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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5) (66/500)


066.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5)
2021.07.02.


「어려운 질문이군.」

랑느 박사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학문에 대해 물었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지도 몰랐다.

그러나 랑느 박사는 여전히 유쾌했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박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하는 것 같은데.」

「답을 미리 알고 있다고요?」

랑느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문은 당신이 말한 대로 미지의 세계지. 학문을 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소.」

「그렇군요.」

다소 뻔한 대답에 민우는 김이 빠졌다. 랑느 교수는 민우의 속내를 간파했는지 빙긋 웃었다.

「내 대답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인데?」

「실례 많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기대가 좀 컸나 봅니다.」

「하하하. 괜찮소. 학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한 게 아니지. 우리가 하는 일은 노동자가 벽돌을 나르는 것과 같소. 본질을 얘기한다면 말이오.」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일은 조금 특별한 게 아닐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직업에 귀천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랑느 박사가 말한 본질은 무엇일까?

민우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어떤 것도 확신을 주진 못했다.

‘수준의 차이인가? 아니면…… 연륜인가?’

랑느 박사에게는 학식뿐만이 아니라 넘을 수 없는 세월의 벽이 있었다.

민우가 고민에 빠진 사이 랑느 박사는 대추차의 풍미를 즐기고 있었다.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연신 ‘딜리슈’를 외쳤다.

「미스터 박.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소. 시간이 천천히 알려줄 것이오.」

「그래도 궁금한 건 참을 수가 없군요. 한 발자국만 나아가면 알 것 같은데 그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힘이 듭니다.」

「힘이 들 땐 쉬어야지.」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민우는 그제야 주먹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땀이 배어 있었다.

「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손가락만큼 얇은 이론서 하나 읽는 데 한 달이나 걸리고, 태반도 이해하지 못해서 고생했던 적이요.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과 비슷한 거 같습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은 있는 법이오.」

「박사님도 그러셨습니까?」

「물론이지. 난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소. 어떤 학자가 이론서를 쓰는 데 1년이 걸렸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걸 하루 만에 뚝딱 읽고 이해를 해 버리면 그걸 쓴 사람은 무척 분통해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여유가 생기더군.」

랑느 박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밤은 대낮처럼 밝았다.

잠시간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민우를 바라본 랑느 박사. 그의 얼굴에 궁금증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스터 박은 어린아이 같소.」

「네? 그건 무슨…….」

「어린아이들은 확실한 표현을 좋아하거든.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원하지. 보시오. 지금 미스터 박은 나에게 사탕을 달라고 하고 있어. 하하하!」

좋은 비유라 민우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여유가 부러웠다. 자신도 저 나이가 될 때쯤에 그에 맞는 지식과 지혜를 갖출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유머가 불쾌했소? 사과하지.」

「아닙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죠. 걸음마를 떼긴 한 것 같은데, 공부할 때마다 몸이 기우뚱하는 느낌입니다.」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던 랑느 박사가 옆머리를 두어 번 긁적였다. 조금 다른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인데 한번 들어 보겠소? 도움이 될 거 같군.」

「좋습니다.」

「지식은 무한한 바다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전진할수록 우리 앞의 광막한 세계가 더욱 넓어질 뿐이다. 지식의 세계에서 한 번의 개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무지의 고백이 백 번 있어야 한다.」

생소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구절이네요. 누구의 말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랑느 박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소심한 영국인이 한 말이오. 내가 대학생 때였나. 가물가물하군. 어느 철학서를 보며 암기한 구절이지.」

「소심한 영국인이요?」

「왜 그 사과장수 있잖소. 아이작 뉴턴.」

민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랑느 박사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먼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그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파악한 이 말의 요지는 이렇소.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백 번 실패한 후에 한 번의 성공을 거두라고. 미스터 박은 두려울 게 없소. 젊은 만큼 시간은 당신의 편이니까.」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기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박사님.」

「그러는 의미로 대추차 한 잔 더 마셔도 되겠소? 이거 맛이 기가 막히군. 소르본으로 가져가면 동료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종업원을 불러 대추차를 한잔 더 주문했다. 민우는 대추차를 따로 구입할 수 있는지 물었고, 가능하다는 대답을 받았다.

