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번역계의 신성 (2)
(8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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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번역계의 신성 (2)
2021.08.05.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벌써 2학기가 개강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민우는 이번 학기에도 세 과목을 신청했다. 민영환 교수가 박사과정 수업을 맡느라 석사과정 수업에서 빠졌다는 게 나름 행운이었다.
설예라 교수의 ‘한국현대비평론연습’을 시작으로 한진욱 교수의 ‘한국현대시사연습’, 그리고 박창민 교수의 ‘한국현대작가론특강’을 듣는다.
‘이번 학기 수업은 저번 학기보다 훨씬 기대된단 말이지.’
설예라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한진욱 교수와 박창민 교수도 관련 분야로는 정점을 찍은 사람들이었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민우가 플래너를 꺼냈다.
날림으로 쓴 메모가 보였다. 연구 아이디어였다. 어제 술자리에서 적은 것이었다.
‘서강일. 꽤 흥미로운 친구였어.’
바로 어제, 민우는 공모전 본선에서 인연을 맺은 서강일과 만났다.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세상 사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대학원 이야기, 그리고 연구 테마에 대한 정보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번역 원고 마무리해서 라온북스에 보내야지.’
상념을 떨쳐낸 민우가 다시 노트북을 잡았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한참 후, 307호 문이 열렸다.
“안녕요.”
이수빈이었다. 수업 준비를 하던 석사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민우는 인사 대신 그녀를 향해 애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일까. 이수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걸렸다. 특별한 이벤트보다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 두 사람이었다.
“오빠. 해장은 좀 했어?”
“해장할 정도로 많이는 안 마셨어.”
“그래? 의외네.”
이수빈이 옆자리에 앉았다. 상큼한 과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향이 풍성하고 묵직한 게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샴푸 바꿨어?”
“티 나요?”
“응. 예전 것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다행이다.”
수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에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였다.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 민우는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메일 창에 현기혁 팀장의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파일을 첨부했다.
‘이게 끝이 아니겠지? 추가 작업이 있을 거 같은데. 에이전시를 통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런지 모르는 거투성이다.’
그래도 민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라온북스가 중소규모 출판사라는 게 도움이 됐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뭐. 일단 보내고 피드백을 받자.’
민우는 메일 본문에 추가로 필요한 작업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는 메모를 남겼다.
발송 완료 화면이 뜨자 이수빈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아깝단 말야.”
“뭐가?”
“어제 오빠가 술을 많이 마셔서 연락이 끊겼어야 건수를 잡는 건데. 요즘 오빠가 실수 같은 걸 안 하니까 놀리는 재미가 없어요.”
“너 그거 악취미야.”
어제 서강일과의 술자리는 길었지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서로의 지식을 안주 삼아 적당히 마셨다.
민우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럴 땐 ‘와 오빠 요즘 너무 잘해줘서 고마워. 오빠랑 사귀길 잘했어’라고 해야지. 약점 잡을 생각부터 하고 있어?”
그때 소파 쪽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민우는 수빈과 단둘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빨개졌다.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이수빈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건수를 잡았다.
“이야. 오빠 대담하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야.”
민우는 이수빈을 데리고 밖으로 도망쳤다.
두 사람은 인문관 옆 쉼터에 앉았다. 햇볕이 쨍쨍했지만 그늘은 시원했다.
이수빈이 자판기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민우는 주머니를 뒤적여 잔돈을 꺼내 음료수 두 개를 뽑았다.
캔을 받아든 수빈이 활짝 웃었다.
“와 오빠 요즘 너무 잘해줘서 고마워. 오빠랑 사귀길 잘했어.”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오빠 너무해. 어쩜 내 맘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수빈이 키득거리며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한숨을 내쉰 민우도 캔을 따고 음료수를 들이켰다. 왠지 목이 탔다.
그 와중에 수빈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근데 어젠 왜 그렇게 늦게 들어갔어? 술도 많이 안 마셨다면서. 여섯 시쯤 톡 와 있던데. 혹시 이상한 데 간 건 아니지?”
