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새로운 목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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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 새로운 목표 (1)
2021.07.26.
8월 29일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여느 때와 같이 운동을 나갔다. 한 시간 정도 뛰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래도 상쾌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책상에 앉았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충분히 말리고 상자에 잘 모셔둔 루카치의 유고를 꺼냈다.
이제 안경을 끼지 않아도 원고를 읽을 수 있게 됐다. 틈틈이 독일어 원서를 읽으며 능력을 향상시킨 덕분이었다.
‘기연을 얻은 지도 벌써 4개월이 지났구나.’
짧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민우가 안경을 쓰는 횟수도 점차 줄어갔다.
‘안경을 쓰면 여러모로 좋긴 해. 그래도 필요할 때만 쓰자. 게임이 쉬우면 재미없는 법이지.’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랑느 박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가 맑아지는 쾌감을 느끼며 민우는 계속 유고를 읽어 나갔다.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행사를 모두 마무리했다. 이제 단행본 마무리 작업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1학기는 정말 바쁘게 보냈지. 많은 일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도 만났고…….’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여운 동생에서 연인이 된 이수빈.
개그 코드가 잘 맞는 절친 한진섭.
알고 보니 재벌 3세였던 정연주.
그리고 최민식의 얼굴이 떠오르자 민우는 피식 웃었다.
‘민식이 형이랑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이제 어엿한 교수가 되어 명인대를 떠난 이재환이 생각나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학문적인 깨달음을 준 송승현 실장과 피에르 랑느 박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여러 일이 있었고, 과정이 삐걱거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민우는 훌훌 털어냈다. 결과적으로 그 갈등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으니까.
‘욕심내지 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자.’
고개를 끄덕여 마음을 새롭게 한 민우는 유고를 상자에 넣었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날이 좀 덥긴 했지만 그는 7부 재킷을 걸쳤다. 오늘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좀 많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인문관으로 걸어간 민우는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따가운 햇볕을 손으로 가리며 인문관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플래카드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경) 제1회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대상 수상 (축)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박민우, 이수빈, 한진섭
민우는 플래카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민식은 약속을 성실히 지켰다. 대상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때 그 주인공이 나타났다.
“좋냐?”
“당연히 좋죠. 크고 아름답네요. 저거 다느라 고생 좀 하셨겠어요.”
너스레가 늘었다. 피식 웃은 최민식은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민우는 꾸벅 인사했다.
“고생은 무슨. 예전에 학부 때 자주 했던 일인데 뭐. 근데 더워 죽겠는데 재킷은 왜 걸치고 왔어?”
“비즈니스가 있어서요.”
“비즈니스? 다 좋은데 원고 납기일은 꼭 지켜라. 이제 보름 남았으니까. 마무리 작업엔 별문제 없지?”
“물론이죠.”
“문장 퇴고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내용적인 면에서 오류가 없는지 다시 검토해라. 인쇄돼서 나오면 끝이라는 거 잊지 말고.”
최민식이 먼저 인문관으로 들어갔다. 민우는 다시 플래카드를 바라보았다.
‘보름 뒤에 원고 넘기면 다음 달 말쯤에 책 나오겠네. 기대된다!’
근사한 양장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강연으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출판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민우는 누구에게 사인해서 줘야 하나를 고민하며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아아아!”
세상에 오빠들은 많다.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였고, 민우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주예린이 이쪽으로 쪼르르 뛰어왔다.
“얌마. 저거 안 보여?”
“앗. 죄송.”
민우가 가리키는 곳엔 ‘정숙’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강의동은 따로 있지만, 인문관은 연구실이 많기 때문에 조용한 편이다.
민우가 수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 석사 신입생들은 수업 없지 않나?”
“오빠한테 점심 얻어먹으려고요.”
“너……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흥, 명인대 인심 야박하네. 선배가 후배한테 밥을 사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거야 신입생 때 얘기지.”
“지금도 신입생이잖아요. 석사 1학기 주예린!”
“학부 말이다. 학부.”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꼬맹이를 어떻게 어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나 점심에 약속 있어.”
“에이, 그냥 해본 소리죠. 설마 오빠한테 진짜 얻어먹으려고 이렇게 일찍 왔겠어요?”
“응.”
“너무해!”
주예린은 삐쳤는지 입술을 툭 내밀었다. 민우는 그대로 버리고 갈까 했지만, 문득 생각난 게 있어 걸음을 멈췄다.
“오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있는 거 알지? 빠지면 안 된다. 절대로. 오늘 하루가 앞으로 네 대학원 생활을 결정할 거야.”
“몰라요. 삐뚤어질 테다!”
민우는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꾹 참았다. 할 말을 마저 해야 했다.
“그리고 오리엔테이션에서 말 너무 많이 하지 마. 쓸데없는 드립 칠 만한 분위기는 아니니까. 선생님들도 오신다는 거 기억하고.”
“알았어요. 근데 석사들 연구실은 어디에 있어요? 시간 때울 데가 마땅찮네. 수빈이는 이따 오후에나 온다고 했는데.”
“아 참, 학생증 아직 안 나왔지.”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 그녀를 데리고 307호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인 데다가 개강 첫날이라 그런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본 주예린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팀 307호 이름으로 얼마 전에 받은 트로피였다.
“저건 뭐예요?”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대상 트로피야. 앞으로도 팀 짜서 공모전에 참여할 건데, 상 받을 때마다 저기에 전시해 놓을 거다.”
