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The Wizar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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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The Wizar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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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The Wizard (2)
2021.08.12.
경한신문은 메이저 일간지 중 하나였다. 유서 깊은 것은 물론, 규모로도 국내에서 세 번째 손가락 안에 드는 언론사였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먼저 수상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대상 수상하신 거 있죠. 그거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하신지 여쭤보려고 연락 드렸어요.
인터뷰 요청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 첫 요청이 경한신문에서 올 줄은 몰랐다.
민우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인터뷰인지 알고 싶은데요.”
― 저희가 인문학 관련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본선에서 발표하신 내용도 듣고 싶고요. 논문도 저희가 인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싶어서요.
민우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그건 제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팀원들하고 상의해보고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 그럼요.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해맑은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인터뷰라는 말 때문인지 팀원들이 모두 수저질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가 설명했다.
“경한신문에서 인터뷰 제안이 왔어. 인문학 관련 기획 기사를 쓰고 있는데 자료가 필요한가 봐. 어떻게 할래?”
“오, 경한신문급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크. 이거 사진빨 좀 받으려면 미용실 다녀와야겠네.”
“저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이대로 묻히는 건 아깝잖아요.”
공모전에 함께한 진섭과 수빈이 각각 의견을 표했다. 다들 기대를 했는데 큰 이슈가 되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번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은 보도자료와 시상식 사진이 나간 것이 전부였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공명심 때문이 아니었다. 팀원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알았어. 시간은 언제가 괜찮아? 아무래도 주말이 나으려나.”
“이번 주 토요일 괜찮은데, 섭 오빠는요?”
“나도 콜.”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박윤지 기자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곧 답장이 왔다. 이번 주 토요일 경한신문과 인터뷰가 성사됐다.
“오후 두 시에 307호에서 모이면 될 거 같다. 기자들이 이쪽으로 온댄다.”
“준비 잘해야겠어요.”
이수빈이 진지하게 말했다. 메이저 신문에서 인터뷰하는 건 처음. 크게 떨리지는 않겠지만 제대로 준비할 필요는 있었다.
민우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다들 발표문 한 번씩 훑어보는 게 좋겠어. 내가 발표했다고 해서 나 혼자 얘기하진 않을 거니 참고들 하시고.”
“알았다.”
그때 속도가 제일 느린 주예린이 식사를 마쳤다. 네 사람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계단을 내려오며 민우가 말했다.
“주예린. 잠깐 나 좀 보자.”
“벌써 부려먹으려고요?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습니다.”
“오버하지 말고. 잠깐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래.”
“넹.”
민우와 예린이 먼저 학생회관을 나갔다. 이수빈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그때 뒤에서 진섭이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녜요. 오빠는 어디 가요?”
“도서관. 이따 수업 준비해야지. 넌?”
“전 인문관에 가려고요. 설예라 선생님 연구실에 가봐야 해서요.”
“그래? 그럼 나 먼저 간다. 수고.”
진섭이 도서관 쪽으로 움직이자 이수빈 혼자 우두커니 남았다.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펼쳐졌다.
요즘 들어 민우가 다른 여자들과 어울리면 이유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 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오빠한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도 좀 그렇고.’
사귀기 전부터 이어오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으라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주예린의 입학이 방아쇠가 되었다.
민우는 학부 때부터 그녀와 관계를 이어왔다. 같은 전공인 데다가 동아리 생활도 함께했다. 자신보다 함께한 시간이 서너 배는 많았다.
물론 머리로는 잘 안다. 민우가 그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한진섭과 잘 이어주려고 하는 것을 보면 금방 답이 나오는 일이다.
하지만 가슴이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지금처럼 말이다.
‘전화해 볼까?’
이수빈이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리던 바로 그때.
까톡!
깜짝 놀란 그녀가 발신인을 확인했다. 민우에게 온 톡이었다.
― 아까 소설 이야기 나온 거 때문에 예린이 따로 부른 거야. 미리 얘기 못 해서 미안.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그에게 답장했다.
