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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번역계의 신성 (3) (81/500)


081. 번역계의 신성 (3)
2021.08.06.


“지금 임원 회의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렇게 운을 뗀 송승현 실장이 웃었다. 회사 안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그녀가 웃을 만한 일이 무엇이 있나 생각했다.

답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일이 잘 풀린 거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픈 라이브러리,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생겼어요.”

대상을 차지한 이후로 줄곧 기다리고 있었던 소식이었다. 민우도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실장님.”

“아직 축하를 받을 만한 단계는 아니에요. 조건부로 사업 폐쇄가 철회된 것뿐이라서.”

송승현 실장은 팀 307호의 대상 소식을 들고 임원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약 두 시간에 걸쳐 임원들을 설득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폐쇄 예정이었던 오픈 라이브러리는 정부 지원사업에 선정된다는 조건하에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뿐이 아니었다. 팀 307호에서 제시한 튜토리얼 모드에 대한 개발까지 승인받았다.

민우가 대상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부에서 출자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설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송승현 실장이 계속 설명했다.

“조만간 한국연구재단에서 프로젝트 진행 업체를 선정하려는 모양이던데, 출판기획실에서 책임지고 사업 신청을 할 거예요.”

“실장님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승률이 굉장히 높았다.

민우가 발표한 오픈 라이브러리는 지음사에서 사용하던 모델을 변형한 것이다. 개발 계획만 제대로 세운다면 프로젝트를 수주할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양지차다. 지음사는 어떤 업체보다도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은 더 없을까요?”

“아직은요. 팀 307호도 실제 사업 진행에 관여한다고 했지요?”

“그렇긴 한데 아쉽게도 업체 선정에는 참여할 수 없어요. 할 수 있다면 지음사 쪽에 무게를 실어주고 싶은데. 업체 선정 후에 파트너로서 같이 일하게 될 거 같습니다.”

송승현 실장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조금의 아쉬움도 없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프로젝트 수주가 확정되고 나서 도움을 받도록 하지요. 우선 계획을 수립하고 사업권을 따내는 게 먼저니까.”

“오늘 들은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표를 쓰겠다는 건 옛말이었다. 강단이 보였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 수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일전에 민우 씨가 그랬죠?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더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실은 그거 나한테 한 얘기죠?”

“죄송합니다.”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마웠어요. 오히려.”

“주제넘게 말씀드린 건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솔직해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먼 후배의 직언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은 나쁘지 않더군요.”

‘먼 후배’라는 표현이 민우를 감동시켰다. 그녀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재환도, 최민식도, 강예진도 자신을 후배로 인정해 주었다. 이제는 송승현 실장까지.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콘텐츠개발실장님이 고맙다는 말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같이 근사한 곳에서 식사 한번 해요. 다음 주 중에.”

“미리 말씀 주시면 시간 비워 놓겠습니다.”

“그래요. 아무튼 민우 씨. 이번 일.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송승현 실장이 연구실을 나섰다. 민우는 보람찬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왠지 오늘은 원고가 더 잘 써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일산에 위치한 라온북스의 사무실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갔다.

최근 출간하는 작품의 수가 늘어나며 과부하가 걸렸다. 그래도 매출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어 직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네. 라온북스 편집팀입니다!”

입사 2년 차 이유리가 활기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안경을 낀 모습이 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예. 표지 시안 완성됐다고요? 알겠습니다. 메일 확인해 볼게요. 예.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메일을 클릭했다. 디자인 외주 업체에서 온 표지가 들어 있었다.

안경 너머로 반짝거리는 눈이 한참이나 표지에 머물러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조화된 배경에 창문이 들어가 있었다. 범인의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는 클래식한 표지였다.

<사각 살인>의 표지 시안이었다. 곧 이유리의 고개가 팀장 자리로 돌아갔다.

“팀장님? <사각 살인> 표지 시안 나왔는데요. 지금 포워딩해 드렸는데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어, 잠깐만.”

전화를 끊고 현기혁 팀장이 메일함을 열었다. 이유리가 포워딩한 메일이 맨 위에 있었다. 클릭하고 표지를 확인했다.

“으음, 이번 버전은 꽤 느낌이 괜찮은데. 유리 씨는 어때?”

“완전 좋아요! 뭔가 미스테리하면서도 음산한 느낌을 주는 게 작품 분위기랑 잘 어울려요. 수정 보낸 보람이 있네요.”

이유리는 소신 있게 말했다. 현기혁 팀장은 가벼이 웃었다. 조용한 직원보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좋았다.

그녀는 박봉과 잦은 야근에도 불만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았다. 회사 내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원이었다.

“하긴. 유리 씨 눈썰미는 정확하니까. 앞으로도 수정 이슈 팍팍 넣으라고.”

현기혁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다른 편집 직원들이 외근을 나가 있었다. 탕비실에서 시원한 커피를 타서 이유리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앗, 감사합니다. 팀장님.”

“근데 그새 찾아서 읽어본 거야? <사각 살인> 말이야.”

“물론이죠. 이번 우리 회사 기대작이잖아요.”

라온북스의 편집용 원고는 내부 서버에 저장된다. 직원들은 모두 접근이 가능했는데, 이유리는 종종 파일을 받아 읽곤 했다.

