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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 작지만 큰 결실 (5) (75/500)


075. 작지만 큰 결실 (5)
2021.07.23.


“인문학 강좌는 이미 여러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사업입니다. 저도 얼마 전에 대전에 있는 지자체에서 진행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요. 이미 널리 시행되고 있는 정책을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민우의 말이 끝난 줄 알았던 문철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답변이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인문학 강좌 자체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공간이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는 부분인데요. 바쁜 현대인들이 시간을 내어 강의를 듣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울 겁니다.”

민우가 시선을 청중석으로 옮겼다. 정확히는 다섯 번째 발표 팀이었던 ‘후마니타스’를 향했다.

그들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인문학 강좌가 그들의 핵심 아이템이었는데,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어서 반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이크는 민우의 것이었다.

“물론 인터넷 강의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정보를 선택할 수 없다는 단점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동영상에 색인을 걸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죠. 끝까지 봐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요.”

민우가 다시 심사위원석을 주목했다. 정확히는 문철수 심사위원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방금 제가 지적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정보 선택의 문제는 저희 팀에서 제안한 오픈 라이브러리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지식을 열람하고, 필요에 따라 그 지식을 학습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네요.”

“으음, 답변 잘 들었습니다.”

문철수가 심사지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수빈과 한진섭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비를 잘 넘겼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것은 도유진 원장이었다.

“오픈 라이브러리의 튜토리얼 모드. 이 아이디어가 굉장히 신선한데요. 이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전 게임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게임을 즐겨하기도 하지요.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민우는 어플리케이션과 이용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물론, 이용자와 이용자 사이에 성립되는 사회적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의 개념까지 설명했다.

심사위원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위원들이 민우의 답변을 놓고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도유진 원장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좋아요.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라고 보는지?”

민우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는 전문성을 앞세워 답변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이 질문은 뭔가 좀 다른 거 같다.’

민우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대답을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곧 그가 마이크를 입에 댔다.

“저희들은 학생이기 때문에 사업에 어떤 이해관계가 얽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려는 의지가 분명하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답변 잘 들었어요.”

도유진 원장이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녀의 평가표에도 점수가 기입되었다.

그것으로 질의응답 시간이 모두 끝났다.

“본선 발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이제 심사위원 여러분들의 점수 합산 후에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오후 5시 정각에 수상자 발표와 시상식이 거행됩니다. 대회의실 뒤편에 다과를 마련했으니 잠시 휴식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민우가 제일 먼저 일어섰다. 수빈과 진섭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다른 팀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대회의실을 나섰다.

* * *

팀 307호 멤버들은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대회의실 밖 복도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박민우. 고생했다 정말.”

진섭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우는 확실히 실전에 강했다.

“그래도 대본 던져놓고 가는 건 좀 그랬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거추장스러워서 그랬어. 어차피 다 외우고 있기도 했고. 발표할 때 한 손이 자유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정말 큰 차이가 있거든.”

만년필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민우는 발표와 강연의 오의를 깨닫고 있었다. 이번 공모전으로 인해 한 단계 더 성장한 느낌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참여하는 게 좋겠어. 실전을 거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으니까.’

민우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아직도 마이크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수빈이 물었다.

“오빠들은 어떨 거 같아요?”

“뭐가?”

“우리 어떤 상 받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지. 분위기는 좋긴 했는데, 심사위원들이 우리 발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는 거니까.”

느낌은 좋았다. 하지만 변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걱정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더 이상 수상에 대에서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근데 말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다른 팀까지 건드릴 필요 있었나?”

진섭은 콜라를 홀짝거리며 불만을 말했다. 민우가 잘 대응하긴 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민우도 콜라를 홀짝이며 대꾸했다.

“건들긴 뭘 건드려. 넌 논박의 개념도 모르냐?”

“그래도 질문한 내용만 성실히 답변했다면 좋았을 텐데. 괜히 다른 팀한테 미움 살 필요는 없잖아요.”

“음, 역시 그런가?”

민우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한진섭이 더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이래서 커플들은 싹 사라져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민우 너 수빈이 말에는 맨날 얌전해지는 거 알아? 남자가 줏대도 없냐.”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은 무슨. 에휴, 벌써부터 잡혀 살다니. 미래가 어두컴컴하군. 아무튼, 수빈이 말이 맞아. 괜히 미움 살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그때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미움 안 샀습니다.”

민우 일행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팀 후마니타스의 발표자가 씨익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적당한 키에 잔근육이 많은 훈남이었다. 인상이 무척 좋았다.

“박민우 씨죠? 반갑습니다. 전 한일대 국문과 서강일입니다.”

“아, 강일 씨. 발표 잘 들었습니다. 준비를 잘하셨더라고요. 인상 깊었습니다.”

“인상 깊긴요. 대놓고 까셨으면서.”

서강일이 웃었다. 농담이었다. 민우가 멋쩍게 웃으며 그와 악수를 했다.

“석사시죠? 몇 학기세요?”

“이제 2학기 됩니다. 민우 씨는요?”

“저도 2학기요.”

“혹시 나이가?”

“올해 스물여덟입니다.”

“동갑이네요.”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같은 전공에 과정과 학기도 같고 나이도 같다. 웬만한 우연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서강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상은 벌써 결정된 거 같더군요. 다른 팀들하고도 얘기를 해봤는데, 다들 표정이 영 아니었습니다. 너무 압도적인 차이라.”

“상이 크게 중요하진 않은 거 같습니다.”

“그럼 상금이?”

서강일의 농담에 민우는 웃었다. 개그 코드가 약간 한진섭을 닮아서 그런지 잘 통했다.

