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작지만 큰 결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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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 작지만 큰 결실 (1)
2021.07.15.
307호에서 박사 연구실까지는 채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다. 하지만 그곳으로 달려가는 사이 민우는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불안한 마음이 슬금슬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최민식이 긴급 호출을 날리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몇 달 전, 세미나실에서 그와 한번 부딪히고 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나는 건 원고 문제 정도인데. 전에 드렸던 게 마음에 안 드셨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한 소리 했을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어느새 박사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민우는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민식과 강예진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바로 왔네? 307호에 있었냐?”
“네.”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평소 잘 웃지 않는 최민식이 미소를 짓고 있다.
민우는 안 좋은 일이 아니라 뭔가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졌고, 두 선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박민우. 이거 받아.”
강예진이 잘 포장된 사각 상자를 건넸다. 포장지에 적힌 일본어를 읽으니 만주 선물세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온천도 하고 아주 신선놀음하다 왔지. 음식도 입에 딱 맞았고. 와 진짜 최고였어! 벌써 또 가고 싶은 거 있지?”
“그래서 그런지 피부가 더 좋아지신 거 같아요.”
“아부한다고 선물 더 안 떨어진다.”
“너무 뻔했나요? 하하하.”
학회 준비로 최근 마음고생이 많았던 그녀였다. 푹 쉬고 와서 그런지 생기가 넘쳐 보였다.
민우는 강예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용건은 최민식에게 있었다.
“근데 형.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이거 받아 가라고 부르신 거 같지는 않은데.”
“우리 연구실에 경사가 생겼다.”
“경사라 하시면…….”
최민식이 말한 ‘우리 연구실’은 이곳 박사 연구실을 뜻하는 게 아니다. 바로 민영환 교수 라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민우는 민영환 교수 라인을 머릿속으로 쭉 나열해보았다.
‘그중 나랑 친한 사람은 예진 누나, 민식이 형, 그리고 재환이 형인데. 잠깐. 재환이 형?’
문득 며칠 전 민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재환이 형 임용되신 거예요?”
“그래. 방금 최종 임용확정 통보받으셨다고 연락 왔다.”
“정말요? 와, 진짜 대박!”
민우는 마치 자기가 임용되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했다. 민식도 예진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진 빚이 정말 많았으니까.
강예진이 말했다.
“같은 연구실 선배니까 우리가 축하 파티라도 열어야 할 거 같은데. 민우 너 저녁에 시간 되지? 안 되면 되게끔 만들렴.”
“당연히 그래야죠!”
내일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결선이 열리긴 하지만,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대신 술은 적당히 마시기로 했다.
강예진이 최종 조율했다. 역시 그녀는 행사 준비의 프로였다.
“그럼 전에 넷이 뭉쳤던 그 술집에서 만나는 걸로 하죠. 케이크는 오는 길에 내가 사 가면 될 거 같고. 민식 오라버니는 재환 오라비한테 좀 연락해 주세요.”
“연락할 거 없다. 지금 아마 학교에 와 계실 거야. 민 선생님 찾아뵙는다고 하셨어.”
“그럼,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되겠네요.”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는 좀 곤란했다. 민우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저 내일 공모전 결선 발표 있는데, 이따 저녁 전까지 연습 좀 하고 술집으로 바로 가도 될까요?”
“맞다. 그러고 보니 너희 내일 결선이구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는 예진. 요즘 들어 감정의 표현이 다양해졌다. 처음엔 무서운 표정뿐이었는데.
“그런데 괜찮겠어?”
“술 너무 많이 안 마시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래. 그럼. 연습하고 와. 여섯 시쯤 보자.”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307호로 향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재환이 형 진짜 잘됐다! 왠지 이번엔 일이 잘 풀릴 거 같았어.’
설예라 교수처럼 젊은 나이에 임용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재환은 좀 운이 없는 편이었다. 실력에 비해 임용이 늦었다.
사실 그는 최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양육에 시간을 많이 뺏겼고, 또 돈은 돈대로 들어갔다.
