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번역계의 신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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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번역계의 신성 (1)
2021.08.02.
라온북스에서 계약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민우는 이경훈 교수에 대해 조사했다.
‘네이비에 검색하면 대강 나오겠지?’
민우가 네이비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했다.
수십 건의 인물 정보가 떴다. 동명이인 중에서 그의 프로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 의외의 정보가 눈앞에 펼쳐졌다.
‘어? 명인대 출신이 아니시잖아?’
민우는 엘리트 교수들이 그렇듯 학부는 명인대를 나오고 석박사를 해외 대학에서 마쳤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학부부터 박사까지 프랑스에서 끝냈다.
‘정통 유학파구나.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었어.’
만약 이경훈 교수가 명인대 출신이었다면 민영환 교수를 그렇게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감싸고 돌 수도 있다.
그제야 민우는 미약하게 남아있던 불안감을 떨칠 수 있었다. 명인대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다면 확실히 믿을 만했다.
민우는 명인대학교 프랑스문학과 홈페이지에 접속해 그의 세부 전공을 확인했다.
‘비교문학. 그리고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셨구나. 확실히 내가 하려는 분야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연구물 목록을 클릭해보니 20건이 넘는 논문 리스트가 출력됐다. 국내외 학술지를 가리지 않고 1년에 세 건 정도를 발표하고 있었다.
4년제 전임교수 평균 논문게재 수가 1년에 0.9건이라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굉장히 높은 수치였다.
‘연구도 활발하게 하시네. 느낌이 좋다.’
민우의 마음이 점점 기울고 있었다. 언제 대전에 내려가 이 건에 대해 서지훈 교수와 상의를 하기로 정했다.
명인대입구 역에서 내린 민우는 학교로 이동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정식 순서는 끝나고, 정문 근처에 있는 고깃집에서 뒤풀이가 열리고 있었다.
약 20여 명이 모여 앉아 고기를 구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이 석사 신입생들이었다. 석사급 재학생들이 두어 명 있었고, 박사급에서는 강예진의 모습만 보였다. 행사의 달인답게 이번 오리엔테이션도 그녀가 준비했다.
“누나. 늦어서 죄송해요.”
“어디 다녀왔어?”
“잠깐 일이 있어서 일산에 좀 갔다 왔어요.”
강예진은 깊게 묻지 않았다. 얼굴만 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운 사람을 들인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다.
마침 강예진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가 방석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앉아. 저녁 안 먹었지?”
“잠시만요.”
민우는 일단 건너편 테이블에 있는 교수들에게 인사를 했다. 설예라 교수와 한진욱 교수가 있었다.
그중 한진욱 교수가 민우의 팔을 붙잡았다. 얼굴이 붉은 게 술을 좀 마신 것 같았다.
“박민우 너 요즘 잘나가더라? 허허허.”
“잘은요. 그냥 그렇습니다.”
“이번에 대상 받은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기대가 크구나. 단행본은 언제 나오냐?”
“다음 달 말쯤 나올 거 같습니다.”
“계약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아무튼. 출간되면 한 권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 자, 한잔 받아라.”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생해.”
민우는 잔을 쥐고 소주를 받았다. 한 번에 털어 넣었는데, 이번에는 옆에 있던 설예라 교수도 한 잔 따라주었다.
빈속에 소주가 연속으로 들어가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강예진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수빈이랑 진섭이는 갔어요?”
“아까 뒤풀이 오기 전에 가더라고. 2학기 되니까 다들 여유가 없어지나 보네.”
1학기 동안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고 방학을 보내면 2학기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슬슬 석사 논문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다른 행사는 몰라도 대학원 오리엔테이션은 강제성이 없다. 그래서 재학생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는다.
“근데 너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민식 오라비는 연구실에서 원고 쓰고 있는 거 같던데.”
“배 좀 채우고 저도 가봐야죠. 신경 쓰이는 것도 좀 있고.”
“네 후배?”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예린은 좌측 테이블에 앉아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다.
내심 서먹해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을 했나 싶었다.
“애 괜찮아 보이던데? 되게 깍듯하더라. 싹싹하고 붙임성도 좋고.”
“자주 데리고 다니세요. 일도 되게 꼼꼼하게 잘해요.”
