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3. 작지만 큰 결실 (3) (73/500)


073. 작지만 큰 결실 (3)
2021.07.19.


― 오늘 공모전 결선 발표가 있습니다.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의외의 사람에게서 온 톡이었다. 지음사 옥상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송승현 실장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송 실장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답답할 때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난간을 짚고 빌딩 숲 너머를 바라보는 그녀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때 철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옥상으로 들어왔다.

송승현 실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 사람이 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니까.

“여기서 청승맞게 혼자 뭐 하고 있어?”

낯선 목소리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송승현 실장의 눈이 커졌다.

“여긴 웬일이에요?”

“이태준 전집 작업 때문에 전남규 차장하고 미팅 있었어. 상의할 게 생겨서 총 책임자를 만나려고 했는데 자리를 비우고 농땡이를 치고 있지 뭐야.”

“농땡이라뇨? 말이 심하시네요. 휴식이라고 해 주세요.”

어느새 나란히 선 서지훈 교수는 꺼냈던 담배를 도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왜 집어넣어요. 피워요.”

“됐습니다. 우리 여왕님 담배 연기 싫어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그런 불충을.”

능청맞은 배려에 송승현 실장이 웃었다.

그녀는 다시 난간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차들과 사람이 오가며 도심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옆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적어도 서지훈 교수가 보기엔 그랬다.

“뭔 일 있었구나?”

“그냥.”

“끝나고 술 한 잔?”

“됐어요.”

대화가 끊겼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은 하늘 저편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서지훈 교수가 먼저 운을 뗐다.

“오픈 라이브러리 엎어진 거 때문에 그래? 아까 전남규 차장한테 대충 듣긴 했는데.”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냥 회사 때려치울까 생각 중이에요.”

“잘 다니다가 왜 또 그래?”

“지내보니 뭔가 허무한 느낌이 들어서요. 큰 뜻을 품고 왔는데 결국은 나도 회사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 거 같아서.”

“일이 안 풀린다고 도망치는 게 능사는 아니지.”

송승현 실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명인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돌연 해외로 떠난 자신의 행태를 꼬집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아직도 그 일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평생 우려먹을 생각이야. 그러니까 포기해.”

“무섭네. 이 사람.”

송승현 실장이 난간에서 돌아섰다. 옥상 공원의 입구가 보였다. 서지훈 교수는 시야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데 얼마 전에 선배 제자가 일침을 날리고 가더라고요.”

“무슨?”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더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라고. 독심술이라도 가르친 거예요?”

서지훈 교수는 웃기만 했다. 그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던 송승현 실장은 내심 답답했다. 그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서였다.

“이번엔 아무 말도 안 하네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직접 보는 게 빠를 거 같은데. 음, 그래.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송 실장. 오후에 외출 걸어 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같이 재미있는 거 구경하러 가자고.”

서지훈 교수가 송승현 실장의 등을 밀었다. 그렇게 그녀는 떠밀리다시피 옥상 공원을 나섰다.

* * *

민우와 수빈, 그리고 진섭은 서초구에 위치한 한국연구재단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이곳 대회의실에서 결선 발표가 열린다.

이수빈이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일찍 왔네요. 한 시간이나 남았어.”

“거봐라. 내가 30분 정도 더 늦게 가도 괜찮다고 했어 안 했어?”

“그러다 차 막혀서 늦으면 누가 책임져요?”

다들 발표를 앞두고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만들 하고 일단 올라가자. 늦는 것보다 일찍 오는 게 훨씬 나아.”

민우가 선두에 섰다.

세 사람은 2층 대회의실에 들어갔다. 몇몇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행사 준비에 임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 현수막을 보니 결선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죠?”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젊은 여직원이 물었다. 민우가 대답했다.

“오늘 결선 발표에 참가하러 왔습니다. 팀 307호입니다.”

“아아, 어서 오세요. 일찍 오셨구나. 일단 이거 받으시고요. 자리는 지정된 곳에 앉으시면 돼요.”

‘307호’라는 종이가 붙은 자리는 맨 앞쪽이었다. 발표팀들이 앞쪽에 앉고, 관객들이 뒤쪽에 앉는 모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직원이 준 팸플릿을 펼쳤다. 재단 소개와 공모전의 의의가 적혀 있었고, 오늘 식순도 들어가 있었다.

‘중요한 건 발표순서다.’

민우는 모두 생략하고 발표순서부터 확인했다. 오늘은 총 여섯 팀이 발표에 참가하는데 맨 마지막에 팀 307호가 있었다.

“맨 마지막이네.”

“안 좋은 건가?”

“애매한 순서지.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다면 마지막이 유리한데, 그렇지 않으면 역효과야. 앞 팀 기세에 눌릴 수 있거든.”

그래도 민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발표 연습은 지나칠 정도로 했고, 무엇보다도 만년필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래도 적당히 긴장하자. 너무 풀어지지도 말고.’

민우가 마인드컨트롤을 시작할 무렵, 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어제 보내주신 프레젠테이션이 최종본인가요? 수정된 거 있으면 지금 부탁드릴게요.”

“어제 드린 파일로 틀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시고요?”

“잠시 연단에 올라가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직원은 가능하다고 답했다. 연단은 꽤 높았다. 민우는 옆 계단을 이용해 올라갔다.

한가운데에 서서 시야를 넓혔다. 맨 앞쪽에 심사위원석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넓네.’

민우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대한 스크린이 보였다. 민우는 스크린의 오른편에 서서 자연스럽게 발표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해 보았다.

