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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9. 속마음 (1) (69/500)


069. 속마음 (1)
2021.07.09.


물론 민우는 본선 무대에서는 만년필을 들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스스로 연습하고 노력했다. 도구에 의존하는 것은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렇게 민우는 다시 시연을 시작했고, 몇 번의 지적을 듣고 나서야 끝을 봤다.

진이 다 빠졌다.

“휴,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고생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민우가 연단에서 내려왔다. 진섭과 수빈은 세미나실 뒷정리를 시작했다.

이곳엔 연단과 마이크가 있어서 일주일간 빌렸다. 사적인 용도로 사용은 불가능하지만 이수빈이 힘을 쓴 덕에 가능했다.

“그래도 처음 시연했을 때보다 훨씬 나아지지 않았어요?”

진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그래.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긴 하지만.”

“오빠가 너무 눈이 높은 거 같아요. 완전 배우 잡는 영화감독 보는 거 같다니까? 지금 이 정도로도 통할 거 같은데.”

“연습은 지나쳐도 나쁘지 않지. 뭣보다 네 눈은 못 믿어. 뭐가 씌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진섭의 일침에 수빈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물을 마시며 쉬던 민우는 피식 웃었다. 솔로가 한을 품으면 무서운 법이다.

곧 세 사람이 세미나실을 나섰다.

“난 열쇠 반납하고 바로 간다. 내일 보자.”

진섭이 먼저 자리를 떴고, 민우와 수빈은 307호에서 짐을 챙기고 인문관을 나섰다.

“도서관 가요?”

“아니. 오늘 약속이 있어서. 누나 회사에 가봐야 해.”

“아 참. 연주 만난다고 했었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수요일. 일전에 연주와 약속을 한 날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선우기획에서 보기로 했다.

사실 수빈은 민우가 연주를 만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불안하기도 했고, 질투도 났다. 하지만 겉으로 티는 안 냈다. 그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믿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얘기 잘 들어주고 와요. 요즘 많이 힘든 거 같던데.”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려나…….”

고민스러웠다. 같은 남자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이성을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때 좋은 생각을 떠올린 민우가 물었다.

“이따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합류할래? 오랜만에 같이 얘기도 할 겸.”

“아쉽지만 과외 있어서 안 돼. 다음 기회에.”

싱긋 웃은 수빈이 버스에 올랐다. 창가에 앉아 민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우도 마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쩔 수 없네. 나 혼자서 해결하는 수밖에.’

곧 다른 버스가 왔다. 마침 선우기획 방향으로 바로 가는 버스였다. 민우는 버스에 올라 연주에게 톡을 보냈다.

― 지금 버스에 탔어. 이따 보자.

버스가 시원한 엔진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목적지에서 내려 10분 정도를 더 걷자 선우기획 건물이 나타났다. 들어가기 전에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아직 답이 없네. 바쁜가?’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읽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일단 민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에게 연락해볼까 싶었지만, 일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이사실로 직행했다.

“어서 오세요. 전에 오셨던 박민우 씨죠?”

여직원이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알은 척을 했다. 민우도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님과 약속이 있어서 왔는데요. 안에 계시죠?”

“예. 계십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여직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선약이 있었던 걸까? 민우는 알겠다고 답했다.

때마침 이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키가 작고 배 나온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풍채가 예사롭지 않은 중년이었는데, 고집스럽게 물어진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였다.

‘어? 저 사람은 분명…….’

민우는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인터넷 뉴스에서 자주 보던 그 얼굴이다.

대한그룹 부회장 정만학.

연주의 아버지이자, 차기 대한그룹 회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때 정만학의 뒤를 따라 나오던 연주가 민우를 보고는 살짝 놀랐다.

“오빠 오셨어요?”

“오빠?”

정만학이 걸음을 멈추고 민우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막내딸이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거슬렸던 것이다.

민우의 앞에 선 정만학이 근엄하게 물었다.

“자네는?”

“처음 뵙겠습니다. 박민우입니다.”

“아, 그게…… 같은 학교 다니는 오빠예요. 오늘 일이 있어서 잠깐 왔어요.”

“그러냐?”

연주가 거들어준 덕에 정만학은 쉽게 물러났다. 나가기 전 그녀에게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민우를 힐끔 바라보고는 갈 길을 갔다.

두 사람이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 여직원이 시원한 음료 두 잔을 준비했다.

“죄송해요. 놀라셨죠?”

“아니. 별로. 근데 아버지는 왜 오신 거야?”

“그냥요. 가끔 오셔요.”

연주는 씁쓸히 웃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바쁜데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니지? 좀 더 기다려도 상관없는데.”

“아녜요. 오늘 일은 이제 다 끝났어요. 퇴근해도 괜찮아요.”

연주는 조금 무리를 해서 오늘 일을 미리 다 끝내 놓았다. 저녁까지 민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퇴근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참. 오빠. 전에 주신 랑느 박사님 책. 잘 읽었어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

하지만 민우는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책은 도화선이 되었다. 억눌러왔던 학문에 대한 갈망이 터지고야 만 것.

그래서 연주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 일은 그만하고 싶다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정만학 부회장이 친히 선우기획에 방문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딸의 반항을 용인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민우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서운함과 반가움이 한데 뒤엉켜 가슴이 찌릿했다.

“운 좋게 학회에서 랑느 박사님하고 친해졌어. 겨울에 프랑스에 한번 다녀오려고.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셨거든.”

“부러워요. 정말…… 저도 한번 다녀오고 싶은데. 5년 전에 한 번 가본 이후로는 못 가봤네요.”