“어딜 은근슬쩍 빠져나가려고 그러셔? 근데 지도교수는 정했대?”
“아마 설예라 선생님으로 할 거 같던데요? 평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았어요. 원래 소설을 쓰던 친구라 문장이 좋아서 평론도 제법 잘 써요.”
그 사이 강예진이 잘 구워진 고기를 민우의 앞접시에 담아 주었다.
“네 후배라니까 나도 기대가 되네. 유심히 지켜봐야겠어.”
“감사히 먹겠습니다.”
민우가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학과비로 먹는 고기라 실컷 먹었다.
뒤풀이 자리가 파한 것은 오후 9시가 좀 넘어서였다. 공식적으로 2차는 열리지 않았다. 신입생들끼리 뭉치려는 분위기였다.
강예진이 계산을 하고 영수증을 정리할 때까지 민우는 그녀의 옆을 지켰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댁으로 바로 가시죠?”
“그래야지. 넌 학교에 간다고 했지?”
“네. 민식이 형 혼자 심심하실 거 같아서.”
“수빈이 긴장해야겠어. 강적이 나타났네.”
민우는 피식 웃기만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고, 민우는 술도 깰 겸 캠퍼스를 걷기 시작했다. 인문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강예진의 말대로 민식은 박사 연구실에서 원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민우는 미리 준비한 캔커피를 그의 책상에 올렸다.
“땡큐. 마침 카페인 떨어졌는데.”
박사 논문을 쓴 이후로 민식도 그 커피를 즐겨 마시게 되었다. 민우의 덕이었다.
“저녁은 드셨어요?”
“대충.”
민식의 턱은 수염으로 가득했다. 며칠간 밤샌 모양인지 피부도 거칠어져 있었다. 박사 논문을 쓰던 그때가 떠올랐다.
민우는 고개를 돌렸다. 깨끗이 정리된 자리가 눈에 확 띄었다. 이재환의 자리였다.
“재환이 형이 떠나시니까 뭔가 허전하네요.”
“좋은 일로 가신 건데 뭐 어때.”
“그래도요.”
민식에게 사과하기 위해 왔던 그때가 생각났다. 통성명을 하고 반갑게 맞아주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민우가 그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캔커피를 따서 쭉 들이켰다.
“형도 임용돼서 떠나면 진짜 쓸쓸할 거 같아요.”
“내 앞길 막지 마라. 나도 빨리 여기서 탈출해야지. 언제까지 후배들 눈치 보고 있어야 하나 싶어. 자리는 빨리빨리 비켜주는 게 좋다.”
원고를 쓰던 민식이 잠시 손을 멈췄다. 의자를 돌려 민우를 바라보며 앉았다.
“그리고 너도 이제 선배 노릇 좀 해야지? 신입들도 들어왔는데.”
“형처럼요? 애들 모아놓고 군기 잡고. 지각하는 애들 혼내고. 음, 재미있겠는데요.”
“이 짜식이!”
민식이 책을 집어 던지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은 한바탕 실없이 웃었다.
이제 일할 시간이다. 기지개를 켠 민우는 노트북을 꺼내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재환이 앉던 자리라 그런지 글이 더 잘 풀렸다.
* * *
다음 날 오전, 민우는 첫 수업에 들어갔다. 설예라 교수의 수업이었다. 수제자인 이수빈은 물론, 진섭과 예린도 이 수업을 들었다.
강의명은 ‘한국현대비평론연습’이다. 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석사들 중 비평론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했다.
그런데 수강생이 스무 명이 넘었다. 대학원 수업에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다.
설예라 교수의 네임벨류 때문이었다.
워낙 인기가 많아 국문학과 학생은 물론 영화예술학 및 다른 어문학 전공 학생들도 수업에 참여한 것이다.
다양한 전공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수업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강의라기보다는 세미나에 가까웠다.
설예라 교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수업은 한국현대비평사와 비평방법론에 대해 다루는 수업이에요. 학부 때 다들 비슷한 강의를 들었죠? 그 경험을 살려서 보다 고차원적인 지식을 다루는 게 이번 강의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특히 나날이 변해가는 서양 문학 이론을 탐구해 볼 생각인데, 비평의 기본은 이론이니까요.”
설예라 교수가 설명을 멈추고 학생들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다들 비평은 뭐라고 생각하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작품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행위입니다.”
