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2. The Wizard (1) (82/500)


082. The Wizard (1)
2021.08.09.


< The Wizard >.

현기혁 팀장이 꺼낸 책의 제목이었다.

“이 책은 뭔가요?”

“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아직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반지의 대왕> 아시죠? 그 작품의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현기혁 팀장이 침이 튈 정도로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자연스레 귀가 솔깃해졌다.

민우도 학창시절에 장르 소설을 꽤 읽었다. 그것에 관심이 없어도 <반지의 대왕>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임은 물론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작품의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의 판권을 중소규모 출판사에서 따왔다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민우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네요. 읽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는데 대강 어떤 소설입니까?”

“요즘 보기 드문 정통판타지입니다. 마법을 전해주는 신비한 돌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죠.”

“잠시 읽어봐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민우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 프롤로그에 신비한 돌에 대한 짧은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이어 첫 장면이 시작됐다.

흥미로운 전개가 이어졌다.

민우는 맥주를 홀짝이며 한동안 독서에 집중했다.

‘문체가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번역하기 조금 까다롭겠는데?’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는 단조로움을 줄 수 있어 오히려 번역이 어려운 편이다.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 다시 말해 리듬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우에게 언어의 장벽은 통하지 않았다.

‘굳이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어. 복문을 섞어가면서 리듬을 주면 읽기에 나쁘지 않을 거야.’

조금 더 읽은 민우는 대충 감을 잡았다. 이 정도면 안경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번역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민우가 책을 덮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현기혁 팀장이 몸을 더욱 가까이하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적으로는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는데…… 그래도 번역은 크게 어렵지 않을 거 같네요. 대강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현기혁 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용보다는 번역 부분에서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판권은 어떻게 따신 겁니까? 이쪽 업계는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는 소설이라면 꽤 어렵지 않나요?”

“북미 현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전에 움직인 게 컸습니다. 며칠만 더 늦었더라도 어려운 조건으로 계약을 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였다. 운이 찾아온 이유는 곧 밝혀졌다. 현기혁 팀장은 북미 현지에 모니터링 요원이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시장에 관심이 많나 보네요.”

“국내 출판 시장으로는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회사를 키우려면 해외 시장을 공략해야 하지요. 그래서 모니터링 요원을 두고 있습니다.”

민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북스에 대한 인식이 더 좋아졌다. 해외 시장에 대한 비전을 듣다 보니 생각보다 내실 있는 출판사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민우는 라온북스를 잘 이용하면 더욱 쉽게 해외 무대로 진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용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윈윈(win―win).

호혜적 관계에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민우는 번역으로, 라온북스는 매출 상승으로.

“이 소설 말인데요. 2차 창작 계획이 잡혀 있나요? 대개 유명한 작품들은 영화나 만화로도 만들어지잖아요. <반지의 대왕>처럼.”

“아직입니다. 하지만 북미 현지의 반응을 생각해 본다면 곧 관련 사업이 진행될 거라고 봅니다. 영화 제작은 당연히 들어갈 거고.”

특히 영화화가 중요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원작 소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민우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판촉은 출판사 직원들이 나서야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번역한 상품이 잘 팔린다면 커리어를 쌓는 데 수월할 테지만 말이다.

‘분위기를 보니 나한테 번역을 맡기고 싶어 하시는 거 같은데.’

민우는 테이블에 놓인 <더 위자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각 살인>의 계약은 얌전하게 했다. 업계에서 처음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고, 라온북스에서 내건 조건이 나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부탁하는 게 아니라 부탁받는 입장에 서 있잖아.’

단 한 번 만에 기회를 잡은 게 좀 의외이긴 했지만, 민우는 마음을 굳혔다.

“팀장님께서는 이 소설의 번역을 제게 맡기고 싶으신 거죠?”