‘오빠도 나름 신경 써주고 있었구나.’
작은 오해가 풀렸다.
얼마 전 맞춘 커플링을 만지작거렸다. 곧, 나쁜 생각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수빈의 발랄한 걸음이 인문관으로 향했다.
* * *
민우와 예린은 학생회관 뒤편에 위치한 벤치에 앉았다. 그늘져 있어 시원했다.
“아. 덥다. 너무 더워서 시원한 게 격하게 먹고 싶다아.”
“시끄러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민우는 자판기 앞에 섰다. 때마침 주예린이 좋아하는 홍차 음료가 눈에 보였다.
캔커피와 홍차 음료를 하나씩 뽑아 돌아왔다. 민우가 홍차 음료를 건네자 주예린이 반색했다.
“우와, 저 이거 좋아하는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요?”
“뭐 그 정도야.”
“오빠. 솔직히 말해 봐요. 저한테 관심 있죠?”
“이 자식이!”
인상을 쓴 민우가 홍차 음료를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주예린은 두 손으로 움켜쥐며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줬다가 뺏는 게 세상에서 제일 나쁜 거랬어요!”
“남의 호의를 그렇게 받아들이면 뺏겨도 싸!”
그렇게 한참을 투덕거린 두 사람은 결국 지쳐 벤치에 늘어졌다. 학부 때 늘 하던 장난이었다.
“앞으로 그런 장난은 치지 마. 여긴 상아대가 아니다. 수빈이가 보면 오해할라.”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구요.”
민우가 힘을 풀었다. 홍차 음료를 다시 빼앗은 주예린이 캔을 따고 꿀꺽꿀꺽 마셨다. 목이 많이 말랐던 모양이다.
민우가 은근슬쩍 지나가듯 물었다.
“학교는 다닐 만하냐?”
“즐거워요. 아직은. 어제 설예라 선생님 연구실에 찾아갔는데 상냥하셔서 너무 좋았어요. 이 기세로 지도교수 신청해 버리려고요.”
“선생님이 해 주시겠대?”
주예린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예전에 큰산대학문학상 받은 소설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얘기가 빨랐어요. 그래도 좀 걱정하긴 하시더라구요.”
“왜?”
“소설 쓰던 사람이 평론으로 전향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고 하셔서.”
“케바케겠지. 평론도 좋은 문장이 필요하니까 소설 쓰던 경험이 도움이 될 거야.”
잠시 말이 끊겼다. 음료수를 홀짝이던 주예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민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 하려고 으슥한 곳으로 절 납치한 거예요?”
“뭐가 으슥하냐. 주변에 사람들 천지구만. 하여간.”
혀를 한 번 찬 민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까 점심을 먹을 때 우연히 나왔던 소설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너 요즘도 글 안 써?”
음료수를 마시던 주예린이 멈칫했다.
그녀는 캔을 두 손으로 모아 쥐었다. 발아래 있던 돌멩이 하나를 툭 찼다. 데구르르. 돌멩이가 자판기 앞까지 굴러갔다.
그제야 주예린이 입을 열었다.
“한수영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글이라면 이제 안 써요.”
“그럼 다른 글은 계속 쓴다는 말?”
주예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어려서부터 장르 소설을 즐겨 써왔다. 국문과에 입학하고 나서 순문학으로 잠시 전향했는데, 그때 한수영 교수에게 지도를 받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큰산대학문학상은 그 권위만큼 장래가 보장되는 상이었다. 재능도 있었다. 지금처럼만 쭉 쓴다면 성공할 거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억눌러왔던 장르 소설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장르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고, 지도를 받던 한수영 교수에게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쓴다며 맹비난을 당해야 했다.
그게 큰 상처가 됐다. 비가 오는 날 펑펑 울었던 게 바로 한수영 교수와 연이 끊긴 날이었다.
“한 선생님이 좀 심하긴 했지. 좋게 얘기할 수도 있는 건데.”
