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속마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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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 속마음 (2)
2021.07.12.
“생각해 보니 고맙다는 말을 못 했더라고. 나 입원했을 때 이것저것 챙겨준 거 있잖아. 고마워. 덕분에 잘 지냈어. 병원에 아는 사람 있었던 거야?”
“그게…… 병원장님이 저희 삼촌이에요.”
“아. 어쩐지. 평소보다 의사들이 더 자주 오더라. 간호사들도 훨씬 친절해지고. 마치 VIP가 된 느낌이었어.”
연주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때 일을 떠올리니 왠지 식욕이 달아났다.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게 행동해서…….”
“아니. 사과받으려고 하는 말 아냐. 사실 그때는 좀 이해가 안 됐거든.”
얼굴을 숙이고 있던 연주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민우는 상냥히 웃고 있었다. 약간의 미안함도 보였다.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너랑 친한 게 아니었잖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래서 병원비를 덥석 받기가 좀 뭐 했던 거야. 뭐, 우리가 좀 더 가깝고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민우의 말을 얌전히 듣던 연주가 잔을 들고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입 안이 썼지만, 마음의 씁쓸함보다는 달콤했다.
“친한 친구들한테 이 얘기했었는데 다들 왜 호의를 거절하냐고 몰아세우더라고. 너 정말 착한 애라고 하더라. 다들.”
“제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냥 생각의 차이야.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까? 살다 보면 서로 좀 예민한 부분이 있잖아? 그런 거지 뭐. 나도 이번 일로 많이 배웠어. 어른이 되기가 참 쉽지가 않네.”
민우는 노릇노릇 잘 익은 고기를 연주의 앞접시에 덜어 주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던 연주는 다시 젓가락을 집었다.
하지만 고기를 집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친해지고 싶었어요. 오빠랑. 그래서, 그랬어요.”
“연락도 하고 자주 보면 금방 친해졌을 텐데. 서로 바쁘다 보니 얘기할 시간이 없긴 했다. 게다가 너 학교도 못 나오게 됐으니.”
민우는 연주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녀가 많이 마시지 않도록 딱 절반만 따랐다.
“이제 대학으로 돌아올 일은 없는 거야?”
“아마도요.”
“아쉽네. 그래도 이렇게 가끔 만나서 고기 구워 먹자. 밀린 얘기도 하고.”
연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연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정연주. 괜찮아?”
민우는 좀 더 가까이 앉았다. 휴지를 몇 장 뽑아 연주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눈물을 더 쏟아냈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민우는 등을 다독였다.
울지 말라고 하진 않았다.
오히려 실컷 울고 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죄송해요. 추한 모습 보여서…….”
“뭐가 추해? 실컷 울어. 속 시원해질 때까지.”
연주가 술잔을 쥐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만. 너 좀 취한 거 같다.”
“마실래요.”
저항이 느껴져 민우는 손을 뗐다. 연주는 한 번 훌쩍이고는 씩씩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에 댔다.
곧 잔이 깨끗하게 비었다.
“실은 어제…… 아버지한테 회사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전에 오빠가 준 책 읽으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주는 일부러 인문서를 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읽으면 다시 학교에 돌아가고 싶어질까 봐. 민우는 그제야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구나. 생각이 짧았다.’
신중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조금만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민우도 한잔 마셨다.
그리고 술병을 들고 빈 잔을 채웠다. 이번에도 연주의 잔엔 절반만 따라주었다.
“미안해. 다른 책을 줄 걸 그랬네.”
“아녜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걸요. 다른 책도 구해서 읽어보려고요. 그래서 부러워요. 저도 랑느 박사님 만나고 싶은데.”
표정을 보니 진심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도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부러워할 거 뭐 있어? 조만간 가족들하고 같이 한국에 오신다고 하더라. 그때 기회가 되면 자리 주선해 볼게. 너 불문학 전공이잖아. 랑느 박사님도 좋아하실 거야.”
“정말 고마워요. 오빠.”
“그런데 어떻게 됐어? 아버지한테 얘기한 거.”
연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오셔서 혼내셨어요. 쓸데없는 데에 시간 낭비하지 말래요. 진짜 쓸데없는 건 따로 있는데…….”
연주의 눈에서 눈물이 한 움큼 쏟아졌다.
민우는 답답했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다독여주고 같이 술을 마셔주는 게 전부였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인문학이라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하면 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걸까요? 공부가 짧아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민우는 말문이 막혔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민우는 답을 찾지 못했다. 전공서가 알려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연주가 잔을 들었고, 민우도 잔을 들어 부딪쳤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죠?”
“그럴 거야. 분명히.”
그렇게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연주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회사에 대한 불만, 가족 간의 불화 등 주제는 광범위했다.
민우는 참견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이렇게 해보라고 제안을 하지도 않았다.
‘지금 연주에게 필요한 건 가이드가 아니라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맞장구쳐주고, 다독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민우는 연주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여리고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상처도 쉽게 받고, 소심한 데다가 걱정도 쓸데없이 많은 타입이었다.
무의식중에 재벌 3세라는 선입견으로 그녀를 재단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취중에 드러난 그녀의 본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금처럼.
“내일이 토요일이었으면 좋겠다아…….”
혀가 살짝 꼬였나 보다. 발음이 느릿느릿 귀여웠다.
“내일 토요일 맞는데.”
“에? 정말여?”
“응.”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던 연주가 주머니를 뒤졌다.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곧 인상을 찌푸렸다.
“거짓말쟁이잉. 내일 목요일인데에.”
“그걸 또 확인하고 있냐? 하하하.”
어느덧 테이블에 빈 병이 세 개로 늘었다. 연주에게 반 잔씩만 따라줬으니, 민우가 두 병, 그리고 연주가 한 병을 마셨다.
