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작지만 큰 결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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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 작지만 큰 결실 (2)
2021.07.16.
그때 전화가 왔다.
액정을 보니 일반 전화번호였다. 앞자리가 익숙했다. 명인대학교에서 사용하는 국번이었다. 민우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박민우입니다.”
― 오랜만이다. 연락이 없어서 내가 먼저 전화를 했군.
“아, 예.”
그런데 누구지?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긴 했는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민우가 차분히 물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시죠?”
― 불문과 이경훈이다.
“헉. 선생님!”
깜짝 놀란 민우는 허리를 펴고 정좌했다. 설마 그가 전화를 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그때 내가 명함 주지 않았나? 전화번호 저장을 안 해 놓은 건가? 이거 좀 서운한데.
“핸드폰하고 이메일만 저장을 해 놔서요. 학교 내선으로 올 줄은 몰랐습니다.”
― 어? 아. 그렇군. 바보같이 내가 내선으로 전화를 했네. 오해해서 미안하다.
“아뇨.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서 이것만 마무리 짓고 찾아뵈려고 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가 너머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왠지 그 웃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 하하하하. 비싼 친구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비쌀 줄이야.
“선생님. 그런 게 아니라…….”
― 그냥 해본 얘기야.
원래는 학회가 끝난 다음 주, 그러니까 이번 주에 그를 만나러 가려고 했었다.
그러다 차라리 공모전을 마무리한 다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찾아뵙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방문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민우는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한 이경훈 교수의 관심이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번 식사라도 하자는 말이 반쯤은 인사치레라고 생각했었다.
“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찾아봬도 될까요?”
― 흐음. 다음 주엔 내가 프랑스에 가 있을 거다. 이번 주 토요일에 출국이야.
“언제 돌아오시나요?”
― 좀 길게 체류할 생각이다. 아마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민우는 재빨리 머릿속에 달력을 띄웠다.
토요일에 출국이라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늘과 내일밖에 없다. 오늘은 목요일이고, 내일은 금요일.
민우는 난처했다.
오늘은 이미 선약이 있었고, 내일은 공모전 발표가 있는 날이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제가 내일은 대회에 참가해서 좀 정신이 없을 거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개강 후에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급한 일이시면 내일 오전에라도 가겠습니다.”
― 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긴 하지. 네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서.
장래에 대한 이야기?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전공 교수가 어떻게 자신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이신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 흐음,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게 좋겠다. 남은 방학 잘 보내고 학교에서 보자.
“예.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내 장래에 대한 무슨 이야기를?’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기에는 이경훈 교수의 전공이 너무 달랐다. 오히려 민영환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설득력이 있었다.
‘민 선생님하고 가까우셔서 뭔가 도움을 주시려는 건가?’
하지만 민우는 몇몇 일화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경훈 교수와 민영환 교수는 겉으로만 가까운 사이였다.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그가 통역을 할 때 절실히 느꼈다.
‘민 선생님이 계속 명령하듯 하셔서 가끔 불쾌한 표정을 지으셨었지.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건 좀 아닌 것 같은 데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꽤 많았다.
이경훈 교수도 명인대에서 정년을 보장받은 사람이다. 누군가의 부림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역시 랑느 박사님과 관련이 있는 일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경훈 교수가 자신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민우는 여러 가능성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됐다.
딸랑―
문이 열리며 이재환과 최민식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들을 맞았다.
“형.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두 사람이 맞은편에 앉았다. 강예진은 케이크를 준비하느라 좀 늦는 모양이었다.
최민식이 물었다.
“뭐 시켰냐?”
“아뇨. 아직. 저번에 먹었던 거 그대로 시킬까요?”
“좋지.”
직원을 불러 후라이드 반 양념 반과 소면을 추가한 골뱅이무침, 그리고 소주와 맥주를 시켰다. 민우는 테이블에 수저를 놓으며 물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글쎄. 좋다기보다는 이제야라는 생각이 들더라. 동기들 중에 제일 임용이 늦었으니까.”
“하긴, 예라가 작년에 덜컥 임용이 돼 버려서 좀 충격이긴 했죠.”
최민식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설예라 교수는 이재환과 최민식의 후배였다. 서른두 살에 임용이 됐으니 선배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만도 했다.
하지만 이재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진 않았다.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더욱 열심히 해야 할 때였다.
“예라는 뭐 반형욱 선생님 후임으로 온 거니까. 평론을 예라처럼 잘하는 사람이 또 없잖아. 신춘문예에 당선도 됐고.”
“그래도 라인 잘 잡은 게 컸죠. 반형욱 선생님 정년이 얼마 안 남으셨었으니.”
“너무 삐뚤게 생각하지 마. 실력이 없었다면 후임으로 선택되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좀 억울해서 그래요. 형이 실력이나 업적으로나 위잖아요. 단지 세부 전공이 조금 달랐을 뿐인데.”
“민식아.”
그때 문 쪽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예진이 파란색 케이크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민우의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이재환과 최민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들 분위기가 이래요? 초상집 같은데. 싸웠어요?”
“아니다. 아무것도. 근데 그건 또 뭐야?”
“뭐긴요. 케이크지.”
강예진은 박스를 열고 케이크를 꺼냈다. 생크림이 잔뜩 들어간 과일 케이크였다.
“안주 나오기 전에 촛불 켤까요?”
“촛불까지 켤 필요 있어?”