“이상한 데라면 어디?”
“어…… 그게.”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수빈을 보며 민우가 피식 웃었다.
“3차는 카페로 갔어. 말이 잘 통하더라고. 정신없이 떠들다 보니 벌써 해가 뜨고 있더라. 덕분에 두 시간밖에 못 자고 운동도 못 했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한일대 쪽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연구 분야가 비슷해서 그런지 세미나 하는 느낌이었지. 강일이도 아는 게 많더라.”
“그분도 현대소설 전공이야?”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중문학 연구하고 있대. 최근엔 과학소설 관련 논문을 쓰고 있다고 들었어. 쥘 베른 작품의 국내 수용사를 다룬 논문이라던데.”
“쥘 베른이 프랑스 작가였죠? <해저 2만리> 쓴 사람.”
“그렇지.”
그래서 민우가 더욱 흥미를 느끼기도 했다. 비교문학, 특히 프랑스 문학과의 접점에 관심이 있었다.
민우는 어제 서강일과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해 주었다. 수빈은 듣는 내내 부러운 표정이었다.
“오빤 다른 학교 친구도 사귀고 좋겠다. 기왕이면 강일 씨가 예쁜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맞아. 그게 좀 아깝긴 했어.”
“이 사람이! 거기서 납득하면 어떡해?”
민우와 수빈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캔을 깨끗이 비웠다. 민우는 수빈의 캔까지 함께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그런데 듣고 보니 오빠랑 공통점이 있다. 강일 씨 말야. 수용사 연구는 결국 비교문학적 방법이잖아. 오빠도 그쪽에 관심 많지 않았어?”
“맞아.”
전공을 그쪽으로 바꿀 계획이라는 건 그녀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민우는 확실히 정한 다음에 말할 계획이었다.
이수빈이 계속 말했다.
“그럼 나중에 공동 연구도 할 수 있겠네. 오빠가 외국 원서 자료를 찾아주고, 강일 씨가 국내 작품 분석하고. 좋은 콜라보다.”
“그건 좀 신중해야지.”
“왜?”
“라이벌 학교잖아. 선생님들이 아시면 별로 안 좋아하실걸? 뭐, 아예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분위기 봐서 하나둘 해 봐야지.”
공동 연구에 대해서는 이미 뜻을 나눴다. 본격적인 시작은 박사과정 입학 이후로 잡았다. 지금은 실력 향상에 주력하기로 했다.
“어쨌든 뜻밖이었어. 공모전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람 참 좋아 보이더라고.”
“그치. 대상 뺏겨서 안 좋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긍정적인 모습이 보기 좋더라.”
“관심 있으면 전번 줄까?”
“됐거든요?”
공모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수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아 맞다. 상금 아직 안 들어왔어?”
“상금?”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은행 앱을 실행했다. 통장 잔고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확인해 보니 한국연구재단 쪽에서 입금한 내역이 있었다.
“들어온 거 같은데?”
“얼마?”
민우는 다시 입출금 내역을 확인했다.
“478만 원.”
“무슨 세금을 그렇게나 많이 떼?”
대상 상금이 500만원이었으니, 세금으로 22만원이 나간 것이었다. 민우는 불만보다는 어떻게 상금을 나눌까 고민했다.
민우는 얼마 전 나머지 두 사람과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수빈이 너 소고기 먹고 싶다고 했지?”
“응.”
“그럼 회식비가 좀 나갈 테니 28만 원 떼고, 나머지 450만 원을 3등분하면 되겠다. 어때?”
“좋아요.”
말이 나온 김에 민우는 진섭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계좌번호를 받아 두 사람에게 각각 150만 원씩 이체해 주었다.
그 후에 민우는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400만 원이 조금 넘게 남았다.
‘생각보다 많이 모았네. 다음 달엔 번역비도 들어오니 좀 풍족하게 보낼 수 있겠다.’
최근 민우는 월세는 물론 생활비까지 스스로 벌어서 쓰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완전히 자립한 것이다.
