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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 작지만 큰 결실 (4) (74/500)


074. 작지만 큰 결실 (4)
2021.07.22.


가장 먼저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석동익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인문학은 시대와 정신을 초월하는 학문의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여러 위기를 맞고 있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와 격려를 보냅니다. 올해 처음 기획된 이 공모전은, 앞으로도 여러 지원사업과 함께 매해 진행됩니다. 또한, 산학협동을 통해 좋은 아이디어를 실제 프로젝트에 반영해 진행할 계획입니다.”

석동익 이사장의 축사는 평범했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앞으로의 사업 진행 방향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그것을 듣던 한진섭은 옆에서 몸을 배배 꼬았다.

“아, 지루해. 스킵하고 싶어. 딱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느낌이야.”

“좀 얌전히 앉아서 들어요. 우리들 연구비 챙겨주시는 분인데. 버릇없게.”

“어휴, 연구비에 저당 잡힌 인생이라니.”

두 사람이 떠드는 와중에도 민우는 석동익 이사장의 축사에 집중했다. 뻔한 이야기였지만, 한번 다시 생각할만한 문제를 던져주는 말들이었다.

“너무 길면 잔소리가 되니 여기까지 하지요. 축사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의 뜨거운 열정이 함께하는 무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축사가 끝나고 다음 식순이 이어졌다.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다음으로 심사위원 소개가 있겠습니다. 심사위원 여러분들께서는 연단 앞으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총 일곱 명의 남녀들이 무대에 올랐다. 다들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젊은 사람도 마흔이 넘어 보였다.

“우선 심사위원장님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인문한국지원사업단(HK)의 양기훈 단장님.”

초로의 사내가 가볍게 묵례했다. 체구는 왜소했지만 강단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위원장을 맡을 만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사회자의 소개가 계속되었다. 이번 결선에 참여한 심사위원은 총 일곱 명이었다.

인문한국지원사업단 단장 양기훈을 필두로,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원장 도유진, 사단법인 인문사회연구원 원장 문철수를 비롯해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와 사회단체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개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 결선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준비해 오신 것들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자가 안내지를 보며 발표 순서를 다시 호명해 주었다.

“발표 팀은 총 여섯 팀입니다. 그럼 먼저 팀 ‘인구론’의 발표를 듣겠습니다. 발표자께서는 연단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팀 이름을 들은 진섭이 웃음을 터트렸다.

“인구론? 설마 내가 아는 그 인구론은 아니겠지?”

“맞을 걸요. 요즘 유행어 있잖아요. 인문계 구할이 논다는.”

“팀 이름이 그게 뭐야. 감점당하고 싶었나?”

“요즘 그렇게 네이밍하는 사람들 많아요. 딱히 감점 대상은 아니죠. 오히려 현실을 잘 보여주는 거니까 좋은 느낌?”

“일종의 알레고리 같은 건가.”

그렇게 각 팀의 경연이 펼쳐졌다.

마지막 순서인 민우의 팀을 제외한 다섯 팀의 발표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인 팀도 있었고, 영상물을 기반으로 발표를 한 팀도 있었다. 심지어는 상황극으로 공연을 한 팀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기대 이상으로 즐기고 있었다.

“지루하지 않고 좋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볼거리가 풍성합니다.”

“맞아요. 논문을 읽을 때는 딱딱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발표는 대체로 흥미롭네요.”

심사위원들이 저마다의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가운데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양기훈, 도유진, 문철수였다.

그 세 사람이 인문학 관련으로는 가장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커리어에 비한다면 나머지 위원들은 들러리 느낌이었다.

심사위원장 양기훈이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별로 주목할 만한 게 나오지 않았군요.”

그 한마디에 다른 위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양기훈 좌측에 있던 중년 여성이 나섰다.

“동의합니다. 뭔가 모양새에 치중한 느낌일까요? 그나마 ‘인구론’ 팀이 좀 인상 깊었네요. 공연 방식으로 꾸밀 줄은 몰랐습니다. 의미 전달도 제법 확실하고.”

대답한 도유진도 마흔이 넘은 중년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연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문철수가 한몫 끼어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군요.”

그 한마디에 심사위원들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곧 그가 이유를 밝혔다.

“다들 예선 발표 때의 자료를 그대로 가지고 올라왔어요. 이래서는 결선의 의미가 없는데. 다들 맥을 잘못 짚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도 첫 대회인 만큼 그 정도는 고려를 해줘야 한다고 봐요. 벤치마킹이 불가능하니까.”

“으음, 그건 그렇긴 하지요.”

그때 다섯 번째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었다. 발표자에게 몇 가지 질문이 던져졌고, 그는 무난히 답변했다.

“다른 위원들께서는 더 질문 없으십니까?”

심사위원장 양기훈의 질문에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기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발표자를 치하했다.

“발표 잘 들었어요.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섯 번째 팀 발표자가 인사말을 남기고 연단을 내려갔다. 곧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것으로 후마니타스 팀의 발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잠시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마지막 307호 팀의 발표 듣도록 하겠습니다.”

심사위원을 제외하고 청중석은 거의 비어 있었다. 명인대 국문과 선배들을 제외하고는 채 오십 명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도 언론에서 나온 기자들이 대다수였다.

평일에 본선이 열린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만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어떤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다른 팀은 자리를 정리하고 뒤편에 마련된 다과 테이블로 이동해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307호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제 우리 차례네.”

