오른손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평가가 좋아. 이 정도면 성공이야!’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반응이 좋지 않으면 어쩌나, 혹은 번역이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나 하는.
하지만 이로써 모든 걱정을 불식시킬 수 있게 되었다.
며칠 더 지켜보며 반응을 봐야겠지만, 대체적으로 평은 오늘 봤던 것과 비슷할 것 같았다.
‘이제 <더 위자드> 차례인가?’
민우는 메일 창을 열고 이유리 편집자의 주소를 입력했다. 그리고 작업 완료한 파일을 첨부해 메일 발송 버튼을 클릭했다.
‘아마 깜짝 놀라시겠지? 5일 만에 보내는 거니까.’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민우가 핸드폰을 집었다. 최민식에게서 온 전화였다. 드디어 때가 온 걸까. 민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형.”
― 원고 마감쳤다.
그 한마디에 민우는 소름이 돋았다. 드디어 <신화와 인간 :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의 원고 작업이 모두 마무리된 것이다.
민우는 이미 며칠 전에 자신의 파트를 끝냈다. 하지만 최종 검수가 남았고, 그것을 최민식이 진행했다. 그리고 오늘 작업이 모두 끝났다.
― 수고했다. 박민우.
“형도 정말 애쓰셨습니다. 낙제생 데리고 단행본 쓰는 거 쉽지 않으셨을 텐데. 고생하셨어요.”
― 그러게 말이다. 이제야 너도 사람 구실을 하게 됐네.
민우는 씨익 웃었다. 이제는 논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두가 최민식의 지도 덕분이었다.
― 학교냐?
“아뇨. 지음사에 와 있어요.”
― 내일 연구실에 들러. 술 한잔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들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앞을 가로막던 높은 벽을 드디어 뛰어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