“뭐, 이해해요. 순문학 하시는 분들은 그쪽으론 대개 예민하니까. 제가 미리 말씀 안 드린 것도 있고요.”
한수영 교수 입장에서 보면 그랬다. 문단에서 촉망받는 제자가 어느 날 장르 소설을 써서 들고 간다면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시대가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지만 문단의 선입견은 여전하다. 많은 소설가와 비평가들이 장르 소설을 질 낮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중에도 분명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것도 그냥 문학이라는 엄격한 잣대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봐주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아쉬운 부분이지. 그래도 시장이 커진 만큼 사람들의 인식도 점차 달라질 거야. 좋은 작품만 꾸준히 나와 준다면.”
주예린이 미소를 지었다. 늘 같은 말로 위로를 받는데도 기분은 좋았다.
민우가 물었다.
“글 쓰고 있다면 연재는 하고 있는 거야? 섭섭이한테 들었는데 요즘은 연재가 유행이라며.”
“준비는 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제목도 안 정했고. 그냥 줄거리만 간단히 써 놨어요.”
“출판사는?”
주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표정을 보니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민우가 말했다.
“가볍게 취미생활 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시장도 좋잖아. 내가 한창 읽었을 때는 암울하다는 얘기 많이 들렸었는데.”
“확실히 종이책 시장에서 전자책 시장으로 바뀌어서 허들이 낮아지긴 했어요. 요즘은 유료연재도 많이들 하니까. 잘만 쓰면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겠죠.”
“말이 쉽지. 잘 쓰는 게 얼마나 어렵냐.”
당연한 이야기라 주예린은 웃어넘겼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민우가 가방에서 <더 위자드> 책을 꺼냈다. 민우는 그 책을 주예린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어? 이거.”
그녀는 대번에 알아보았다.
“요즘 미국에서 한창 뜨고 있는 판타지잖아요? 곧 정발된다는 소문이 돌던데. 오빠도 이거 읽어요?”
“독자로서 읽는 건 아니고, 이번에 기회가 돼서 번역하게 됐어.”
“엥? 오빠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우를 바라보던 주예린. 영어 졸업요건을 채우지 못해서 고생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그는 달라졌다. 이수빈이 자랑했듯이 민우는 해외 학술논문을 번역할 정도로 외국어를 능숙하게 했다.
의심이 가는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실력이 늘었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언제부터 번역 일했어요?”
“얼마 안 됐어. 이거 하기 전에 <사각 살인>이라는 책 작업했고. 두 번째 소설이다.”
“와. 짱 부럽다! 영어 잘하면 이런 거 술술 읽을 수 있겠네요.”
일감 자랑을 하려고 책을 꺼낸 건 아니었다. 민우는 주예린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근사한 거 하나 쓰기만 해. 내가 기가 막히게 번역해 줄 테니까. 해외에서 크게 한번 놀아보자고.”
“진짜요?”
“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주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허당인 면도 있지만, 누구보다도 약속을 잘 지키는 게 바로 박민우라는 사람이었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어렵다.
출판을 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첫 문장을 쓸 용기를 얻었다. 민우 덕분에.
“그럼 힘내서 써볼게요.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
“알았으니까, 뭐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고.”
“얍!”
주예린이 기운을 되찾았다. 손을 흔들며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선배 노릇 하기 쉽지 않구나…….”
민우는 벤치에 몸을 기댔다. 그래도 보람은 충분했다. 걱정한 것보다 그녀의 상처는 잘 아물고 있는 것 같았다.
“한고비 넘겼으니 이제 내 일을 해야지.”
벤치에 앉아 <더 위자드>를 펼쳤다. 환상적인 마법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민우는 한동안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노을이 질 무렵 민우가 책을 덮었다.
안경을 끼지 않아도 술술 읽혔다. 소싯적 장르 소설을 즐겨 읽었던 게 도움이 많이 됐다.
잠시 독자의 입장에서 읽어보니 대충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다 하는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제 됐어. 슬슬 시작해 볼까?”
민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날 밤, <더 위자드> 1권의 초벌 번역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