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7. 새로운 목표 (2) (77/500)


077. 새로운 목표 (2)
2021.07.29.


“웃기지 않나? 민 선생님은 번역이 이상한 거 같다며 나에게 페이퍼를 가져왔었지. 그 말은 간단하잖아. 그 양반은 불어를 못 한다고. 그런데 내 앞에서 빤히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니 참 우스웠지.”

민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참이나 모자란 행동이었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은 걸까? 아니면.

“솔직히 말해 봐. 민 선생님이 다 읽고 그 부분을 추가하라고 말씀을 하셨나?”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경훈 선생님이 나를 상대로 간을 보고 있다면?’

만약 그가 민 교수의 측근이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 누구도 지도교수를 흉보는 제자를 받아주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침묵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명인대 국문과 대학원생이 아닌, 한 사람의 학자로서 생각을 했다.

랑느 박사의 페이퍼를 번역한 것은 자신의 업적이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뺏기고 싶지 않았다.

민우는 고개를 들고 당당히 말했다.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해설은 제가 읽고 이해한 내용을 풀어서 쓴 겁니다.”

“역시 그랬군. 민 선생님은…… 그쪽으로 좀 유명하지. 옛날에도 후배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고.”

“그런데 선생님. 왜 이런 말씀을 제게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을 이야기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경훈 교수는 빨대로 얼음을 헤집으며 시간을 끌었다.

“말했잖아. 네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선생님.”

“알았다. 알았어.”

이경훈 교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이쪽 이야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제자의 공을 가로채려 하는 모습을 보니 한심스럽더군. 멍청한 사람의 밑에서는 날개를 펼 수 없는 법이지. 이재환 선생은 어떻게든 잘됐지만, 이대로라면 너는 어려울지도 몰라.”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어려울 거라고 단정하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자네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을 텐데? 상아대라는 학벌로는 버티기가 어렵다는 걸. 국문과는 특히 심하잖아. 폐쇄적인 곳이라.”

민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원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학부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늘 따라다녔다.

물론 민우는 자신이 상아대 출신이라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인정을 받을 거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론이었다.

이상과 현실에는 늘 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민우는 이재환의 임용 과정을 지켜보며 현실과의 괴리를 느껴야 했다.

“물론 선생님 말씀대로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학력세탁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전 그저 대학에서 교수를 하려고 공부를 시작한 건 아닙니다.”

“그럼?”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 속에 우뚝 세우고 싶습니다. 이 두 손으로요.”

그렇게 말하며 민우는 양손을 꼭 쥐어 보였다.

이제 갓 석사 2학기를 시작한 대학원생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경훈 교수는 그것을 동화로 치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군. 좋은 눈빛이야. 맞아. 학문을 시작했다면 그 정도의 포부는 가지고 있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지 않으시는군요. 다행입니다.”

“하하하. 난 어디의 누구와는 달라. 나름 깨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지.”

이경훈 교수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곧 오늘의 본론이 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박사는 이쪽으로 옮겨서 할 생각 없나?”

“불문과로요?”

이경훈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문과 박사과정은 입학이 불가능해. 분야가 다르니 하려면 석사부터 시작해야겠지. 하지만 비교문학 박사과정이라면 어떨까?”

“선생님도 비교문학 과정을 담당하고 계신가요?”

“그렇지. 불문과에서는 나랑 강 선생님이 참여하고 있다.”

명인대 비교문학과는 협동과정으로 운영된다.

협동과정은 쉽게 말해 여러 학과가 모여 만든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교수진, 교육 시설, 교육과정을 공유한다.

명인대에는 비교문학 석사와 박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민우가 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것엔 문제가 없다.

불문과는 불문학에 대한 기초가 필요하지만, 비교문학은 일반문학을 다루기 때문에 국문학과 출신들도 들어갈 수 있다.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석사 논문을 쓰는 게 중요해서요. 말씀해 주신 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를 꺼낸 건 아닌가 걱정이 드는데. 천천히 생각해 봐.”

그가 다시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이경훈 교수의 표정을 보니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거 같았다.

물론 그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기대 이상이었다. 전공을 바꾸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일종의 스카웃이니까.

‘오히려 불문과로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적어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

만약 불문과로 오라는 제안을 했다면 민우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테니까.

민우는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만약 비교문학 전공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선생님께 지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내가 자네의 등에 기꺼이 날개를 달아주지!”

“감사합니다.”

이경훈 교수는 다시 한번 만족스럽게 웃었다. 설득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이미 민우의 마음은 비교문학 전공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을. 때가 잘 만나 서로가 생각하는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경훈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 조사를 좀 해봐야겠다.’