「한국 방문 기념으로 한 병 사드리겠습니다.」

「바라던 바요. 하하하.」

수업료치고는 무척 싼 편이었다. 민우는 질문을 좀 바꿨다. 이제 랑느 박사라는 ‘인간’에 대해 탐구할 시간이었다.

「박사님은 취미가 무엇입니까?」

「취미? 낚시를 좋아하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지. 미스터 박은?」

「특별한 취미는 없습니다.」

「애인은 있소?」

「있습니다.」

「그럼 됐소. 미스터 박의 나이에는 연애만 한 취미가 없는 법이지. 뜨겁게 사랑하시오. 그게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과연 그는 뼛속까지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관계며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지, 그리고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까지.

‘생각보다 랑느 박사님은 평범한 인생을 사셨구나. 의외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학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평범 그 자체였다.

「내가 보기에 미스터 박은 좋은 재능을 가진 것 같소.」

「재능이요? 재능이 있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듣습니다.」

노력파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게 자신의 재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재능은 좀 더 특별한 것이어야 했다.

랑느 박사가 말했다.

「호기심.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호기심이지. 미지의 세계를 끈질기게 탐험하기 위해서는 호기심이 필요하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소. 눈빛이 그걸 말해주고 있지.」

랑느 박사가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냅킨을 하나 집어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주소와 전화번호였다.

그가 냅킨을 접어 민우에게 건넸다.

「시간이 될 때 프랑스로 한번 건너오시오. 근사한 만찬을 열고 좋은 친구들을 소개해 주지. 여정이 고단하긴 하겠지만 유익할 거요.」

「아, 영광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러면 빈말로 듣는 경향이 있다는데 빈말 아니니 진짜 오시오.」

아직 프랑스로 넘어갈 여력은 되지 않지만, 언젠가는 꼭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냅킨을 주머니에 넣었다.

두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췄다. 찻집 종업원이 조심스레 다가와 폐점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박사님. 이제 슬슬 일어나셔야겠습니다.」

「벌써 폐점 시간인가? 아쉽군.」

「내일 학회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멋진 연설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굳게 악수한 뒤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랑느 박사의 손에는 대추차가, 민우의 마음에는 여유와 지혜가 들렸다.

* * *

다음 날, 민우를 포함한 실행위원들이 아침 일찍 모였다. 강예진은 복장도 그렇고 표정도 완전 저기압이었다. 석사들은 긴장했다.

진섭이 빈집을 노리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뭔 일 있었어? 예진 선배 왜 저리 저기압이냐?”

“몰라. 나도.”

“어제 학회 때문에 뭔 말 나왔나?”

그때 강예진의 차가운 눈매가 진섭에게 날아갔다. 담을 넘으려던 도둑이 몸을 움찔했다.

“한진섭? 지금 바로 과사에 가서 빔프로젝터 좀 가져와.”

진섭이 학과 사무실로 달려나가자 민우가 물었다. 조심스럽게.

“누나. 빔은 왜요? 이번엔 빔 안 쓰기로 했잖아요.”

“해외 연사들 연설문 번역해서 벽에 쏜대. 학회장님이 그렇게 하는 게 어떠냐고 어제 얘기가 나왔었나 봐. 어쩌겠어.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강예진이 뭔가를 던졌다. USB였다. 연설문은 어떻게 받고 번역은 어떻게 한 걸까. 민우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냥 넘겼다.

“그거 노트북에 복사해서 잘 열리나 확인해 봐. 이따 발표 순서대로 화면에 띄울 거다.”

“알겠습니다.”

