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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4) (65/500)


065.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4)
2021.07.01.


“이것으로 금일 학술대회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내일은 해외 초청인사 여러분들이 참여할 예정인데요. 잊지 마시고 내일도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학회 첫날 일정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현대문학연구학회 부회장 이길순의 인사를 끝으로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한편 강예진의 호출을 받은 실행위원들은 접수 데스크로 모였다.

“청소해야 하니까 진섭이는 연단하고 마이크 정리하고, 하나는 홀 안으로 들어가서 분실물 없는지 확인해 봐.”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막막했다. 저 넓은 공간을 어떻게 청소해야 한단 말인가?

강예진이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는 업체에서 와서 할 거야. 카펫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못 해. 걱정 말고 뛰어. 응?”

“옙!”

진섭이 신이 나서 리셉션 홀로 뛰어 들어갔다. 문하나는 앞줄부터 천천히 훑으며 분실물이 있는지 확인했다.

민우가 물었다.

“전 뭐 할까요?”

“자리나 지켜. 회원들이 나오면서 뭐 물어볼 수도 있으니까 잘 보고 배워두고. 그리고 너 랑느 박사님하고 놀러 간다며?”

“기왕이면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해 드리러 가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거라고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강예진이 민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살짝 뒤로 밀려날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다 오냐오냐해주는 줄 알아? 하아, 오늘 한 게 있어서 뭐라 그럴 수도 없고…… 인사동 갈 거지?”

“그렇게 될 거 같아요. 전에 몇 번 갔던 찻집이 있어서요.”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마.”

“세상에. 한 번도 뜯긴 적이 없는 삥을 대학원 와서 뜯길 줄은 몰랐네요.”

두 사람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긴장만 해 왔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니 완전히 풀어져 허물이 없었다.

“아무튼, 이제 전반전이 끝난 느낌이네요.”

“본 게임은 내일부터야. 해외 연사들 오시니까 아마 오늘보다 배는 미어터질 거다. 긴장하고 있어.”

그때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랑느 박사와 이경훈 교수가 접수 데스크 쪽으로 다가왔다.

랑느 박사가 뭐라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경훈 교수가 선수를 쳤다.

“자네가 박민우?”

“예, 맞습니다.”

이경훈 교수는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명인대 타 전공 교수와 통성명을 한 건 강철훈 교수 이후로 처음이었다.

“랑느 박사님께서 아주 극찬하시던데? 자기 이론을 이렇게 잘 이해하는 사람이 한국에 있을 줄 몰랐다면서. 불문학도 따로 공부하나?”

“공부까지는 아니고 취미로 보는 정도입니다.”

민우는 내심 놀랐다. 해설 몇 개 달았다고 해서 그 정도의 칭찬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잠시 랑느 박사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민우는 웃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놀란 것은 이경훈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취미로 본다라. 겸손인지 자신감인지 모르겠군. 자넨 이제 몇 학기지?”

“1학기입니다. 이제 2학기 들어가요.”

“이야, 석사 1학기 학생이 큰일을 했네. 근데 불문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왜 국문과로 갔어? 우리 쪽으로 지원을 해보지.”

“국문과는 유학을 안 가도 되니까요.”

“뭐? 하하하하! 이 친구 농담도 잘하네. 민 선생님이 심심하진 않으시겠어.”

사실 민우는 오늘 이경훈 교수를 처음 만났지만, 그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정연주에게 말이다.

민우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오셔서 합리적인 분이라고 했었지? 확실히 느낌이 나쁘지 않다. 뭔가 서지훈 선생님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한편 민우를 바라보는 이경훈 교수의 두 눈엔 흥미가 동하고 있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탐이 난다’ 정도였다.

“혹시 자네 말이야. 예전에 강철훈 선생님 연구팀에서 일하지 않았었나? 번역을 잘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 자네 이름하고 비슷한 이름이 나왔던 것 같아서.”

“번역을 잘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철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은 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랑느 박사님 페이퍼 번역한 거 봤는데 잘했더라. 나중에 우리 쪽 프로젝트에 껴도 될 거 같더군.”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그래도 나중에 좀 도와줘.”

오늘 하루 종일 랑느 박사를 수행한 이경훈 교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랑느 박사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그가 ‘미스터 박’을 계속 언급했다. 그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분명 자신이 보지 못한 뭔가가 민우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경훈 교수는 그게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다음에 시간 괜찮으면 한번 식사라도 하지. 연락해. 주중엔 계속 연구실에 나와 있을 거야.”

“학회 마치고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민우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이경훈 교수는 랑느 박사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학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제는 랑느 박사 차례였다.

「오, 미스터 박. 미안하지만 전통차를 맛보기 전에 잠시 숙소에 들러야 할 거 같군. 뜻하지 않게 손님이 와 있는 모양이오.」

「전 언제라도 괜찮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 근방에 있는 골든팰리스 호텔이오. 저녁 8시쯤이면 끝날 거 같은데, 그때 만나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8시에 호텔로 모시러 가지요.」

「고마운 제안을 해 줬는데 미안하오.」

민우는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체류 기간이 짧으시니까 제가 박사님 스케줄에 맞춰야지요.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손님과 좋은 시간 보내셨으면 합니다.」

오늘 민우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던 랑느 박사는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예진이 나섰다. 후배에게 질 수는 없었다.