다행히 연주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속이 좀 후련해졌는지 잘 웃었다.
“앞으로는 오빠한테 연락 자주 할 거야…… 매일매일 할 거야아.”
술잔을 내려놓던 연주가 몸을 휘청거렸다. 깜짝 놀란 민우는 어깨를 감싸며 부축했다.
“괜찮아?”
“으, 어지러워요…….”
“너무 많이 마셨나 보네. 이제 그만 가자. 걸을 수 있겠어?”
대답이 없었다. 완전히 취한 모양이다.
잠시 고민한 민우는 연주를 붙잡은 채로 가방에 손을 뻗었다. 주머니를 뒤져 예전에 비서실장 유진태에게 받은 명함을 찾았다.
‘안 버리길 잘했네.’
유진태라면, 분명 이곳으로 달려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거니 그가 전화를 받았다. 민우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유진태는 즉시 가겠다고 답했다.
민우는 연주를 부축해서 자리를 옆으로 옮겼다. 벽에 등을 기대게 했다.
“괜찮아? 조금만 기다려. 유 실장님이 너 잡으러 오신 댄다.”
“싫어어.”
“싫긴 뭐가 싫어. 얌전히 차 타고 집에 가.”
“싫어어어!”
소주 두 병 정도로는 취하지 않기 때문에, 민우는 유진태 실장이 올 때까지 연주를 잘 보살폈다.
곧 근사한 세단이 식당 앞에 멈춰 섰다.
감색 수트를 입은 유진태 실장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인사하는 것을 잊을 정도로 그는 걱정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드신 겁니까?”
“한 병 정도요.”
“소주를 한 병이나 말입니까?”
잠시 말문이 막힌 유진태 실장이 조심스럽게 연주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팔을 뿌리쳤다.
“저리 가아. 오빠랑 있을 거야!”
민우는 당황했다. 평소 자신이 알던 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얘가 많이 취했나 보네. 원래 이래요?”
“아닙니다. 아가씨는 술을 잘 못 드셔서. 저도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일단 나가는 게 좋겠네요. 제가 부축할게요.”
민우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연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차에 태우려고 하니 저항이 심했다. 정말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밖에서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진태 실장은 계산하고 나왔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박 선생님도 집에 바로 가시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전 버스 타고 들어가도 됩니다.”
“그래야 아가씨가 차에 타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랐다. 그러자 연주가 얌전히 따라 탔다.
푹신한 의자에 앉자 연주는 금방 잠이 들었다. 새근거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곧 차가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쉬시는데 밤늦게 연락을 드려서.”
“아뇨.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으시는 것 같더군요. 수행비서가 막 보고를 해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랬군요.”
“명인대 정문으로 모셔다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운전대를 잡은 유진태 실장은 룸미러로 연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민우의 어깨에 기댄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아가씨, 많이 우신 모양입니다.”
“얘기 들어보니 요즘 좀 힘든 것 같아요. 남의 집안일에 참견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분위기가 좀 안 좋은가 봐요?”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힘드시다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과연 큰 그룹의 비서실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연중에 집안 분위기를 얘기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간접적으로 언급을 피했다.
그것으로 한동안 대화가 끊겼다.
신호가 걸렸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유진태 실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평소에 아가씨가 박 선생님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제 이야기를요?”
“학교에서 꽤 의지가 많이 되셨던 모양이더군요. 사람들한테 쉽게 정을 안 주시는 분인데, 박 선생님은 예외인 것 같습니다.”
민우는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강철훈 교수와 면담을 하고 나오는 길에 연주와 카페에 갔었다. 그리고 그녀가 물었었다. 왜 공부를 하게 됐냐고. 대학원에 온 걸 후회하지 않냐고.
‘연주도 <소설의 이론> 서두를 외우고 있었지. 어찌 보면 닮은 부분이 있는 거 같아. 학문적으로.’
그래서 의지를 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이 들었다. 물론 거기엔 번역 프로젝트도 한몫했을 것이다.
곧 차가 멈춰 섰다. 창문 너머를 보니 명인대 정문이 있었다.
“태워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히 왔네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민우는 연주가 깨지 않게 슬그머니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닫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유진태 실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박 선생님.”
돌아가던 민우가 멈춰 섰다. 유진태 실장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그는 미소로 진심을 가렸다.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실장님도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민우가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진태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엑셀을 밟았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연주에게 톡이 왔다. 어제 챙겨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실수한 게 없었는지 걱정하는 걸 보니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 그걸로 놀릴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연주 성격이라면 농담을 다큐로 받을 게 분명하니까.’
피식 웃은 민우는 답장했다. 힘내라고, 다음에 또 보자고.
덕분에 민우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연구실로 나올 수 있었다. 엉켜있던 매듭을 시원하게 풀어버린 느낌이었다.
인문관 307호에는 진섭이 있었다. 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 아침부터. 어제 또 달렸어?”
“아니.”
민우가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진섭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럼 왜? 예린이한테 차이기라도 했냐?”
진섭이 움찔했다. 깜짝 놀란 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던져 본 말이었는데 낚일 줄이야.
“진짜야? 고백했어?”
“아니. 뭐. 차인 건 아니고, 요즘 좀 연락이 뜸해서.”
“에이. 난 또 뭐라고. 서울 올라올 준비로 바쁜가 보지. 개강 얼마 안 남았잖아.”
“남 일이라고 막 얘기하네.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해요. 쯧.”
그때 진동을 느낀 민우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확인해 보니 최민식에게 온 톡이었다.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긴급 호출이었다.
“어디 가?”
“민식이 형 호출. 뭐 일 터졌나 봐.”
“오, 잘 가게 친구여. 내 친히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겠소!”
민우는 곧장 박사 연구실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