“오늘은 기념할만한 날이잖아요. 촛불 켜고 같이 사진도 찍어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후배들이 너무 고마웠다. 이재환은 그렇게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예진은 초에 불을 붙이고 직원을 불러 사진을 부탁했다. 네 사람이 사이좋게 찍혔다.
결과물을 확인한 강예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주 잘 나왔어요. 이건 나중에 인화에서 하나씩 드릴게요. 기념할 만한 일이니까.”
“생일 같은 느낌이구나.”
“생일이나 다를 게 없지요. 오라버니가 교수로 다시 태어난 날이니까. 그치?”
“그렇죠.”
자신을 바라보며 묻자 민우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술과 기본안주가 나왔다. 강예진은 배가 고팠는지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파먹기 시작했다. 민우는 옆에서 소맥을 말았다.
잠시 후 네 사람이 잔을 하나씩 들었다. 건배사는 이재환의 몫이었다.
“박사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들 하지. 교수가 되지 못한 박사와 교수가 된 박사. 너희들도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내가 끝까지 응원하마.”
“축하드려요! 이재환 교수님!”
“축하드립니다!”
잔이 부딪쳤다. 세 선배들은 한 번에 잔을 털었지만 민우는 딱 반만 비웠다. 그것을 이재환이 눈여겨보았다.
“민우 너 내일 중요한 발표 있다고 했지?”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본선 있습니다.”
“몇 시지?”
“오후 세 시부터 시작이에요.”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가서 구경할 수 있나?”
“가능해요. 공개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이따 톡으로 장소 좀 알려 줘.”
“오시게요?”
“응원하러 가야지. 우리 연구실 막내들이 큰 대회에 입상을 했는데 내가 안 가보면 쓰나. 민식이나 예진이는 바빠서 안 될 거고.”
두 사람은 내일 모두 선약이 있었다. 유일하게 시간이 비는 사람은 이재환뿐이었다.
단순히 후배들이 참가해서 응원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재환은 민우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줬지만, 역으로 많이 받기도 했다. 시간이 날 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형도 이제 바쁘실 텐데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응원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대상은 저희 거라서.”
“하하하하! 이 녀석. 자신감 봐라. 그러다 대상 못 타면 어쩌려고 그래?”
“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 봐야죠.”
결국, 이재환은 내일 결선 무대에 응원차 방문하기로 했다. 민우는 톡으로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다들 기뻐했다.
잔이 새로 돌아갔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이재환이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민우 너 겨울에 학회에서 발표하기로 했어? 아까 민 선생님 뵙고 왔는데 그 얘기 하시더라.”
“발표를요?”
강예진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민우를 노려보며 사실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맞습니다. 1학기 과제로 제출한 페이퍼 다듬어서 발표 신청해 보기로 했어요.”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이재환은 달랐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보였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싶은데. 너 이제 석사 2학기 되잖아. 박사 들어가고 나서 발표해도 충분할 텐데.”
“한번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요. 조금 시야를 넓히고 싶어요.”
“상처받을 수도 있어. 너도 봐서 알겠지만 학회 토론은 수업이랑 다르다. 토론자가 누구냐에 따라 공격을 당할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민우는 잠시 말을 줄였다.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민우 쪽으로 쏠렸다. 과연,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하고 싶은데 참는 건 제 성격에 안 어울려서요. 망신을 당할 수도 있고, 아예 발표 허가가 안 날 수도 있지만 일단 도전은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 그 정도의 각오라면야.”
이재환은 걱정을 지웠다. 그것은 강예진도 마찬가지였다. 보면 불안하지만, 결국은 해내는 것이 민우였으니까. 그의 저력을 믿었다.
“제 생각도 민우와 같습니다. 최근 이 녀석이 작업한 원고 보고 있는데, 수준 면에서는 크게 걱정이 안 됩니다. 발표도 뭐 잘하겠죠. 괜히 무투브에서 잘나가는 게 아니잖아요.”
최민식이 거들고 나서자 민우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 자신의 수준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민식이니까.
“석사 2학기생이니까 눈높이를 감안해 주지 않을까요? 오히려 학회 임원분들은 대견스럽게 생각하실 거 같은데.”
강예진도 한마디 했다. 종합적으로 판단한 이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큰 문제는 없겠네. 그런데 민우야. 민 선생님이 어디까지 도와주신다고 했나?”
그게 가장 불안한 요소였다. 오늘 이재환은 민 교수가 민우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발표할 만한 수준으로 다시 써서 가져와 보라고 하셨어요. 지도는 받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보여드리기 전에 한번 읽고 같이 얘기 좀 하자. 최대한 혼나지 않는 방향으로 해야지.”
“감사해요. 형.”
민우는 든든했다.
사실 변수는 많았다. 발표 신청이 반려될 수도 있고, 민영환 교수에게 박살이 날 수도 있다. 토론장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우는 그 모든 걱정을 뿌리쳤다.
‘논문을 완성하고 나서 걱정해도 늦지 않아. 다른 생각은 버리자. 오로지 최선을 다해서 쓰는 것만!’
민우가 잔을 들어 건배를 주도했다. 각기의 사연을 담은 잔 네 개가 부딪히며 청량한 소리를 흘렸다.
그날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민우는 새벽이 되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샤워하고 발표 자료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깊은 밤이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나쁘지 않은 꿈이었어.’
수많은 청중에게 기립박수를 받는 꿈을 꿨다. 꿈은 현실의 반대라는 말이 있지만, 민우는 이번만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깨끗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대상 받기 좋은 날씬데?”
내리쬐는 햇볕을 온몸으로 느끼며 민우는 무대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