몇 번 동작을 반복한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 처리는 문제없겠어. 동선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겠다. 괜히 크게 움직였다가는 스크린을 가릴 수도 있겠어.’

그때 대회의실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무심결에 그곳을 바라본 민우가 깜짝 놀랐다.

주인공은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이었다.

‘선생님이 왜? 아니, 것보다 송 실장님이 어떻게 여기에 오셨지?’

서지훈 교수가 온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옆에 송승현 실장이 있으니 더욱 놀랐다. 왜 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설마 심사위원으로 오신 건가?’

일단 민우는 연단에서 내려갔다.

갑자기 내려온 민우가 뒤쪽으로 뛰자 수빈과 진섭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좇았다. 민우는 어느새 두 사람 앞에 섰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시 심사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 너희 발표 구경하러 왔다. 전집 작업 때문에 잠깐 지음사에 올 일이 있었는데 겸사겸사 들렀지. 준비는 많이 했냐?”

“부족한 거 없이 잘했습니다.”

“갈수록 자신감이 넘쳐흐르는데?”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서지훈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한편 송승현 실장은 조금 난처했다. 그녀도 오늘 결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곳으로 끌려올 줄은 몰랐던 것.

민우가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실장님까지 와 주실 줄은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전에 한 말, 잊지 않았죠?”

송승현 실장이 깐깐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픈 라이브러리 아이디어를 빌릴 때 민우가 했던 말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때 민우는 대상 수상으로 보답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물론이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민우는 다시 지정석으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진섭이 물었다.

“누구야?”

“왼쪽이 상아대의 서지훈 선생님이고, 오른쪽이 지음사 송승현 실장님.”

“헐. 진짜? 저 미녀가 소문의 노처녀라니. 믿을 수 없군.”

그녀에 대해서는 이미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한진섭의 시선이 한동안 송 실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송승현 실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꼬리를 내린 것은 당연 진섭이었다.

“건성으로 하면 큰일 나겠네. 준비 확실히 한 거 맞지?”

“지켜보기나 해. 실전에 강하다는 게 어떤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다.”

“허세는.”

허세가 아니었다.

민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가방을 열어 만년필을 확인했다. 얼마 전 구입한 고급 케이스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년필아.’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대회의실에 사람이 하나둘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른 참가 팀들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개가 세 명 이상으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단독으로 팀을 이룬 사람도 있어 보였다.

민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참가 팀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대부분 대학생들인 거 같네. 저 팀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거 같고. 대부분 젊어. 어떤 카드를 들고나오려나.’

잠시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 불안감을 흥분으로 바꾸었다. 예선을 뚫고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비장의 무기 하나 정도는 들고 있을 것이다.

“어, 저기.”

그때 이수빈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그 끝에 이재환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재환 선배 오셨는데요?”

나머지 두 사람이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재환이 반가운 표정으로 서지훈과 악수하고 있었다. 송승현도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진섭이 짧게 소감을 말했다.

“뭔가 명인대 국문과 동문회 분위기다?”

“그러게.”

“근데 누가 위고 누가 아래지?”

“송 실장님이 01학번이니까 제일 아래일 거고. 서지훈 선생님이 99학번. 그리고 재환이 형이 98학번이니 재환이 형이 제일 위네.”

민우는 다시 올라가서 인사를 하려다 말았다.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해서 방해하기가 좀 그랬다. 이재환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위쪽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서로 격조했는지 반가운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서지훈 교수가 말했다.

“선배 소식은 들었습니다. 경문대로 가게 되셨다고요.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근데 좀 늦어서 부끄럽기도 해. 마치 늦둥이 낳은 기분이라고 할까.”

“누가 먼저 되고 말고가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교수가 된 이후에도 해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애들이랑 가깝게 지내셨나 보군요? 직접 응원도 오시고.”

서지훈 교수가 307호 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재환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꾸벅 인사했다.

이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 생각으로 이재환이 말했다.

“귀여운 녀석들이지. 뭔가 옆에 있으면 응원하고 싶어진달까. 그나저나 너 제자 잘 키웠더라? 박민우, 물건이야.”

“하하하. 제가 뭐 한 게 있습니까. 지가 알아서 잘 컸죠.”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더니 너도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서지훈 교수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이재환의 말대로 예전에 비한다면 많이 얌전해졌다. ‘열혈청년’이라고 불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때 이재환이 고개를 돌려 송승현을 주목했다.

“지음사에 있다고 들었는데. 계속 거기에 있을 생각이야?”

“예?”

“아니, 다시 대학으로 돌아올 생각 없냐고. 너도 한때 목표가 교수였잖아.”

송승현 실장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이쪽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마침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도 생겼고. 그거 끝나기 전까지는 월급쟁이 노릇 해야죠.”

“하긴, 지음사 실장급이면 연봉도 두둑하겠네. 교수 안 부럽겠어.”

“회사에 방학이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죠. 두 분이 방학 때 근사한 곳으로 여행을 갈 때 전 서류 더미에 묻혀 있어야 하니까.”

시원하게 웃은 이재환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307호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민우와 두 친구들이 다시 인사했다.

“준비들은 잘했냐?”

“완벽합니다. 근데 응원단 라인업이 이렇게 빵빵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살짝 긴장되는데요?”

“긴장은 무슨.”

이재환은 양손으로 민우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는 민우를 잘 알았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오직 딱 한마디만을 꺼냈다.

“후회를 남기고 오지 마라!”

“남김없이 다 쏟아내고 오겠습니다.”

민우가 자신 있게 웃었다.

곧 사회자의 인사말이 들려왔다.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본선 무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6557829346751.jpg

1655782934675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