“글로 논문만 읽다가 이렇게 실제 발표장에 나오니 느낌이 다르더군요. 공연 방식으로 발표를 한 팀도 있었고,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 된 거 같습니다.”

“그럼 대상 양보해 주시죠.”

“그건 곤란한데요. 상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을 겁니다.”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서강일은 이수빈과 한진섭과도 인사를 나눴다.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에 유대감을 느꼈다.

“앞으로 종종 뵙겠죠?”

서강일이 물었다.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그 질문엔 단순히 ‘본다’는 의미만 담겨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겠죠. 학회에서든, 논문에서든. 아니면 이런 공모전에서 또 부딪힐 수도 있고요.”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강일이 대회의실 안으로 돌아갔다. 307호 팀원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수빈이 눈빛이 심상치 않은데? 저 훈남 친구한테 반한 거 아냐? 조심해 박민우.”

“오빠!”

꽥 소리를 지른 이수빈이 진섭의 팔뚝을 꼬집었다. 외마디 비명이 대회의실 복도를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회자의 안내음성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기다렸다는 듯 307호 멤버들은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단에는 시상 준비가 이미 끝나 있었다. 트로피와 상패, 그리고 꽃다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금부터 시상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상에는 한국연구재단의 석동익 이사장님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장려상은 생략하고, 사회자가 3등 수상 팀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다. 한 팀씩 연단에 올라 트로피를 받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대상 발표의 순간.

“마지막으로 대상입니다. 제1회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의 대상은…… 팀 307호 여러분들이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민우가 우려하던 변수는 없었다.

대상이 확정되는 순간, 민우와 수빈, 진섭은 체면 가릴 거 없이 일어서 환호성을 질렀다.

‘해냈다!’

근 몇 달간 매달린 공모전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었다. 작지만 큰 결실이었다.

그때 민우가 청중석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때마침 송승현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미소를 지었다.

“잘 봤지? 응?”

서지훈 교수가 개구쟁이처럼 물었다.

옆에서 말없이 박수를 치고 있던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빚을 제대로 갚았다. 이제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 * *

“팀 307호 여러분들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민우와 친구들이 연단에 올랐다.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이 직접 나서서 트로피와 상장을 전달했다. 꽃다발도 있었다.

석동익 이사장이 트로피를 건네며 덕담을 했다.

“발표 인상 깊게 봤습니다. 멋진 역량을 가지셨더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트로피는 민우가, 상장은 진섭이, 꽃다발은 수빈이가 나눠 받았다.

세 사람은 한국연구재단 이사장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기자들이 앞으로 몰려나와 연달아 플래시를 터트렸다.

이제 수상 소감을 말할 차례였다.

“누가 할래?”

민우가 묻자 약속이라도 한 듯 수빈과 진섭이 동시에 그의 등을 밀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사실 대상을 탈 줄 알고 열심히 수상 소감을 준비했는데 적어 둔 걸 깜빡하고 집에 놓고 왔네요. 난감합니다.”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트로피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자주 들려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모전 준비 기간 동안 여러 문제들을 함께 이겨낸 팀원들에게 이 상을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플래시가 터졌다.

시상식이 끝나고 민우와 일행, 그리고 명인대 선배들이 한국연구재단 건물을 나섰다. 해가 쨍쨍해 아직 대낮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한일대 서강일이었다.

“반말해도 되죠?”

붙임성이 제법이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우리 차례 끝났을 때 우리가 대상 탈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더라고. 더 큰 벽이 나타날 줄이야. 거의 매일 밤새우면서 준비를 했는데. 참.”

서강일은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분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그 점이 인상 깊었다.

이번엔 민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 다음에는 분명 좋은 결과가 있겠지. 물론 우리가 참가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하하하!”

서강일은 큰 소리로 웃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쳐다보았다.

“다음에는 손 놓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쉽지 않을걸?”

민우는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서강일은 핸드폰을 꺼냈다. 민우는 번호를 저장하고 다시 돌려주었다.

“언제 한번 명인대로 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 한잔해야지. 위로주 쏜다.”

“그거 좋지. 연락할게.”

민우는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아래에서 선배들과 동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재환이 제안했다.

“시간들 괜찮으면 다 같이 저녁 어때? 꼬맹이들 대상 탄 것도 있고, 나 취업한 기념으로 한턱내려고 하는데.”

“좋습니다. 이렇게 모이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송 실장은?”

“저도 괜찮아요.”

꼬맹이들은 당연히 가겠다고 말했다. 한때 에이스라고 불렸던 선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급을 주울 흔치 않은 기회였다.

민우와 친구들은 이재환의 차에 탔고, 송승현 실장은 서지훈 교수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운전을 하던 이재환이 슬쩍 물었다.

“근데 트로피는 어떻게 할 거냐? 하나만 주는 거 같던데. 누가 보관할 생각?”

“307호에 놔두려고요.”

“307호에? 왜?”

“우리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요. 앞으로도 뭔가 받으면 하나둘 거기에 쌓아둘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네. 나중에 장식장 하나 기증해야겠다.”

“그래 주심 감사하죠.”

이미 사전에 팀원들과 이야기가 다 된 일이었다. 그들의 열정이 계속된다면, 트로피와 상패는 하나둘 늘어갈 것이다.

그때 민우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보관함에서 트로피를 꺼냈다.

“빈아. 잠깐 이것 좀 들고 있어 봐.”

“응? 왜요?”

“사진 좀 찍게.”

민우는 트로피 사진을 찍었다. ‘대상’ 문구가 잘 나오도록. 그리고 최민식에게 그 사진을 보냈다.

― 형. 약속은 지키셔야죠? 크고 예쁜 놈으로 부탁드립니다!

민우는 웃으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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