경기권 대학에 강의 교수로 일을 하고 있긴 했지만 연봉은 2천 남짓. 그걸로 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이재환에게 축하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이 소식을 동기들에게 전파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냐?”
307호로 돌아오니 진섭은 여전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뭐라도 해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저렇게 있을 거 같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강예진이 준 만주 선물세트를 뜯었다. 형형색색의 만주가 사각 케이스에 들어 있었다. 맛있어 보였다.
민우가 진섭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섭섭. 일어나 봐.”
“뭐야. 살아왔네? 꿈인가.”
“헛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하나 먹어. 우울할 땐 단 게 최고라더라.”
민우가 만주 세 개를 집어 진섭에게 주었다.
진섭이 무기력하게 껍질을 까 한입에 만주를 넣었다. 영혼 없는 지적질이 시작됐다.
“맛은 나쁘지 않네. 근데 웬 과자냐?”
“예진 누나 얼마 전에 일본 여행 다녀왔잖아. 하나 사 오신 거 같더라고.”
“헐. 너한테만 선물 챙겨준 거야? 와 인간차별. 나도 같은 연구실인데!”
민우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넌 왜 맨날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냐? 당연히 같이 먹으라고 주신 거지.”
“그래? 그럼 두 개 정도 더 가져가도 되겠군.”
진섭은 뻔뻔하게 만주 두 개를 더 뺏어갔다. 수빈이의 몫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우가 물었다.
“근데 요즘 예린이랑 잘 안 돼? 얼마 전까진 분위기 좋았잖아.”
“뭐 잘 되다가도 안 되는 게 남녀 관계 아니겠냐.”
“모쏠이 할 말은 아닌 거 같다만.”
“하, 이 새끼 연애 시작하더니 사람이 변했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진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엎드렸다. 민우는 그가 평소처럼 엄살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지 말고 자세히 말해 봐. 응? 형이 도와줄 만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한숨을 내쉰 진섭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뭐랄까. 뭔가 좀 애매한 부분이긴 한데. 그 녀석, 왠지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는 거 같단 말이지. 은근히 선 긋는 것도 그렇고.”
“이야, 또 혼자 소설을 쓰고 있었구만. 걔 원래 은근히 선 잘 그어. 사교적이긴 한데 깊게 들어오려고 하면 선을 쓱 긋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어?”
“내가 걔를 몇 년을 봤는데 모르겠냐. 아무튼, 좀 더 친해지면 나아질 테니까 좀 더 근성 있게 도전해 봐.”
“말이 쉽지.”
위로가 잘 통하지 않았다. 진섭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외롭고 우울해 보였다.
민우는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꼈다.
“아니면 2년만 잘 버텨 보든가. 솔로 30년. 나는 실패했지만 대마법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놓치지 마라.”
“그래. 좋아. 후후후…… 이왕 이렇게 된 거 헬파이어 마법 배워서 세상을 싹 불로 정화시켜버려야겠어. 제일 먼저 박민우와 이수빈을!”
“망상은 거기까지. 가자. 시간 다 됐다.”
“넵.”
다행히 진섭은 기운을 좀 차렸다. 두 사람은 공모전 발표 준비를 위해 세미나실로 이동했다.
* * *
“선생님. 저 왔습니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은 이재환이 민영환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민 교수는 이미 소식을 들었다.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축하한다. 얘기는 먼저 들었다. 드디어 너도 빛을 보는구나. 응?”
“다 선생님 덕입니다. 힘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힘은 무슨. 제자 앞길인데 내가 잘 챙겨 줘야지.”
두 사람은 가운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이재환은 값비싼 홍삼 선물세트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민영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 선생이라고 불러야겠는데? 하하하!”
“아유,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그럴 수 있나? 이제 어엿한 교수인데. 체면을 잘 세워 줘야지. 경문대가 그리 만만한 곳도 아니고.”
“학부 때부터 선생님께 신세 진 게 많아서 체면을 세울 게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 거둬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재환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민영환 교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옛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생각난다. 넌 참 독특했었지. 네가 처음 내 수업을 들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군. 대학원에서 좀 더 가르치고 싶다는.”
