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7. 겨울을 기다리며 (1) (67/500)


067. 겨울을 기다리며 (1)
2021.07.05.


해외 초청 인사들의 연설이 끝나고 다음 식순이 이어졌다.

1부 발표가 시작됐다. 발표자와 토론자가 연단에 준비된 자리에 착석했다. 발표자가 마이크를 들고 논문을 읽었다.

민우와 랑느 박사는 나란히 기대선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대본대로 연설을 하지 않으셔서 제 친구가 좀 놀란 모양입니다.」

「하하하. 뭐든 대본대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그래도 박사님의 연설.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짧지만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나야말로.」

무슨 이야긴가 싶어 민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투브에 올라온 미스터 박의 강연 영상, 어제 호텔에 돌아가서 봤소.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었더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닥터 리가 얘기해 줬소.」

「부끄럽습니다. 박사님이 보시기엔 별로 재미는 없으셨을 텐데요.」

랑느 박사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꽤 인상 깊었소. 프랑스로 돌아가는 대로 내 아이들에게 그 강연을 틀어줄 생각이오. 아이들은 영어를 하지 못해서 프랑스어 자막을 달아줘야겠지만. 그 정도 수고는 할 만하지.」

「영광입니다.」

민우는 자막에 프랑스어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어 자막이 있으니 그대로 프랑스어로 바꾸면 된다.

‘아니지. 프랑스어만이 아니라 기왕 하는 김에 세계 각국의 언어를 추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회를 마무리한 뒤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큰 기대를 하고 한국에 온 건 아니오. 여건이 맞지 않아 좀 무리를 하긴 했는데…… 당신을 만나 큰 보람을 느꼈소. 다음엔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한번 와야겠소. 그때도 잘 부탁하오.」

랑느 박사가 악수를 청했다. 민우는 벽에서 등을 떼고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마침 한쪽에 앉아 있던 이경훈 교수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 발표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준비된 식순이 모두 끝났다. 학회장 유진성 교수가 연단에 올라 근엄한 목소리로 폐회를 선언했다.

“이상으로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일정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멀리서 와 주신 연사님들은 물론, 이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동계 학술대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모두가 이제 끝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는 동계 학술대회라는 말에 마음을 새롭게 다졌다.

‘그때는 실행위원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라 저 연단에 올라 발표를 할 거야. 반드시.’

민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석사 1학기생의 당찬 각오였다.

* * *

피에르 랑느 박사는 강예진을 비롯한 다른 실행위원들을 치하하고 호텔로 돌아갔다. 오늘 밤 비행기로 귀국한다고 했다.

‘꿈같은 순간들이었어.’

민우는 텅 빈 리셉션 홀을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차가운 고요만 남았다.

“박민우! 거기서 뭐 해?”

진섭이 부르자 민우가 리셉션 홀 밖으로 나갔다. 안내데스크 앞에 동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지쳤지만 마음만큼은 홀가분했다. 특히 강예진이 그랬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민영환 교수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하루 이틀 해 보나요. 그럼 다음에 학교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강예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모두 고생했어. 이제 정말 끝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고생하셨지. 아무것도 모르는 꼬꼬마들 데리고 준비하느라 머리카락이 한 움큼은 빠졌을 거야. 하수구 안 막혔으려나 모르겠네.”

강예진의 농담에 다들 웃었다.

큰 문제 없이 행사가 끝나서 다행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며 보람을 만끽했다. 그들이 이번 학회의 숨은 주역들이었다.

민우가 나섰다.

“누나. 학회도 끝났는데 우리끼리 뒤풀이 가야죠?”

“너희들 바쁘지 않아? 어제는 저녁도 안 먹고 그냥 가더니.”

“역시 그걸 마음에 담아두셨던 거군요. 오늘 표정 안 좋아 보여서 다들 긴장하고 있었어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강예진도 표정에 잘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그녀가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민우는 미리 동료들과 말을 맞춰 놓았다.