“와! 앞으로도 계속요?”
“너도 낄래?”
주예린은 순간 눈이 반짝였지만, 어울리지 않게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팔짱을 끼면서 턱을 슬쩍 들었다.
“좀 생각해 볼게요. 바쁜 몸이라서.”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 오빠! 사람이 왜 그렇게 끈기가 없어요?”
민우가 매정하게 돌아서자 매미처럼 매달렸다. 그렇게 주예린도 팀 307호에 합류했다.
* * *
민우는 주예린을 혼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선배들이 종종 들르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나름 예의 바르고 싹싹한 친구다.
‘시간이 좀 이르긴 한데, 한번 가볼까?’
민우는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훈 교수 때문이었다.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결선 바로 전날,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도대체 어떤 말씀을 하려고 그러셨던 거지?’
민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경훈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마그네틱이 ‘재실’로 되어 있었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왔어?”
이경훈 교수가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 큰 상 받았다지?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이재환 선생도 임용됐다고 들었는데. 민영환 선생님은 요즘 아주 기분이 좋으시겠어. 제자들이 아주 잘나가니까.”
민우는 그냥 웃어넘겼다.
큰 상을 받긴 했는데, 아직 민영환 교수에게는 축전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영환 교수가 어떤 인물인지를 생각하니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민 선생님과는 오래 갈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민우는 예전부터 전공을 바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일이 틀어지면 움직이려고 했는데, 최근에 좀 생각이 달라졌다.
‘그냥 간 보지 말고 처음부터 비교문학과에 지원하는 게 좋지 않을까?’
모집 정원은 국문과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입학 가능성은 굉장히 높다.
비교문학에서는 문학 지식뿐만 아니라 어학 능력도 중요하게 여긴다. 민우는 외국어 능력에서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우는 무기를 하나 더 준비할 생각이었다.
바로 원서 번역.
명인대 비교문학과 입시에는 번역 가산점이 있다. 번역 쪽으로 커리어를 쌓아서 입학 전형에 유리하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려면 역시 국문학보다는 비교문학이 낫지. 같은 문학이니까 국문학도 함께 다룰 수 있고.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이야.’
국문학을 공부하며 민우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한국문학과 이론은 해외에 알리지 못하는 걸까?
그러면서 다짐했었다. 학계의 거장이 돼서 해외에 한국문학을 알리겠다고.
‘비교문학은 바로 그 전환점이 될 수 있어.’
물론 아직 완전히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다. 마음은 기울었지만, 민우는 상황을 보고 충분히 생각한 다음 결정하기로 했다.
이제 석사 2학기다.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은 넘칠 정도로 많았다.
“프랑스엔 잘 다녀오셨어요?”
“뭐 그렇지. 갑작스레 일이 생겨서 다녀오긴 했는데, 나름 성과를 거두고 왔다.”
“혹시 랑느 박사님 만나고 오신 건가요?”
“감이 좋은데?”
씨익 웃은 이경훈 교수가 냉장고를 열었다. 두리번거리던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마실 게 다 떨어졌네. 괜찮으면 나갈까?”
“좋죠.”
민우는 이경훈 교수와 함께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내려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이경훈 교수는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앉았다.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강철훈 선생님께 다 들었어. 아주 우수한 능력을 가진 친구라고 하시더군. 특히 번역에.”
“과찬이십니다. 강 선생님께는 늘 죄송스럽네요. 지나치게 좋게 봐주셔서. 지음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강 선생님 덕분입니다.”
“아, 지음사에서 일을 하고 있나? 인문사회연구소?”
“맞습니다.”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녀석도 그쪽으로 추천을 받았었는데 거절을 했었지.”
“정연주 말이죠?”
이경훈 교수가 살짝 놀랐다. 이내 그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아는 사이야?”
“강 선생님 프로젝트에서 같이 일을 했어요. 자주 연락하고 지냅니다.”
“학교를 그만둔 게 아쉽긴 하지만, 뭐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자네는 박사도 계속 국문과에서 할 생각이야?”
민우는 내심 놀랐다. 이렇게 빨리 안으로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계속 국문과에 있을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학부 때 전공이 이쪽이다 보니…….”
“그래?”
민우는 속마음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말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다. 괜히 전공을 옮긴다는 이야기를 흘렸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때 이경훈 교수가 몸을 민우 쪽으로 가까이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하고 있나? 내가 자네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 거.”
“예. 어떤 말씀을 하실지 궁금해서 밤잠을 설쳤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 이대로라면 민 선생님께 팽을 당하지 않을까? 자네 말이야.”
그 한마디는 대번에 민우의 표정을 망가뜨렸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른 전공 교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민우는 일단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 했습니다. 팽을 당하다뇨?”
“학회 때 민 선생님이 자네를 견제하는 거 같았어. 아니, 견제라기보다는 싹을 자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자네가 세운 공을 가로채려고 했거든.”
“가로채려고 했다고요?”
“그래. 우리나라 대학원에서는 뭐 종종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런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지. 오래 갈 수 없어.”
이경훈 교수는 빨대를 입에 대고 커피를 쭉 마셨다. 민우를 흘겨보며 그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럴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민 선생님이 학회 때 랑느 박사님께 이런 말을 하셨다. 박사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필을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온 거 같다고.”
“어필이요?”
민우는 인상을 썼다. 마음속으로만.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민 교수는 랑느 박사의 페이퍼를 읽을 만한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어필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