“오빠 긴장되죠? 어떡해.”

이수빈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민우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심사위원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표 내내 민우는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발표자가 말을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중점적으로 체크했다. 그것으로 성향을 좀 파악할 수 있었다.

“뭐 마실 것 좀 갖다 줄까요?”

“괜찮으니까 너희들이나 가서 마시고 와.”

민우는 다시 심사위원석을 살폈다.

몇몇 심사위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양기훈과 도유진, 문철수 이 세 사람은 자리를 지켰다.

“양 단장님. 담배 끊으셨습니까? 예전 심사 같이 보실 때는 틈만 나면 나가서 피우시더니.”

문철수가 사람 좋게 물었다. 양기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폐가 좀 안 좋아져서. 의사가 끊으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제가 뭐 힘이 있습니까. 끊으라면 끊어야지. 하하하.”

“역시 우리 나이 정도 되면 마누라 다음으로 의사가 제일 무섭긴 하지요.”

양기훈은 참가자 정보가 담긴 인쇄물을 유심히 훑고 있었다. 도유진과 문철수도 뭔가 아쉬운 마음에 인쇄물을 집었다.

이제 남은 건 팀 307호뿐이었다.

“307호라.”

“명인대 대학원생들이 만든 팀이군요. 예선 성적이 좋습니다. 1위로 통과를 했네요.”

“확실히 기본기가 있는 팀이지요. 정석적인 방식으로 논문을 썼는데, 인간성에 대한 탐구가 돋보이는 논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양기훈의 평에 나머지 두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학부생으로 구성된 팀과 대학원생으로 구성된 팀의 질적인 차이는 컸다. 그래서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본선 무대를 마련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 양기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좀 걱정이 되는군요. 명인대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 아닙니까. 사고가 좀 경직되어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거야 발표를 들어보면 알겠지요.”

“이대로 끝난다면 뭔가 대회가 싱거워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발표 시간이 됐다. 자리를 떴던 심사위원들이 다시 착석했고,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다음으로 팀 307호의 발표를 듣겠습니다. 마지막 순서인 만큼 경청을 부탁드립니다. 발표자께서는 연단으로 나와 주십시오.”

민우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서 응원 소리가 들렸다.

“오빠 파이팅!”

“싹 발라버리고 와!”

민우는 잠시 우두커니 선 채로 연단을 바라보았다.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가슴 포켓에 찔러 넣었다. 순간 은은한 푸른빛이 번쩍였다. 전율이 일며 지적 고양감에 휩싸였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야.’

그때 민우가 돌발행동을 했다. 들고 나가야 할 발표 대본을 의자에 던졌다. 덕분에 수빈과 진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대본! 대본 챙겨야지!”

“필요 없어.”

패기가 넘치는 한마디였다. 그는 자신 있는 걸음으로 연단에 올랐다.

* * *

“양 단장님?”

“아아.”

그제야 양기훈 심사위원장이 정신을 차렸다. 민우의 발표에 집중한 나머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멍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완벽했다.

청중을 사로잡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물론, 단어의 선택과 표현까지 정확했다. 다른 팀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양기훈 심사위원장이 한숨을 돌렸다.

“휴우, 끝났군요.”

“예.”

“나쁘지 않았죠?”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압도적이네요.”

도유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심사위원들도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전에 저 발표자가 강연한 동영상을 무투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 역시나네요. 확실히 클래스가 다릅니다.”

“강연 동영상이요? 그게 뭐죠?”

“대전 동구청이었나. 거기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그쪽 강사로 참여했더군요.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어도 꽤 평이 좋습니다.”

문철수의 설명에 도유진이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KERIS의 수장이었다. 학술 및 교육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귀가 솔깃할 수밖에.

그녀가 물었다.

“뭐로 검색하면 나오나요?”

“인문학 아카데미로 검색하면 나옵니다. 인문학 박민우로 검색해도 나오더군요.”

“고맙습니다. 확인을 좀 해야겠네요.”

도유진은 몇 가지 아이디어를 종이에 메모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무투브 앱을 실행시켰다. 문철수가 말해준 검색어를 입력하니 동영상이 나왔다.

“도 원장님. 일단 심사부터 하심이.”

“아, 이거 실례를. 호호.”

도유진 원장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한편 발표를 끝낸 민우는 연단에서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심사위원석 중앙에서 들려온 목소리. 마이크를 쥔 것은 심사위원장 양기훈이었다.

“예선 때 제출한 논문에 포함되지 않은 몇 가지 새로운 아이템이 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오픈 라이브러리가 그렇겠군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지요?”

“저희 팀은 본선의 존재 의의에 대해 먼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선 때 쓴 자료를 그대로 발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민우는 싱긋 웃으며 청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는 자리라면 굳이 심사위원 여러분들을 모시고 발표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사실 그것은 아까 문철수가 지적한 문제이기도 했다. 다른 팀들은 예선 자료를 그대로 활용해 발표에 임했던 것이다.

그 부분만큼은 팀 307호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양기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사표에 메모했고, 다음으로 문철수가 질문했다.

“오늘 발표를 한 모든 팀들은 공통적으로 인문학 강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업이라고 생각되는데요. 하지만 팀 307호의 발표에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지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장내가 조용해지며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감점 요소가 다분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이수빈과 한진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먹을 꽉 쥐었다.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무대 위에 오른 민우는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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