“오늘은 다들 시간 비워 뒀어요. 누나가 제일 고생하셨으니까 누나가 좋아하는 와인 바 가요. 전에 형들이랑 같이 갔던 거기.”

“그럴까? 안 그래도 민 선생님께서 뒤풀이 마음껏 하라고 하셨는데. 비용처리 해 주신대. 학회에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회비 안 걷어도 되겠다.”

“선배. 그럼 비싼 거 마셔도 되나요? 메뉴판 뒤에 있는 거.”

진섭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술이라면 환장을 하는 그였다.

“그건 가서 결정하고. 일단 남은 짐들 307호로 옮기고 나서 이동하자.”

“옙!”

네 사람은 짐을 나눠 들고 학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밤길을 걸었다.

둥그런 달이 뜬 밤하늘을 보며 문득 민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행사를 치른 다음 여운을 공유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대학원 오길 잘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쉽게 공감하지 못할 생각을 하는 민우였다.

하지만 이번 학회에서의 경험은 분명 특별했다. 랑느 박사와 친분을 나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이경훈 교수와 인사를 나눈 것도 나름의 성과였다. 여차하면 전공을 바꿀 계획이었던 민우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뭘 그렇게 봐?”

살짝 뒤처진 그에게 강예진이 다가왔다. 민우가 좀 느리게 걸었는지 앞서 걷던 진섭과 하나와 꽤 멀어져 있었다.

“그냥 하늘 봐요.”

“별도 안 보이는 하늘 봐서 뭐 해? 서울 밤하늘을 보면 너무 삭막하단 말야. 옛날에 내가 살던 곳은 정말 별이 많았었는데.”

“누나 고향 서울 아니었어요?”

강예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울이 아니냐는 말, 자주 듣는 말이었다.

“부산 장산 쪽에서 살았어. 밤에 뒷산에 가서 하늘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별이 많이 보였는데. 아, 그때가 그립다.”

“부산이요? 말투가 전혀 아닌데?”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 와서 많이 흐릿해졌지. 사투리 안 쓰려고 노력한 것도 있고.”

“그러셨구나.”

그때 강예진이 가까이 다가와 팔꿈치로 툭 쳤다. 취조하는 눈빛으로 민우를 올려다보면서.

“솔직히 말해 봐. 너 수빈이랑 사귀지?”

왠지 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너무 깊게 치고 들어왔다. 부정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민우는 그렇다고 말했다.

“어쩐지 둘이 가까이 지낸다 싶었어. 학기 초부터 그랬지? 왠지 수빈이가 좀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역시 나이가 깡패라니까. 수빈이가 스물넷이었던가. 한창 좋을 나이네. 난 다 늙어 빠졌는데. 내일이면 서른인데 애인 만들기도 힘들겠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랑느 박사님한테 예쁘다는 칭찬도 들으셨으면서.”

“인사치레로 한 말이겠지. 그러는 넌 어때? 네 눈에도 예뻐 보여?”

왠지 질문이 이상했다. 민우는 잠시 멈췄다. 자연스레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예진이 돌아섰다.

“농담도 못 하니? 정색하긴.”

새침하게 웃은 그녀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민우는 그저 말없이 따라가기만 했다. 저 멀리 인문관 건물의 꼭대기가 보였다.

* * *

다음 날, 간신히 눈을 뜬 민우는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건 찍혀 있었다. 주인공은 수빈이었다.

‘망했다.’

술에 너무 취해 집에 왔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민우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했고, 역시나 잔소리가 쏟아졌다.

명인대 국문과 수석의 언변은 화려했다. 수빈은 조금의 변명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민우는 민우였다.

기적적으로 수빈을 달래는 데 성공한 그는 전화를 끊었다. 긴 한숨이 나왔다.

‘오늘 일정은 특별히 없으니까…… 숙취 좀 가라앉으면 연구실이나 가야겠다.’

민우는 대자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다 핸드폰이 한차례 진동했다. 푸시 알람이었다.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발신인은 랑느 박사였다. 지금 막 파리에 도착했다는 메일이었다. 사진이 한 장 첨부되어 있었는데, 파리의 밤하늘이 담겨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네.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더 멋있겠지?’