게다가 이경훈 교수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해 1년 치 등록금이 면제되었다. 석사과정이 끝날 때까지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번역비 들어오면 어머니 용돈도 좀 드리고, 누나한테 맛있는 것도 사 줘야지. 그리고 연말에 프랑스 갈 여비도 착실히 모아두고.’
민우는 문득 사회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벌고 쓰는 것이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뒤늦게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진 민우였다.
그래도 그는 돈을 헤프게 쓰지 않았다. 검소하게 지냈던 어릴 적 습관 덕분이었다. 적은 돈이라도 차곡차곡 잘 모았다.
“오빤 상금 뭐에 쓸 거야?”
“글쎄? 일단 좀 모아 놔야지. 겨울에 프랑스 가려면. 어머니 용돈도 좀 드리고. 누나한테 뇌물도 좀 주고.”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민우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왜?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그게…….”
수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보니 민우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민우가 채근하자 그제야 수빈이 어렵게 말했다.
“커플링 하고 싶어.”
수빈이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오늘따라 손가락이 허전하게 보였다.
민우는 웃었다.
안 그래도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곧 있으면 사귄 지 백일이 된다. 그때 선물 겸해서 맞출 생각이었다.
“백일 때 맞추려고 했는데. 그냥 할까?”
“응응! 요즘 은으로 된 것도 되게 이쁘게 나오더라. 굳이 비싼 거 할 필요 없으니까 은으로 해요. 전에 봐둔 거 하나 있는데. 어때요?”
멀뚱히 수빈을 바라보던 민우가 피식 웃었다.
“너 지금 되게 강아지 같은 거 알아? 막 주인한테 매달리는 거 같은 느낌인데. 하하하. 그래. 알았어. 언제 갈까?”
“지금!”
“지금?”
고개를 끄덕인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민우도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명인대 정문을 나섰다.
* * *
민우는 지음사로 출근했다. 오늘처럼 강의가 없는 날에는 회사에서 원고 작업을 하거나 과제를 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좋았다.
“안녕하세요. 응?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요? 다들 모여계시네.”
정은아 대리를 필두로 모든 인문사회팀 직원이 모여 있었다. 모인 곳은 장철호의 자리였다. 민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박 쌤. 마침 잘 왔어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회식의 느낌이 강하게 오네요.”
정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호 씨 주임으로 승진했어요. 그래서 오늘 근사한 곳에서 한턱낸다고 하네요.”
“자, 잠깐만요 대리님.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지금 했다고 쳐요.”
장철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입사 1년 반 만에 주임을 달았다. 나쁘지 않은 행보였다.
민우가 축하했다.
“이제 장 주임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그래서 오늘 회식은 몇 시인가요?”
“아이고. 한번 봐주세요. 평사원 월급 얼마 안 됩니다.”
“철호 씨 쩨쩨하게 이러기야?”
장철호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도시 남자처럼 굴었으니까. 재미있었지만, 친구로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볍게 맥주나 한잔해요. 요 앞에 뭐 하나 생겼던데.”
“아, 그거라면 환영입니다!”
“흐음. 아쉽지만 이번엔 그 정도로 넘어갈까? 다들 시간 괜찮죠? 7시쯤에 모이는 걸로 해요.”
한바탕 시끄럽게 떠들고 난 뒤 민우는 연구실로 들어왔다.
여전히 다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한때는 누가 새롭게 들어올까 기대도 됐지만 요즘은 아예 신경을 껐다.
‘신입이 안 들어오는 것도 나름 편하네. 혼자 연구실 독차지하니까 조용하고 좋아.’
자리에 앉아 원고 작업을 하던 민우가 잠시 손을 멈췄다. 왼손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때문이었다.
민우가 왼손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 있는 은색 반지에 닿았다. 큐빅이 들어간 평범한 반지였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커플링을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조금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수빈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런 불편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네 하고 대답했다. 곧 문이 열리자 민우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우 씨. 바빠요?”
안으로 들어온 것은 송승현 실장이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14층에 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으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