학풍과 커리어 등 다방면의 정보가 필요했다. 과연 그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지 가늠해 보아야 했다.

그때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하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벌써부터 딜을 하려고? 역시 진취적인데.”

“그런 건 아니고요. 전부터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얘기해 봐.”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민우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단행본 번역 외주를 받을 만한 곳이 없을까요? 그쪽으로 좀 일을 시작해 보려고 해서 말입니다.”

“번역이라면 몇 군데 있긴 하지. 소설? 아니면 비문학?”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영어도 좋고 프랑스어도 좋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이경훈 교수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얘기가 나온 출판사가 한 곳 있긴 한데. 그쪽이 적당하겠군. 회사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아서 처음 일 시작하기엔 나쁘지 않을 거야.”

“연결해 주실 수 있습니까?”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이경훈 교수가 씨익 웃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무명의 번역가를 소개하는 건 그만큼 힘이 들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대신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줬으면 하는데?”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간단해. 이번 학기부터 내년 1학기까지 프로젝트를 하나 할까 한다. 프랑스 원어로 된 학술서 세 개를 완역하는 프로젝트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프랑스에 다녀온 게 그것 때문인가 싶었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 한 가지.

‘랑느 박사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셨지? 혹시 박사님 책을 번역하는 건가?’

이경훈 교수가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민우의 예상대로 번역 대상은 바로 피에르 랑느 박사의 저서였다.

민우는 일이 술술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박사님 책을 번역하는 일이라면 한번 욕심을 내 볼 만도 하지.’

랑느 박사의 책이 주목받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논문으로는 가끔 소개되긴 했지만, 단행본이 정식으로 들어온 적은 없다.

이번 학회에서 랑느 박사의 통역을 맡은 이경훈 교수는 나름 계산기를 두드렸고, 학문적 기여도는 물론 사업성까지 계산을 끝낸 것이다.

갑작스레 프랑스행을 결정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그는 젊은 만큼 성취욕이 강했기에 추진력이 굉장히 좋았다.

“이미 교내 연구지원사업에 신청했고, 연구비를 확보한 상황이야. 석박사 과정에 상관없이 1년 수업료가 면제된다.”

“1년 수업료 면제요? 좋은 조건이네요.”

“좋은 조건이라는 말은 하겠다는 말이지?”

민우는 이미 랑느 박사의 페이퍼를 번역하며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이경훈 교수 입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올겨울 프랑스에 가기 전까지 랑느 박사의 책을 다 읽을 계획이었다. 거기에 등록금까지 면제되니 말 그대로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민우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겸손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제가 해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주 좋아. 그럼 약속대로 출판사에 전화를 넣어 주지. 그런데 지음사 쪽으로는 알아보지 않은 거야?”

“알아볼 수 있긴 한데요. 단행본 작업을 하고 있어서요. 일거리를 늘리면 안 좋게 보일까 봐 일부러 선택지에서 뺐습니다.”

이경훈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단행본을 출간한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민우가 물었다.

“추천해 주실 업체는 어디죠?”

“라온북스. 신생 출판사인데 소설을 전문으로 출판을 하고 있어.”

들어본 적 없는 곳이었다. 민우의 기억 속에 없다는 것은 유명한 곳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경훈 교수가 물었다.

“그런데 단행본 번역일은 갑자기 왜 하려는 거야?”

“그쪽으로 커리어를 좀 쌓고 싶어서요. 연구에도 도움이 될 거 같기도 하고요.”

민우는 일부러 입시 가산점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돈에 대한 이야기도 생략했다.

“번역 잘해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이라도 타려고?”

이경훈 교수의 농담에 민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곧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처음에는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은 작가에게만 주는 상이 아니다. 그 작품을 번역한 사람에게도 상을 준다. 창작과 번역을 동등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영어로도 번역할 수 있잖아? 영어만이 아니지. 다양한 언어로 번역을 할 수 있어. 작품만 잘 고른다면 가능성이 없지도 않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강 작가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다. 작가 부문에서는 국내 최초였다.

하지만 번역 부문은 여전히 미개척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때마침 언론에서는 전문 번역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에는 정말 멋진 작품들이 많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만한 작품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 수에 비해 외국어로 번역할 만한 인력은 거의 전무한 상황. 외국인이 배우기에 한국어는 꽤 까다로운 언어라는 점도 큰 작용을 했다.

민우는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신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단순히 돈벌이로 끝나면 안 될 거 같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좋은 번역가를 만나지 않으면 소개될 기회 자체가 없잖아?’

민우는 그 역할을 자신이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국문학 전공자라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다. 거기에 외국어에 대한 장벽이 없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영어 정도는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

곧 큰 그림이 완성되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

민우는 잠시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왠지 일이 좀 커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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