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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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3)
2021.06.28.
처음 보는 남자가 다가오자 민우는 친절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학회 회원이신가요?”
“맞습니다. 제일대 국문과 노영철입니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민우는 엑셀을 검색해 노영철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참석 여부 칸에 체크를 하고 옆에 놓인 방명록을 가리켰다.
“확인됐습니다. 여기 방명록 작성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가 이름을 적는 사이 민우는 옆에 쌓아 놓은 학회지 하나를 들고 그 속에 안내지를 껴서 노영철에게 전달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학회지 추가로 구매 가능한지요?”
“추가로요? 인쇄 부수가 많지 않아서 그냥 드리기는 어렵고 비용을 내시면 구매 가능합니다. 만오천 원입니다.”
“그럼 하나 더 부탁드립니다.”
그가 지갑에서 돈을 꺼냈고, 민우는 학회지를 한 부 더 준비해 주었다. 그는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예진이 민우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복덩이란 말야.’
처음엔 이재환과 최민식이 그를 아끼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국문과 대학원이라 남자가 좀 귀하긴 했지만 자대생도 몇 있었으니까.
민우가 캠벨의 이론을 찾은 것도 그저 우연히 얻어걸린 거라고 생각했다.
이재환이 주선한 출판 기념 술자리에 껴서 민우와 이야기를 나눠 보기도 했다. 그래도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저 그런 느낌이었다.
‘그땐 잘 몰랐는데. 역시 그게 제일 컸지?’
민우의 인문학 강연 동영상. 그것 하나로 편견이 깨졌다.
누구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강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게 느꼈다.
‘한마디로 많이 배웠지.’
인문학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알기 쉬운 강의. 그것이 바로 강예진이 꿈꾸던 것이었고, 민우가 해낸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랑느 박사의 갑작스러운 방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강예진은 잠시 손을 놓고 있었던 회화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어?”
그제야 강예진이 정신을 차렸다. 어떤 젊은 남자가 데스크 앞에 서서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설명했다.
“이분 학회 회원이 아니신데, 어떻게 해야 해요? 새로 가입을 하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강예진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등록비 만 원을 내면 비회원도 학회에 출입할 수 있다. 비회원 비율은 꽤 많은 편이다.
지도교수의 심부름으로 학회지를 구하러 오는 경우도 있고, 관심이 있는 주제의 발표가 잡혀 있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강예진이 파일에서 입회 서류를 꺼냈다.
“가입비는 3만 원이고, 연회비는 5만 원입니다. 이쪽 서류 작성해 주시면 되고요. 학회 정관이나 사업 방침은 학회지 맨 뒷부분 확인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친절하시네요.”
그 젊은 남자를 마지막으로 줄이 끊겼다. 당분간은 접수자가 없을 거 같았다.
강예진이 물었다.
“박민우. 등록 인원 총 몇 명이야?”
“방금 새로 가입한 분 포함해서 36명이네요. 그중 비회원은 10명입니다.”
“나쁘지 않네.”
민우는 기지개를 켜며 한숨 돌렸다. 잠시 한눈을 팔았는데, 식장 안에서 진섭과 하나가 돌아다니며 진행을 보조하고 있었다.
생각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사람들이 몰려 바쁠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안 오네요. 원래 이런가요?”
“아침이라서 그래. 해외 연사들 강연은 내일 있으니 아마 내일 많이 올 거야.”
그래도 리셉션 홀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미리 동원한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우는 그제야 학생들을 동원한 이유를 알게 됐다.
“학부생들 안 데려왔으면 썰렁할 뻔했어요.”
“그치? 필요악이긴 해. 공부가 된다는 핑계가 있긴 해도 쟤네들 레벨에서 들을만한 건 아니지.”
“그래도 모르잖아요. 수빈이 같이 특이한 애가 있을지.”
“하긴. 것도 그러네.”
그때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강예진도 따라 일어났다. 민영환 교수가 빠른 걸음으로 리셉션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경훈 선생은?”
“지금 랑느 박사님과 함께 계셔요.”
“다행이군. 후우, 왜 연락도 없이 일찍 와가지고는 사람 귀찮게 만드는지 원.”
민영환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특징 중 하나였다. 자신의 계산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적잖게 싫어했다.
그가 인상을 펴고 다시 물었다.
“그 외엔 특별한 일 없었나?”
“이따 2부 첫 순서에 발표하시는 박팔양 선생님 있죠. 아까 연락 왔었는데 기차가 연착돼서 조금 늦을 거 같다고 순서 바꿔줄 수 없냐고 물으시던데요. 어떻게 할까요?”
“뒤 순서 선생님들께 연락해 봐. 바꿀 수 있으면 바꾸자.”
“알겠습니다.”
강예진이 연락처 꾸러미와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떴다.
그때 사회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2016년 하계 정기학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원 여러분들께서는 착석해 주십시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데스크에 머물렀다. 어쩌다 보니 민우와 단둘이 있게 됐다.
“랑느 박사는 왜 이렇게 일찍 왔대? 뭐 들은 거 있나?”
“호텔에 있는 게 답답하셨나 봐요. 캠퍼스 구경도 하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모시고 좀 돌아다녔습니다.”
“뭐라고 하시디?”
“그게……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 인상적이라고 하시던데요?”
“뭔 소리야 그건?”
민영환 교수는 혀를 찼다.
“참 희한한 사람이군. 나라면 호텔에서 푹 쉬다가 내일 시간 맞춰 나타났을 텐데 말이야.”
민우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그것이 민영환 교수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아까 랑느 박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학회에 온 거지 행사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듣겠다고 나섰다.