“예. <사각 살인> 번역본을 보니 감이 딱 오더군요. 박민우 씨는, 아니 박 선생님은 번역에 탁월한 재능이 있으십니다. 부디 그 재능을 <더 위자드>에도 써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팀장님. 저한테 선생님이라고 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민우가 겸손을 부렸다. 결국, 호칭은 다시 ‘박민우 씨’로 정리가 되었다.

“실은 번역가 김태현 씨에게 의뢰할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박민우 씨라면 더 훌륭하게 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현기혁 팀장은 나름 계산기를 두드렸다.

김태현에게 의뢰를 맡기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무엇보다도 번역비 책정이 쉽지가 않다. 15년이 넘는 경력자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 민우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현기혁 팀장이 모험을 결심할 정도로.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던 민우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번역 맡겠습니다. 하지만 계약조건은 저번하고 좀 다르게 하고 싶네요.”

“저희가 사정이 그렇게 여유로운 편은 아니지만 민우 씨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현기혁 팀장이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안에 들어 있는 인쇄물은 번역 관련 계약서였다.

“일단 제가 미리 작성해 온 계약서 초안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율해 보겠습니다.”

“그러죠.”

민우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큰 틀에서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역시 핵심은 번역비와 납기일이었다.

‘내가 전에 했던 계약은 매절 계약이었지. 이번에는 인세 계약으로 해볼까?’

이쪽으로 커리어를 쌓기로 했으니 다양한 방식을 경험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가 모르는 척 물었다.

“인세 계약으로 할 경우 보통 몇 퍼센트로 책정이 됩니까?”

“제작비에 따라 다릅니다만, 대개는 5퍼센트 내외입니다.”

“5퍼센트요.”

민우가 미리 알아본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번역 쪽에서는 인세 계약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었다. 오히려 매절 계약보다 돈을 더 적게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민우는 인세 계약을 하기로 했다.

“번역비 부분을 매절이 아니라 인세 계약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수익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이 책, 뭔가 느낌이 좋아서요. 많이 팔릴 거 같아요.”

현기혁 팀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마케팅 쪽으로 지원만 잘 받으면 충분히 국내 시장에서도 통할 작품이었다.

“인세는 5퍼센트로 잡는 게 일반적입니다만, 제가 특별히 부탁드리는 거니 6퍼센트로 책정을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초판 발행부수는 몇 부 정도 되죠?”

“국내도서는 많으면 3천, 요즘은 보통 2천 부 정도 찍습니다. <더 위자드>는 해외서이기도 하고 마케팅에도 신경을 쓸 거라 5천 부 예상하고 있습니다.”

“증쇄할 경우에도 인세가 들어오게 되는 거죠?”

고개를 끄덕인 현기혁 팀장이 계약서 한 부분을 펜으로 짚었다.

“이쪽 조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이시죠?”

“그러네요. 잠시만요.”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계산기를 틀었다. 정가를 16000원 정도로 잡았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은 480만 원이다.

1부가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모두 번역을 한다면 1440만 원을 손에 쥐게 된다.

매절 계약으로 한다면 이보다 조금 더 많이 받을 수 있겠지만 민우는 미련을 버렸다.

“알겠습니다. 계약할게요.”

“그럼 인세 적겠습니다.”

현기혁 팀장이 펜을 움직였다. 계약서 빈칸에 숫자 6이 들어갔다. 정가의 6퍼센트를 인세로 받게 되었고, 발행 부수는 5천 부로 확정됐다.

다음으로 원고 납기일 설정이 남았다.

“<사각 살인>은 단권이라서 금방 마무리를 하셨을 텐데, <더 위자드>는 3권이 1부 완결입니다. 권당 볼륨도 좀 있는 편이고. 이 부분은 민우 씨가 원하시는 방향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한 달이면 될 거 같네요.”

“한 달이요?”

현기혁 팀장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일이다. 그가 웃으며 납기일란에 ‘계약 후 1개월’이라는 글을 적었다.

민우가 한 달로 시간을 끈 이유는 단행본 출간 때문이었다. 원고 마감일까지 약 일주일 정도가 남았다.