「박사님. 숙소로 돌아가실 거면 택시를 불러 드릴까요?」

「아, 그거 좋지. 고맙소. 한국엔 친절한 사람들뿐인 것 같소.」

잠시 후 콜택시가 리셉션 홀 앞에 도착했고, 민우와 예진은 그 앞까지 나가 랑느 박사를 배웅했다. 그제야 두 사람의 일과가 끝이 났다.

오후 6시 30분. 내부 정리도 얼추 끝났다. 리셉션 홀 안에는 실행위원 넷만 남았다.

“선배. 더 일 없으면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오늘 애들이랑 술 푸기로 해서요.”

“저도 약속이 있어요.”

“그래? 다들 고생했고 내일도 잘 부탁한다!”

한진섭과 문하나는 약속이 있어 먼저 돌아갔다. 민우와 강예진은 남은 짐 몇 개를 인문관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307호에 짐을 내려놓고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노을이 하늘 저편으로 밀려가고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때마침 가로등 불이 일제히 켜졌다.

레몬빛 광채가 강예진을 휘감았다. 그녀가 잠시 멈춰 섰다.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박민우. 저녁 먹으러 가야지? 오늘 고생했는데 누나가 같이 먹어줄게.”

“죄송해요. 여친이랑 같이 먹기로 했…….”

순간 아차 싶었다.

학교에는 얘기를 하지 않아 다들 솔로인 줄 알고 있었다. 강예진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야. 너 여친 있었어?”

“아, 예. 어쩌다 보니. 누나.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저녁은 다음 기회에!”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저녁을 배부르게 먹은 민우와 수빈이 버스정류장에 나란히 섰다. 아쉽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조심히 들어가. 못 데려다줘서 미안하네.”

“아냐. 오빠도 바쁜데 뭘. 그런데 진짜 부럽다. 랑느 박사님이랑 단둘이 만나고. 이런 기회 정말 흔하지 않잖아.”

“올해 최고의 순간이 될 거 같은 느낌이야.”

민우는 벌써부터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차를 마시며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다. 소소하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 기대됐다.

건수를 잡은 이수빈이 은근히 웃었다.

“오빠가 뽑은 올해 최고의 순간은 나를 만난 그때가 아닌가 봐?”

민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농담이야. 아무튼 잘 다녀와요. 끝나고 꼭 전화하구.”

“알았어.”

수빈을 먼저 보낸 민우는 바로 골든팰리스 호텔로 향했다.

민우는 서둘렀다. 프랑스인들이 약속 시간에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먼저 기다리는 건 좋은 거니까.

‘멋있는데? 언제 이런 데서 한번 묵어보나.’

어둠 속에서 황금빛 조명을 뽐내고 있는 건물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최근 프랑스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고 들었는데, 그 성과가 조금씩 반영되고 있는 모양이다.

로비에서 기다리자 랑느 박사가 나타났다. 아까보다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 박!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손님이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해서 말이오.」

「괜찮습니다. 슬슬 가실까요?」

민우는 택시를 부르려고 했는데, 랑느 박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듯하다. 그는 서울의 지하철을 한번 타보고 싶다고 했다.

‘참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민우와 랑느 박사는 인사동까지 지하철로 이동했다. 서울의 지하철을 경험한 랑느 박사는 시설과 청결함에 감탄을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밤 9시가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폐점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11시. 길어야 2시간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일단 민우는 메뉴판을 랑느 박사에게 보여주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미스터 박이 추천해 줄 수 있겠소?」

「여긴 감잎차하고 대추차가 괜찮습니다. 둘 중 하나 고르시면 될 것 같은데요.」

메뉴판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랑느 박사가 빙긋 웃으며 대추차를 선택했다. 이렇게 보니 세계적인 석학이 아니라 옆집 외국인 같은 느낌이다.

잠시 후 주문한 차가 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깊은 대화에 빠져 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미스터 박이 우리 프랑스문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부분이오. 듣기로는 한국 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 한국의 근대 문학은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죠. 보들레르, 발레리, 베를렌 같은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100년 전쯤에요.」

「으음, 대표적인 상징파 시인들이군.」

「맞습니다. <오뇌의 무도>라는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김억이라는 사람이 묶은 책인데 한국 근대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죠. 그래서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프랑스문학에 대해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오오, 그거 흥미롭군. 거기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소?」

민우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1920년대의 상징주의 시부터 자연주의 담론의 시작. 모파상, 에밀 졸라, 플로베르 문학의 수용까지.

학부 때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면 몇몇 용어와 함께 에둘러 설명을 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꽤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원 입시와 수업 덕분이었다.

한참 동안 열심히 설명하던 민우가 부끄럽게 웃었다.

「사실 제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건 박사님과 오전에 이야기를 나눈 1950년대 실존주의 소설이라서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설명이 부족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오. 무척 흥미롭게 잘 들었소.」

「필요하시면 관련 연구물을 박사님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 그래 줄 수 있소? 이거 오늘 미스터 박에게 빚만 지고 가는 느낌인데.」

「괜찮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입과 목이 말랐다. 민우는 충분히 찻물을 들이켰고, 그에게 물었다.

「박사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무엇이든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저에게 있어 학문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입니다. 박사님이 생각하시는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랑느 박사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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