“저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께서 대학원 권유를 안 해주셨다면 지금쯤 뭐 하고 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아무튼, 잘돼서 다행이다. 이제 돈도 좀 모일 거고, 집도 넓히고 가족들과 잘 사는 일만 남았구나.”
“예.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지요.”
이재환은 학문적 욕망이 큰 사람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나태해지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든든한 제자였다. 어떻게든 곁에 붙잡아 둬야 했다.
“이제 너도 교수 직함을 달았으니 학회 일 좀 도와야지? 마침 내가 하는 학회에 학술이사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어때?”
“선생님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학회장님께 따로 연락을 드려보마. 아무튼, 이제 민식이와 예진이만 남았구나. 녀석들 챙기다 보면 내 정년도 끝나겠지. 허허, 세월 참 빨라.”
마지막 말, 이재환은 동의했다. 학부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박사 논문을 쓰고 교수가 되었다. 지나간 세월이 찰나와 같았다.
그때 핸드폰에 톡이 하나 왔다. 팝업 알림으로 민우가 보낸 축하 메시지가 떴다. 문득 궁금한 게 있어 민 교수에게 물었다.
“선생님. 박민우 말입니다. 그 친구는 키워볼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너희들 챙기기도 바쁜데 키워줄 여력이 있겠어? 너도 알겠지만 교수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녀석은 모교에 서지훈 선생이 있으니 뭐 알아서 하겠지.”
이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추세라면 명인대 출신들도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민식이는 어떻게든 풀리겠지만 예진이는 힘들지도 모르지.’
한편으로 이재환은 안타까웠다. 민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민우는 잘 다듬으면 크게 성장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야. 학부가 상아대라면 임용은 어려울지도…….’
너무 깊게 들어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재환이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박민우 그 친구, 재능이 좀 보이더군요. 여기에서 박사라도 잘 마쳐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야 자기 하기 나름이겠지? 운도 필요할 거고. 그래도 최근에 열심히 하려는 모양이더군. 겨울 학회에 발표를 하겠다고 나섰어.”
“발표를요?”
“그래. 다른 학회도 아니고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말이지. 껄껄껄.”
민영환 교수는 시원하게 웃었다.
처음 민우가 찾아와 발표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화가 났다. 학회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판단했다.
이번 기회에 본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분명히 확인한다면, 더는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재환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그럴 만도 했다. 발표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발표할 수준으로 논문을 쓰려면 꽤 힘들겠는데요.”
“뭐 어쩔 수 있나. 제자가 해보고 싶다는데 내가 맞춰 줘야지.”
“겨울 학회가 기대되는군요. 민우 녀석이 발표하게 된다면 저도 꼭 참석을 해야겠습니다.”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딱히 입 밖에 꺼내진 않았다. 민우가 연단에 서는 일은 아마 없을 거라는 말을.
* * *
공모전 발표 최종 조율이 끝났다. 진섭이 먼저 자리를 떴고, 민우와 수빈은 307호에 들렀다 같이 인문관을 나섰다.
“근데 오늘 섭섭 오빠 기운 없어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
“글쎄. 컨디션이 좀 안 좋았나 보지.”
민우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서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지만 지킬 건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성 간의 문제는.
“아무튼, 오늘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내일 발표해야 하니까.”
“이수빈 씨. 나 바보 아닙니다.”
“선배들이 많이 마시게 할까 봐 그러지.”
“안 그래도 말씀드렸어. 내일 공모전 발표라 많이 못 마신다고. 술자리 끝나면 연락할게. 조심히 가.”
“오빠?”
뭔가 잊은 게 없냐는 듯이 바라보는 수빈. 민우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한마디 했다. 수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잘 다녀와요.”
“이따 연락할게.”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민우는 명인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전에 출판 기념으로 술자리를 벌였던 술집으로 들어갔다. 인테리어가 조금 바뀌었는지 약간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안 오셨나 보네.’
일단 자리를 잡고 세 사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