“너도 휴가 내고 다녀오면 되잖아.”

잠시 말이 끊겼다. 민우는 음료를 홀짝거리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근데 오빠.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예요? 혹시 제가 또…… 실수한 게 있나 싶어서.”

“실수는 무슨. 그런 거 아냐. 그냥 이야기 좀 해볼까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거야.”

“이야기요?”

“전에 내가 책 줬던 그날이 자꾸 맘에 걸려서. 너무 내 이야기만 했잖아. 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텐데.”

연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또 혼나는 게 아닐까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아녜요. 전. 그게…….”

연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는 곧잘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만두고 나서부터 수비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만큼 생각이 많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민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나?’

지금 연주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는 없다. 하지만 잠시나마 그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다.

민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술 한잔하러 갈래?”

“술이요?”

“우울할 땐 삼겹살에 소주만 한 게 없지. 생각해 보니 너랑은 한 번도 안 마신 거 같아서.”

삼겹살에 소주?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연주가 엉겁결에 따라 일어났다.

* * *

민우는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삽겹살집으로 연주를 안내했다. 회사 사람과 마주치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배려한 것이다.

원통으로 된 의자와 간이 테이블. 한마디로 서민적인 분위기였다.

연주는 다소곳이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민우의 눈엔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런데 안 와봤어? 대학 다닐 때 자주 갈 기회가 있었을 텐데. 학교 근처에 꽤 많잖아.”

“과 생활을 안 해서요.”

“이야. 소문으로만 듣던 공부벌레가 여기에 있었어.”

소주도 마셔본 적이 없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왠지 그 말을 하면 자리가 금방 끝날 거 같았다. 그건 싫었다.

“그럼 좀 더 편한 데로 갈 걸 그랬나. 의자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요.”

민우는 벽에 걸린 앞치마를 하나 집어 연주에게 주었다.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기름이라도 튀면 곤란할 것이다.

연주는 앞치마를 둘렀다. 그 어색한 모습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저…… 많이 이상해요?”

“아니, 괜찮아. 그냥 웃음이 나와서. 사장님! 여기 삼겹살 3인분하고 이슬이 한 병 주세요!”

잠시 후 고기가 나오고, 민우가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렸다. 그리고 소주를 따서 연주의 잔을 채웠다.

“주량은 얼마나 돼?”

“어, 그게. 저, 아마도…… 반병은 마셔요.”

연주가 횡설수설하는 게 좀 이상했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천천히 마셔도 되니까 적당히 마셔. 너무 많이 마시면 다음 날 고생하니까 주량은 알아서 조절하고. 자, 건배할까?”

잔이 부딪쳤다.

두 손으로 소주잔을 잡은 연주가 눈을 깜빡였다. 과연 이 투명한 술은 무슨 맛일까. 와인처럼 달콤할까?

연주는 조심스레 술잔을 입에 댔다.

“으아.”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썼다. 이런 걸 한 번에 털어 넣는 민우가 신기했다.

“왜 그래?”

“오, 오랜만에 마시니까 써서요.”

“써서 다행이네. 간혹 소주가 달게 느껴지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은 정말 위험하거든.”

연주는 숨을 참고 반 잔 정도를 한꺼번에 마셨다.

“크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가 나왔다. 잠깐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뒷맛이 너무 썼다. 절로 한쪽 눈이 찡그려졌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본 민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그런 표정 지을 줄도 알아? 하하하. 이거 진즉 술을 마실 걸 그랬네.”

“으…….”

연주는 인상을 펴지 못했다. 민우는 안줏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렸고, 반찬으로 나온 당근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주었다.

“정말 주량 반병 맞아? 반 잔 아니고?”

“마, 맞아요.”

“수상한데. 조금만 마셔. 그러다 취하면 곤란하니까.”

“괜찮아요. 비서…….”

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서가 회사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오늘은 비서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저, 잘 마셔요.”

술기운 때문일까? 평소에는 부리지 않는 고집을 부리는 연주였다.

“알았다. 너도 성인인데 알아서 잘 조절하겠지. 고기 금방 구워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소주랑 같이 먹으면 기가 막힌다.”

치지지직―

고기가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곧 민우가 노릇노릇한 고기를 연주의 앞접시에 옮겼다.

“다 익었으니까 먹어봐.”

“잘 먹을게요. 오빠도 많이 드세요.”

연주는 작은 고기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게 너무 맛있었다. 집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이번에는 좀 더 큰 고기를 집었다. 토끼처럼 오물오물 씹었다.

“맛있지?”

끄덕끄덕.

연주는 다음 고기를 향해 젓가락을 움직였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논문은 못 써도 고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굽거든. 자, 여기 가루에 찍어 먹어봐. 이것도 별미지.”

연주는 민우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표정이 밝아졌다. 입맛에 정말 딱 맞았다.

“진짜 맛있어요.”

“오늘 안 데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너 여기 단골 되는 거 아냐? 하하하.”

민우는 빈 잔을 채웠다. 자작하는 민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연주가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오빠. 제가.”

“괜찮아. 그냥 편하게 마시자. 짠.”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쳤고, 연주는 남은 잔을 한 번에 비웠다.

곧 몸에서 반응이 왔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면서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앞이 조금 어지러웠다. 연주는 손바닥으로 양 볼을 만졌는데, 뜨거웠다.

그때 민우가 말했다.

“고마웠어.”

조금 갑작스러웠다.

연주는 볼에서 손을 떼고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태연히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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