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8. 겨울을 기다리며 (2) (68/500)


068. 겨울을 기다리며 (2)
2021.07.08.


7월이 끝나고 찾아온 첫 번째 월요일. 민우는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갔다.

307호에 짐을 풀고 옆에 있는 박사 연구실을 찾았는데, 불이 켜져 있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민식이 있었다.

“형. 안녕하세요.”

“그래. 학회는 어땠어? 사람 꽤 많이 왔다고 들었는데.”

“엄청 많이 왔죠. 학회 설립 이후로 최고 스코어라고 하던데…… 아무튼 잘 끝났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이제 좀 여유롭겠다?”

“이번 주 지나면 공모전 본선도 다 끝나니까 학기 시작하기 전까진 단행본 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본선 프레젠테이션은 이번 주 금요일 오후에 잡혔다. 오늘 그 건으로 팀 307호가 모이기로 했다.

민우는 이번에도 철저히 연습해서 무대에 서기로 했다.

“공모전이라.”

그렇게 운을 뗀 민식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마디 덧붙였다.

“확실히 너희들이 젊긴 한가보다.”

“예? 젊다뇨?”

“우리 때는 공모전 그런 거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 혼자 공부하고 연구업적 쌓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쪽엔 공동연구가 거의 없잖아.”

“확실히 그건 그래요. 이공계 쪽은 굉장히 활발한 것 같던데.”

국문과에서는 팀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희박하다. 어학 분야는 코퍼스(corpus) 같은 공동 프로젝트가 있지만, 문학 쪽은 거의 없다.

그래서 민우의 팀 307호는 특별했다. 현대문학 전공자끼리 모여 뭔가를 하려는 게 다른 학우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신선해 보였다.

민우는 이렇게 생각했다.

‘팀을 더 키워야지. 다음 학기부터는 예린이도 들어오니까 멤버를 좀 더 늘려야겠어.’

민우는 팀 307호의 몸집을 불려 나갈 계획이었다. 인문학 스터디부터 시작해서 공동 연구는 물론, 사회공헌활동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여력이 되면 인문대 다른 전공 학생들도 받아야지. 학문의 다양성이야말로 발전 요소 중 가장 중요하니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민식은 한글 파일을 열고 논문을 쓸 준비를 했다. 그가 고개를 민우 쪽으로 돌렸다.

“아무튼, 최소 장려상은 확보한 거지? 대상 타면 내가 직접 인문관에 플래카드 걸어주마.”

“감사합니다. 지금 미리 업체에 주문해 놓으셔도 될 거 같은데요.”

“하하하하!”

민우의 이런 건방짐이 싫지 않았다.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민식이 손을 내밀었다.

“됐고. 원고나 줘 봐.”

민우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황금 같은 주말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밑 작업을 해 둔 것이다.

가방에서 원고를 꺼내 민식에게 건넸다. 서론 두 번째 챕터에 들어갈 연구사검토 기초 자료였다.

민우가 설명했다.

“연구물을 시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계보를 따져서 구분해 봤습니다.”

“계보로? 네 수준으로는 너무 빡세지 않으려나?”

“그래서 일단 정리 수준으로 썼어요. 이걸 실제로 원고에 풀어쓸지는 형하고 한번 상의해 보려고요.”

“쯧, 귀찮게 됐구만.”

말은 그렇게 해도 민식은 민우의 원고를 꼼꼼히 읽었다. 몇몇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머지는 직접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확인하는 것도 일이다. 민우가 제시한 논문을 찾아 읽고 그 계보를 따져야 했으니까.

그래도 민식은 보람을 느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민우는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나가며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일단 이건 내가 접수하고 좀 더 검토해보마. 한 이틀 걸릴 거 같은데, 그 틈에 공모전 준비해.”

“옙.”

민식이 자료를 읽으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민우는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았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좀 여유가 있었다.

“근데 형. 요즘 박사 연구실 왜 이렇게 조용해요? 평소에는 사람 좀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전멸이네요.”

“휴가철이잖아. 다들 놀러 갔겠지. 예진이는 일본 다녀온다고 했고, 재환이 형은 좀 일이 있어서.”

“일이요?”