“좋긴 한데 그건 너무 교과서 같지 않나요? 다른 의견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싱긋 웃은 설예라 교수가 말했다.
“하나 소개할 구절이 있는데, 이택광이라는 평론가는 비평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그녀가 미리 준비한 메모를 꺼냈다. 모두가 음미할 수 있도록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내게 문화비평은 생선회를 뜨는 '일'같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 한 겹씩 물기를 제거하고 배열하는 것, 거기에 문화비평의 묘미가 있다. 쟁반 위에 놓인 살은 더 이상 '생선'이 아니라 '회'로 거듭난다. 생선은 사라지지만 입을 즐겁게 하는 맛이 태어난다. 회가 살아 있지 않다고 투정부리는 사람은 없을 테다. 문화비평은 간장과 초장을 버무린 알싸하고 고소한, 죽은 생선의 맛을 위해 칼끝을 겨누는 행위이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모두가 저마다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듯했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설예라 교수가 해설을 시작했다.
“장인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회칼을 잘 써야겠죠. 재료가 신선한 것은 물론이고요. 비평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론이라는 칼을 얼마나 예리하게 벼려낼 수 있는가. 또 신선한 재료를 고르는 안목을 갖출 수 있는가. 한 학기 동안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내공이 느껴지는 한마디에 수강생들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설예라 교수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간고사 전까지는 이론을 학습하고, 기말고사까지는 실제 비평을 연습할 거예요. 페이퍼는 논문이 아니라 비평문으로 대체합니다. 더 질문 있나요?”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고, 설예라 교수는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그렇게 수업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세미나실을 나섰다. 한진섭과 주예린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 또 원서 봐야 해? 뭔 놈의 원서를 이렇게 많이 봐? 남들이 보면 국문과가 아니라 영문과인 줄 알겠다.”
“맞아요. 번역 과제 너무 부담되는데. 으으. 큰일입니다!”
주예린이 슬쩍 바라보자 민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눈으로 봐도 소용없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지.”
“매정해.”
민우는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네 사람은 같이 점심 식사하고 흩어졌다. 같이 움직인 것은 민우와 수빈뿐이었다. 두 사람은 카페 미엘로 자리를 옮겼다.
“오빠. 일산에 있는 출판사 다녀온다고 했잖아. 그건 어떻게 됐어?”
“내가 어제 얘기 안 했나? 번역 일 맡기로 했어. 계약하고 왔지.”
“무슨 책인데?”
“추리 소설이야. 제목은 <사각 살인>.”
“제목이 좀 섬뜩하네. 재미있어?”
“미국에서는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더라. 제대로 번역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뜰 거 같아.”
민우는 <사각 살인> 책과 노트북을 꺼냈다. 한쪽 구석에는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놓였다. 수빈은 빨대를 입에 물며 물끄러미 민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단 말야.”
“뭐가?”
“오빠 말이야. 처음에는 영어 그렇게 썩 잘하진 않았잖아. 어느 날 갑자기 터진 건지, 민 선생님 수업에서 주목받더니 강철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들어가고. 이제는 번역일까지 하네. 대체 비결이 뭐야?”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보존서고에서 루카치의 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번역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외국어라는 게 그렇잖아. 공부하다 보면 갑자기 눈이 뜨일 때가 있는 거.”
“나는 안 그러던데.”
“나는 천재니까.”
민우가 농담으로 말했지만, 수빈은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민우를 담은 수빈의 두 눈이 조금은 불안해졌다.
그가 성장하면 할수록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버리지 않을까?
“아휴, 농담도 못 하냐.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아니. 그냥요.”
어색하게 웃은 수빈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민우는 파일을 열고 번역을 준비했다.
납기일을 일주일로 맞추긴 했지만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야 하루면 충분하지.’
번역은 벌써 절반이 끝났다. 두 시간 정도 투자하면 나머지를 마무리할 수 있다.
그래도 원고는 약속대로 일주일 뒤에 보내주기로 했다. 너무 일찍 보내는 것도 신뢰도 면에서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일해서 약 250만 원. 꿀알바네. 다음엔 인센티브를 좀 걸어야겠어. 단가도 올리고. 아니, 아예 매절이 아니라 인세 계약을 해볼까?’
타닥― 타다닥―
민우의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