‘그때까지는 원고 작업에 몰두해야지. 번역은 그다음에 하고.’

곧 계약서 작성이 마무리됐다.

현기혁 팀장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더 위자드> 1권을 민우에게 건넸다.

“일단 1권 먼저 드리겠습니다. 나머지 2권하고 3권은 택배로 보내드리지요. 계약서에 적힌 주소로 보내드리면 되겠습니까?”

“네. 그쪽으로 부탁드립니다.”

비즈니스는 그것으로 끝났다.

빈 맥주잔이 수십 번 채워지며 사담이 오갔다. 자정이 넘어서야 민우와 현기혁 팀장은 굳게 악수를 하고 술집을 나섰다.

* * *

다음 날 오후. 팀 307호 멤버들이 모여 함께 점심을 먹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늘 이렇게 넷이 모여 식사를 같이한다.

자리 배치도 늘 똑같았다. 민우는 수빈이와 앉았고, 진섭이는 예린이와 앉았다.

그러다 보니 민우와 주예린이 마주 앉게 됐다.

“주예린. 너 요즘 한가하지?”

“아아뇨. 밥 먹고 나서부터 무척 바빠질 예정인데요.”

주예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나 단행본 작업 거의 다 끝나서 원고 검수를 해야 하는데 부탁할 사람이 마땅찮네. 내가 쓴 원고라 오탈자가 잘 안 보여서 말이다.”

그렇게 말한 민우는 주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풉! 콜록콜록.”

주예린이 떠먹던 국을 뿜었다. 한참이나 기침을 했고, 옆에 있던 진섭이 휴지를 챙겨주었다.

“여, 여러분은 지금 후배 착취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착취가 아니라 품앗이라고 해 줄래? 3년 전이었나. 큰산대학문학상 수상집에 실릴 원고 교정 봐준 게 누구였더라?”

약점을 잡힌 주예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민우가 씨익 웃었다.

“분량 얼마 안 되니 좀 부탁하자. 응?”

“알았어요. 칫.”

주예린이 밥을 뒤적이며 구시렁댔다. 그때 한진섭이 물었다.

“큰산대학문학상 수상집이라니? 그건 또 뭔 소리냐?”

“말 안 했나? 예린이 3년 전에 거기서 상 타서 등단했거든. 소설 부문.”

“뭐?”

한진섭은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큰산대학문학상은 국내 대학 및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매년 개최되는 권위 있는 문학상이었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예린은 제11회 큰산대학문학상을 차지해 등단했다. 그때 수상한 작품의 이름은 <방랑자들>로, 평론가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놀란 것은 이수빈도 마찬가지였다.

“큰산대학문학상이라면 메이저 문학상이잖아. 왜 얘기 안 했니?”

“딱히 자랑할 만한 건 아니니까.”

주예린이 무심하게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랑을 할 만도 한데, 별로 얘기하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다.

수빈은 문득 예전에 주예린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 술을 마시고 나오면서 민우에게 이렇게 들었다. 문학 특기자로 상아대에 입학했는데, 창작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그것을 눈치챈 민우가 화제를 살짝 돌렸다.

“내가 괜히 예린이 우리 팀에 집어넣은 게 아니야. 앞으로 써먹을 일이 많을 거다. 문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쓰니까. 편집도 교정도 잘하고. 만능 일꾼이지.”

“일꾼은 일당이라도 받지…….”

주예린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와 오래도록 함께해 왔던 민우는 그 표정 너머에 있는 우울을 읽었다.

‘역시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보네. 하긴, 쉽게 잊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비가 오는 날이었나.

펑펑 울며 하소연을 하던 주예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민우가 한마디 하려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진동이 느껴졌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박민우 씨 핸드폰이죠?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 아,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경한신문’ 기자 박윤지라고 하는데요. 혹시 통화 괜찮으실까요?

경한신문?

민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16557829984677.jpg

1655782998468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