민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었던 것.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이재환은 민우의 대학원 생활에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순조롭게 시간을 보낼 순 없었을 것이다.

“큰일은 아니죠?”

“응. 그런 건 아니고, 요즘 교수임용 심사 때문에 좀 바쁘셔. 총장 면접까지 올라가신 모양이더라고.”

“와, 그건 좋은 소식이네요. 어느 대학에서요?”

“경문대.”

경문대는 수도권에 위치한 사립대학이었다. 재학생이 3천여 명 정도 되는 작은 대학이지만, 중요한 건 학교의 크기가 아니라 임용이다.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총장 면접까지 올라갔으면 승산이 있는 거 아닌가요?”

“총장 면접이야 명인대 간판만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지. 삽질만 안 한다면야.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

최민식이 한숨을 내쉬며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비판적인 어조였다.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총장 면접까지 올려놓고 뽑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아. 특히 요즘 프라임 사업 때문에 학과 규모 줄이느라 새로 교수를 임용하는 추세도 아니고.”

“그런데 왜 채용공고를 내는 걸까요? 뽑지도 않을 거면서.”

“채용공고를 낸 다음 안 뽑는 것과 아예 채용공고도 안 내는 건 차원이 다르니까. 학과에서 보내는 교수충원 요청도 무시할 수는 없지.”

교수임용에 이렇게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줄은 몰랐다. 민우는 한숨이 나왔다. 앞으로 자신도 경험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민우는 이번 일만큼은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재환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강의는 물론 연구 성과도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학부도 명인대를 나왔으니 흠결이 전혀 없었다.

“결과는 언제 나온대요?”

“글쎄. 최종 합격 통보는 딱히 날짜를 정해놓고 나오는 건 아니라서. 개인적으로 연락이 가니까.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재환이 형한테 따로 연락하진 마라. 지금 예민하실 거야.”

민우는 살짝 놀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근데 형. 뭐 좀 하나 여쭤볼 게 있는데요. 겨울쯤에 학회에서 발표를 한번 해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어느 학회에?”

“현대문학연구학회요.”

씨익 웃은 민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눈치였다.

“무대를 직접 보니까 마음이 설레디? 이상한 놈이네. 보통 토론하는 거 보면 위축돼서 오히려 발표할 생각이 없어지는 게 정상인데.”

“세상에 완벽한 논문은 없잖아요. 토론 과정을 거쳐서 좀 더 정밀하게 다듬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좋은 거죠.”

“전혀. 실컷 까이고 난 다음 술 푸러 가자고 할 거 같은데?”

“역시 그렇겠죠?”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현대문학연구학회는 메이저급 학회라서 석사과정생이 발표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규정 확인을 해야 할 거 같은데?”

“확인해 봤는데 발표할 수 있었어요.”

발표 규정은 학회마다 제각각이다.

보통 석사학위 소지자로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학사학위나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춰도 발표를 허가하는 학회도 있다.

“그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석사들이 발표하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긴 해도 아예 없는 일은 아니거든. 하지만 그전에 꼭 민 선생님하고 상의해라. 그쪽 학회 연구 이사로 계시니까.”

“넵.”

원하는 답변을 들었다. 민우는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박사 연구실을 나설 수 있었다.

* * *

석사들도 휴가를 떠났는지 307호엔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방학 끝나기 전에 수빈이랑 짧게라도 여행 다녀올까? 바다라도 보고 오면 좋을 텐데.’

프랑스는 겨울에 가기로 했다. 여행 경비 문제도 있었지만, 이제 곧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멀리 가는 건 부담스러웠다.

‘어디가 좋으려나. 대부도? 얼마 전에 누나가 거기 갔다 왔다고 했었지. 한번 물어볼까?’

민우는 생각난 김에 누나에게 톡을 보냈다.

답장을 기다리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팀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강연 동영상 자막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일단 민우는 메일을 뒤졌다.

‘전에 김 주무관님한테 받은 영문 캡션 파일이 분명 있을 텐데.’

영문 캡션 파일이 있다면 작업이 훨씬 쉽다. 동영상을 보며 일일이 받아 적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민우는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주요 언어로 된 자막을 만들 생각이었다. 안경의 힘을 빌리면 일도 아니었다.