민우는 그때를 상상하며 답장을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프랑스는 언제 가나.’

가장 큰 문제는 여행 경비였다. 지금 수입으로는 일 년 정도를 더 모아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빚을 내서라도 가고 싶었다.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지금 일을 더 늘렸다가는 몸이 다시 망가질 게 분명했다.

‘잠깐. 아니지. 굳이 어려운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민우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몸이 망가지지 않고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번역 외주를 구하면 되는데. 왜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

생각이 공부와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탓이다. 돈을 버는 것보다 지식을 쌓는 걸 우선으로 삼았으니까.

민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단행본 두어 개 번역하기만 해도 여행 경비는 충분히 나오겠다.’

생각보다 문제가 쉽게 해결됐다. 민우는 몸을 일으켜 가방을 뒤적였다. 이경훈 교수의 명함이 나왔다.

‘다음 주에 일거리가 있는지 여쭤보러 가야겠어. 프랑스 문학과 분위기도 좀 익힐 겸.’

일단 민우는 이경훈 교수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핸드폰에 입력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여행 가기 전에 프랑스어 공부를 좀 해야 할 텐데. 영어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리스닝이랑 발음 문제를 해결해야 해.’

그래도 민우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유리했다. 안경으로 익힌 프랑스어 문법에 대한 지식은 있으니, 알아듣고 발음할 줄만 알면 끝난다.

‘참, 수빈이한테 같이 가자고 해 볼까? 전에 프랑스에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그녀와 함께 하는 여행은 어떨까?

여러 상상이 펼쳐졌다. 근사한 곳에서 사진을 찍고, 맛있는 걸 먹고, 늦은 밤 숙소에서 와인 한 잔으로 분위기를 내며…….

그 생각을 끝으로 민우는 스르륵 잠에 빠졌다.

* * *

‘꿈인가?’

칼이 도마를 때리는 소리가 들려 민우는 눈을 떴다. 그런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이수빈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요리하고 있었다.

‘꿈이네.’

얼마 전 디지털도어락으로 바꿨다. 집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누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민우는 다시 눈을 떴다. 이건 분명 예전에 이수빈이 해줬던 콩나물김칫국 냄새다.

‘꿈 치고는 너무 현실적인데? 야한 꿈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하하하.’

민우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웃었다. 그때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이수빈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뭔가 음흉한 미소다.”

“꿈이잖아. 뭐 어때.”

“이 아저씨가 아직 술이 덜 깨셨나.”

인상을 찡그린 이수빈이 이불을 홱 걷었다. 말려있던 민우가 바닥으로 굴렀다.

쿵!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제야 민우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윽……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민아 언니한테 비밀번호 물어봤지. 세상에 1111이 뭐야? 지나가던 고양이도 누르고 들어오겠네.”

“도둑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다.”

민우는 반갑기도 하면서 걱정이 됐다. 집안 꼴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와 사귀면서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없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에 널려있던 옷도, 쓰레기도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이수빈이 잔소리를 장전했다.

“어? 국 넘치는 거 같은데.”

“앗!”

이수빈이 재빨리 가스레인지로 달려갔다. 그 틈에 민우는 화장실로 자리를 피했다.

다 씻고 나오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자취방에서 보기 힘든 진수성찬이다.

민우가 앉자마자 물었다.

“너 예전에 프랑스 가보고 싶다고 했었지?”

“웬일이야? 그런 거 기억도 해주고.”

“누구 말씀인데 당연히 기억을 해야지. 아무튼, 같이 갈래? 랑느 박사님이 초대해 주셨는데, 시간 내서 한번 가보려고.”

“진짜?”

이수빈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는 의미였다.

“집에는 뭐라고 얘기할 거야? 일주일 정도는 체류할 생각인데. 허락하실까?”

“팔아먹을 친구 있으니 걱정하지 마.”

피식 웃은 민우는 콩나물김칫국을 한술 떠서 넘겼다.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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