강예진은 민우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방명록과 펜을 준비해 한쪽에 놓을 뿐이었다.

‘설마 누나가 다 하신 건가? 어쩐지. 저기압일 만하네.’

그때 강예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뭘 그리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확인하지 않고.”

“지금 갑니다.”

민우가 리셉션 홀 안으로 뛰어 노트북을 열었다. 곧 부팅이 완료됐고, USB를 연결해 파일을 열었다. 프레젠테이션 파일로 정리돼 있었다.

민우는 전체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하나하나 넘겨보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랑느 박사의 연설문이 있었다.

‘어?’

연설문을 읽던 민우가 살짝 놀랐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확인을 마친 민우는 다시 데스크로 돌아왔다.

강예진이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웃어?”

“웃으면 복이 온대잖아요.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보죠!”

“뜬금없긴.”

정시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곧 학회 임원단도 착석했다.

강예진의 예언은 적중했다. 해외 연사들이 참여하는 날이라 접수 인원이 어제보다 배로 많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정신없이 일했다.

곧 안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2일 차 일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로, 초청 인사 연설이 있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연사는 총 다섯 명이었다.

소르본의 피에르 랑느 교수를 필두로, 칭화대와 토론토대, 브리스톨대, 그리고 와세다대에서 각각 연사들이 참여했다.

연설 순서는 그 역순이었다. 한진섭은 연사들이 연단에 올라갈 때마다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슬라이드를 넘겼다.

다소 멍한 분위기 속에서 앞선 네 교수의 연설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소르본에서 오신 피에르 랑느 박사님의 말씀 청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랑느 박사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가 연단에 올랐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연설문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편하게 서두를 열었다. 영어로.

「어제 어떤 젊은 친구와 인사동이라는 곳에서 전통차를 마셨습니다. 매우 뜻깊은 경험이었지요. 대추차는 제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정말로.」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함을 느낀 진섭이 슬라이드를 확인했다.

내용이 달랐다.

앞의 네 명의 연사들은 미리 작성한 내용을 거의 똑같이 읽었는데, 랑느 박사는 그러지 않았다.

원래 대본에는 ‘미스터 박’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페이퍼 번역은 물론, 완벽한 해설에 감사드린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미스터 박’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민영환 교수와 이경훈 교수를 제외하고는.

「그 젊은 친구가 묻더군요. 학문이란 무엇이냐고. 대단히 난처했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면서 찾지 못한 해답을 젊은 친구가 묻고 있으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지요. 잠깐이긴 했지만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더군요. 뭐, 대강 둘러대긴 했습니다만.」

밖에서 연설을 듣던 민우가 빙긋 웃었다.

옆에 있던 강예진은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어제 랑느 박사와 같이 어울릴 만한 젊은 친구는 민우밖에 없었다.

강예진이 뭔가 말을 꺼내려던 그때 민우가 선수를 쳤다.

“저 잠깐 안에 들어갔다 와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안으로 들어가자 랑느 교수의 모습이 보였다. 팔짱을 낀 민우는 입구 쪽 벽에 등을 기대고 그의 연설을 경청했다.

랑느 박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우리는, 이 젊은 친구의 질문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학문을 경연하는 시대는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랑느 박사가 잠시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는 곧 유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학회는 말입니다. 아까 그 젊은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후학들의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현대문학연구학회가 그러한 단체로 성장하길 희망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제 스스로에게 던지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랑느 박사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어 인사하듯 두 손을 들었다.

청중들 사이에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알아들은 사람도 있었고,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민우는 전자였다.

그는 손뼉을 치며 랑느 박사의 연설을 머리가 아닌 마음속에 갈무리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각오.’

그 한마디가 힌트가 됐다. 랑느 박사가 여유를 가지라고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랬구나. 박사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하신 거였어.’

그때 연단을 내려오던 랑느 박사가 방향을 바꿨다. 그의 목적지는 민우가 서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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