‘찾았다.’

TXT 확장자로 된 캡션 파일을 다운받아 편집기로 열었다. 그리고 안경을 썼다.

타다닥― 타닥타닥―

루카치의 안경은 역시 대단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요 언어로 번역된 자막 파일이 완성됐다.

‘이제 압축을 하고 보내면 끝.’

민우는 자막 파일을 압축해 김유신 주무관의 메일로 보낸 다음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무관님. 박민우입니다.”

― 아, 예. 박 선생님. 잘 지내셨죠?

“덕분에요. 하나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제 강연 동영상에 들어갈 자막 파일을 주무관님 메일로 보냈습니다. 6개 국어 정도 되는데, 무투브에 적용 좀 시켜주실 수 있을까요?”

― 6개 국어요?

민우는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오해를 사지 않게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 잘 알겠습니다. 오늘 오전 중으로 바로 적용을 해 놓겠습니다.

“작업 끝나고 문자 하나 남겨 주시면 확인은 제가 할게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 별말씀을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그럼 이따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바로 랑느 박사에게 메일을 보냈다. 오늘 중으로 프랑스어 캡션이 적용될 예정이니 따로 자막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딸칵―

때마침 307호의 문이 열렸다.

이수빈이 먼저 도착하고, 이어 한진섭이 들어왔다. 그런데 진섭의 손에 검은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건 뭐냐?”

“조교실에서 빔 빌려 왔어. 벽에 쏘면서 보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말이다.”

“과연 신방과 복수전공자는 다르구만.”

민우가 가방을 받아들고 빔프로젝터를 설치했다. 307호의 벽면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따로 스크린이 필요 없었다.

진섭이 USB를 연결해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실행시켰다. 확실히 화면이 크니 보기 편했다. 실전 느낌이 났다.

민우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일단 슬라이드 하나씩 넘겨보면서 추가할 내용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런 다음 발표 콘셉트를 정하자고.”

그렇게 팀 307호는 본선 무대를 향한 준비에 돌입했다.

* * *

공모전 본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민우는 발표 콘셉트에 맞게 매일 두 시간 이상 연습을 했다. 때로는 수빈과 진섭 앞에서 시연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민우는 한 손엔 마이크를, 다른 한 손엔 프레젠터를 들고 설명을 이어갔다.

“앞서 설명해 드린 오픈 라이브러리의 핵심은 접근성입니다. 웹은 물론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 개발 가능한 것이 장점입니다.”

또박또박, 자신 있는 어조로 말한 민우가 프레젠터를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며 한진섭이 공들여 만든 슬라이드가 출력됐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핵심 정보를 잘 간추린 그런 멋진 슬라이드였다.

“저희 팀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 오픈 라이브러리를 제안합니다. 이용자는 튜토리얼 시스템을 체험하며 마치 게임을 하듯 인문학에 대한…….”

그때 한진섭이 손을 홰홰 저으며 발표를 끊었다.

“지금 부분 너무 교과서 읽는 것 같은 느낌이야. 좀 더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하는 게 좋겠는데?”

“맞아요. 오빠 좀 더 부드럽게.”

민우는 방금 자신이 어떻게 말했는지를 되짚어 보았고, 동료들의 지시사항을 적용해서 다시 발표를 시작했다.

“이용자는 튜토리얼 시스템을 체험하며 마치 게임을 하듯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에 따른 보상을 추가하여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것이 메인 컨셉입니다.”

“퀘스트랑 상호작용 부분 강조하는 게 좋겠다.”

“오케이.”

민우가 대본에 강조점을 넣었다. 그런데 한진섭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퍼포먼스가 안 좋아? 인문학 강연할 때랑은 좀 다른 거 같다?”

“같을 리가 있냐. 내가 그 강의 한 번 하려고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리고 난 실전형 인간이라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불만이 계속 나오는 중이었지만, 사실 민우의 발표는 나쁘지 않았다. 진섭의 기대치가 워낙 높은 탓이었다.

민우는 인문학 강연 동영상을 분석하며 그때 발현된 기술들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만년필을 착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지금부터 만년필을 쓸 필요는 없어.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아는 게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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