적어도 학문을 대하는 태도는 랑느 박사가 훨씬 학자다웠다.
“선생님. 근데 안 들어가 보셔도 괜찮습니까? 곧 학회 시작할 거 같은데요.”
“예진이 통화 끝나는 거 듣고.”
그때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강예진이 민영환 교수에게 보고했다. 2부 첫 발표와 두 번째 발표를 서로 바꾸기로 했다.
그제야 민영환 교수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경훈 교수를 찾았다. 좌측 열 중간쯤에 외국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어이구.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명인대 국문과 민영환 교수입니다.”
민 교수가 악수를 청했다. 랑느 교수도 반갑게 일어나 손을 잡았다. 그 사이 이경훈 교수는 옆에서 통역했다.
이경훈 교수가 귀띔했다.
“랑느 박사님은 영어도 할 줄 아십니다.”
“그냥 통역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러죠. 참, 선생님. 랑느 박사님 페이퍼 번역한 학생 말입니까. 누구입니까? 박사께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민영환 교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왜?”
“용어 해설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셔서요.”
민영환 교수는 침음을 흘렸다.
‘내가 실수를 했군.’
처음 민우의 번역물을 들고 이경훈 교수를 찾아갔을 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제자에게 번역을 맡겼는데 확인해 달라고.
이제 와서 내가 했다는 식으로 말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경훈 교수는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까 캠퍼스 안내를 할 때 자기가 번역을 했다는 이야기를 안 한 건가? 이상한데. 민우 고놈이라면 분명 어필을 했을 건데.’
하지만 민우가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민우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민영환 교수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 가지 수가 보였고, 그는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했다.
“그 제자는 지금 접수 데스크에 있는 박민우 학생이야.”
그렇게 운을 뗀 민영환 교수는 랑느 박사를 주목하며 미소를 보였다.
“해설이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박사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좀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필했는데, 좋은 결과물이 나왔나 보군요.”
그 말을 이경훈 교수가 프랑스어로 전달했고, 랑느 박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흥분이 섞인 프랑스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민영환 교수가 보일 듯 말 듯 인상을 썼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번역을 한 게 박민우 학생인지 몰랐다고 하네요. 지금 당장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합니다.”
“이따 점심시간에 하라고 정중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군. 곧 학회가 시작될 테니까.”
“그러죠.”
이경훈 교수가 그 말을 옮겼다. 랑느 박사도 납득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랑느 박사가 민영환 교수에게 한마디 했다. 돌아가려던 민 교수가 멈춰 서자 이경훈 교수가 웃으며 통역해 주었다.
“멋진 제자를 두셨답니다. 랑느 박사가.”
“그래?”
민영환 교수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자책했다. 번역을 그에게 맡긴 것을 후회하면서.
‘멋지긴 뭐가 멋져?’
그가 신경질적으로 학회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 *
1부 순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도 손님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민우와 예진은 자리를 지켰다.
강예진이 진섭과 하나를 불렀다.
“일단 너희 둘은 식사해. 우리는 여기서 대충 때울 테니까.”
“예? 아닙니다. 저희가 지키고 있을게요. 선배 식사하고 오세요.”
“여긴 아무나 못 앉아. 어서 가. 마음 바뀌기 전에.”
민우가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싼 출장 뷔페를 불렀는데 먹지를 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민우가 김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우린 점심 뭘로 때워요?”
“삼각김밥.”
강예진이 검은 봉지에서 음료수와 삼각김밥을 꺼냈다. 허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까라면 까는 수밖에. 민우는 참치마요와 전주비빔을 집었다.
그때 랑느 박사가 밖으로 나왔다. 거의 뛰는 것 같은 빠른 걸음이었다.
「미스터 박!」
깜짝 놀란 민우가 삼각김밥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박사님?」
「당신이 내 페이퍼를 번역해줬다고 들었소. 거기에 용어 해설까지 근사하게 해 주고. 왜 아까 같이 있을 때 말하지 않았소?」
「그게…… 제가 말씀드릴 틈이 없었습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으신 거 같아서요.」
「이런, 내가 실례했군. 용서하시오.」
랑느 박사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호쾌하게 웃었다. 한국어가 아닌 언어가 들리자 주변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랑느 박사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 왜 당신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는 거요? 번역은 그렇게 근사하게 할 줄 알면서 말이오.」
언젠가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안경의 한계였으니까.
민우는 미리 준비한 답을 능청스럽게 꺼냈다.
「아직 듣는 게 부족해서 말입니다. 발음도 좀 어렵고. 여러모로 영어가 편해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흐음, 좀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그냥 넘어갑시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오찬 시간인데. 같이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 좀 나눕시다.」
민우가 양 손바닥을 보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진행요원이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도중에 회원들이 올 수 있으니까요.」
「이런, 여러모로 아쉽군.」
민우는 웃었다.
그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시면 오늘 학회 끝나고 같이 차라도 한잔하시죠. 한국을 방문하신 기념으로 맛있는 전통차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오오, 그거 좋소! 멋진 생각이군!」
「일단 안으로 들어가셔서 오찬을 즐겨 주십시오. 마음에 드실 겁니다.」
「고맙소.」
랑느 박사는 화색을 띠며 다시 학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대화를 듣고 있던 강예진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박민우. 어딜 도망가려고? 끝나면 뒷정리하고 내일 학회 준비해야지.”
“랑느 박사님 모시는 것도 학회 일이잖아요. 연장 근무로 생각하고 좀 봐주세요.”
“어휴, 말로는 뭘 못하냐. 알았으니까 먹기나 해.”
민우는 들뜬 마음으로 삼각김밥을 뜯어 한입 베어 물었다.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시간이 흘러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