<사각 살인>은 물론, 자신이 편집하지 않는 다른 원고도 읽었다. 취미와 특기가 독서인 전형적인 책벌레였다.

그래서일까. 입사한 이후로 그녀의 안경 렌즈 두께가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괜히 앞서서 무리하지 마. 편집 일정은 일주일 뒤 아닌가? 시작도 전에 진 빠지겠네.”

“너무 재미있어서 밤새우는 것도 모르고 읽었어요. 필이 딱 꽂히더라고요. 범인이 남긴 단서를 하나하나 풀어내는 그 장면이 얼마나 긴박하게 표현이 됐던지……!”

그때 뭔가를 떠올린 이유리가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런데 팀장님. <사각 살인> 말예요. 이번에도 한효주 님이 번역해 주신 건가요?”

“아니? 다른 사람이 번역한 거야. 뭐 문제라도 있었어?”

현기혁 팀장이 신경을 썼다. 안 그래도 번역 속도가 너무 빨라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부분이라도 발견된다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이유리는 전혀 다른 소감을 말했다.

“번역이 너무 잘된 거 같아서요. 원서를 읽은 건 아니지만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것 같이 자연스럽게 읽혔어요.”

“그래?”

“느낌이 되게 좋아요. 베스트셀러 노려볼 만해요.”

“그 정도야?”

이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솔직했으며 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네. 시간이 없어서 미루고 있었는데.”

“꼭 읽어보세요. 비문이랑 오탈자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편집 작업이 무척 쉬울 거 같아요. 근데 어떤 분이 하신 거예요? 한효주 님이 아니라면 김태현 님인가요?”

한효주, 김태현.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번역 쪽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몸값도 세다.

현기혁 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민우 씨라고. 명인대 이경훈 교수님이 소개해 준 사람이야. 그분이 했어.”

“박민우 님이요?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신인이신가?”

“왜 전에 왔던 젊은 남자 있잖아. 못 봤어?”

“아아, 그 외주 번역 계약하러 오셨던 분이요? 되게 어려 보이시던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현기혁 팀장은 ‘혹시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그가 서버에 접속해 번역 완성본을 열었다. 곧 퇴근 시간이었지만 그는 원고를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판단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유리 씨가 저렇게 칭찬을 하지?’

그런 의문을 품으며 현기혁 팀장이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오후 9시가 지날 무렵이었다. 저녁도 거르고 정신없이 책에 몰두한 것이다.

원고를 닫은 현기혁 팀장이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텅 비어 있었다. 이유리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후였다.

“팀장님?”

이유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아니, 괜찮아. 아직 퇴근 안 하고 있었어?”

“이제 막 일 끝냈어요. 일 많으신가 봐요. 어쩌지. 좀 도와드릴까요?”

현기혁 팀장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다른 직원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빈말이라도 늘 도와줄 게 없냐고 묻곤 했다.

“다 끝났으니 먼저 퇴근해.”

“넵.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이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현기혁이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예. 박민우 씨. 현기혁 팀장입니다. 예. 별다른 일은 아니고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지금 좀 뵐 수 있을까요? 네.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시죠.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현기혁 팀장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업계에 발을 들인 지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말단 편집자에서 데스크에 앉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 실패는 그에게 경험과 지혜를 주었다. <사각 살인>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난 그의 본능은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반드시!’

그는 책상 한쪽에 놓인 양장본 책을 집었다.

잠시 그 책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현기혁 팀장.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다는 건…… 역시 그거밖에 없겠지?’

민우는 맥주를 홀짝였다. 일이 계획대로 풀리고 있었다.

그는 먼저 자리를 잡고 현기혁 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엔 먹음직스러운 치즈감자튀김이 안주로 놓여 있었다.

사실 <사각 살인> 번역을 할 때 안경을 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첫 외주 작업인 만큼 완벽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야 후속 의뢰가 들어올 테니까. 첫인상은 어느 분야에서나 중요한 법이다.

‘어떤 제안을 들고 올지 기대되는데?’

민우가 감자튀김을 하나 입에 넣었다.

곧 문이 열리고 현기혁 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가 잔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아, 민우 씨. 밤늦게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안 그래도 시원한 맥주가 생각났는데, 마침 전화 잘 주셨네요. 쓰던 원고가 막혀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곧 단행본 마무리하시겠네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현기혁 팀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꿀맥주를 시켰고, 두 사람은 반갑게 건배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보자고 하셔서 좀 놀랐습니다. 일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오늘 보내주신 번역본을 모두 읽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혹시 뭐 문제라도 있었나요? 안 그래도 피드백이 없어서 좀 걱정하고 있었는데.”

현기혁 팀장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사각 살인>이 준 여운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아니, 기대가 아니라 상상 이상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저도 이 바닥에서 12년 동안 일을 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번역본은 처음이었습니다.”

한달음에 달려와 목이 말랐는지 현기혁 팀장은 일단 맥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마치 글이 살아서 춤추는 것 같은 느낌이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번역은 초보라서 모르는 게 많아요. 앞으로도 팀장님께서 잘 가르쳐 주셨으면 하네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잠시 말을 끊은 현기혁 팀장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양장으로 된 고급스러운 느낌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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