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2)
(63/500)
063.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2)
(63/500)
063.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2)
2021.06.25.
회색빛 캐주얼 정장을 입은 사내였는데, 눈이 크고 인상이 푸근하니 좋았다. 흰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섞여 있어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많아야 오십 줄?
걸음걸이가 상당히 정력적이었다.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활동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오늘 다른 홀에 행사가 또 있었던가?’
민우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학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다. 오전 10시 반에 시작이니 두 시간이나 남았다.
게다가 해외 연사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민우는 신경을 껐다. 리셉션 홀로 들어온 외국인이 이곳을 지나쳐 다른 방향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접수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런데 그때, 뚜벅거리던 구두 소리가 등 뒤에서 멈췄다.
“Bonjour!”
한국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프랑스 인사말이었다.
깜짝 놀란 민우가 몸을 돌렸다. 청안의 신사가 자신을 향해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Bo…… Bonjour?”
민우가 어눌하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청안의 신사의 입에서 쏟아지는 프랑스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침착하자 박민우! 기죽으면 안 돼!’
일단 심호흡을 했다.
민우가 시선을 슬쩍 돌렸다. 강예진은 자리를 비우고 홀 안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이라면 랑느 박사님일 가능성이 높은데 어쩌지? 아, 맞아! 그 방법이라면.’
민우는 펜을 꺼내 프랑스어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발음은 할 줄 모르지만, 글자로 문장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 Je ne parle pas francais. Parlez―vous anglais?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른다. 영어를 할 줄 아냐는 질문이었다. 메모를 본 청안의 신사는 흔쾌히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오. 다시 소개를 해야겠군. 나는 프랑스에서 온 피에르 랑느요.」
민우의 표정도 밝아졌다.
다른 건 몰라도 영어는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한국어를 제외하고 민우에게 가장 친숙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유물의 힘이 더해졌다.
「저는 학회 실행위원 박민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악수를 나눴다. 민우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홀로 뛰어 들어갔다.
“누나! 지금 피에르 랑느 박사님 오셨는데 어떻게 하죠?”
“누가 왔다고?”
“피에르 랑느 박사님이요! 소르본에서 오신.”
마이크를 점검하던 강예진이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마이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벌써 오시다니?”
안 그래도 커다란 그녀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녀도 해외 연사들이 내일 참석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일단 강예진이 접수 테이블로 뛰어왔다.
“아…….”
하지만 키가 크고 멀쑥한 백인 앞에서 강예진은 얌전한 고양이가 되었다.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민우에겐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평소 냉철하기로 소문난 그녀가 이렇게 당황하다니.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이다.
“어쩌지?”
“일단 민 교수님께 보고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맞아.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아무리 내일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방문한 손님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5600여 마일을 날아온 손님이었다.
“여보세요? 예, 선생님. 저 예진인데요…….”
강예진이 전화를 하는 사이 민우는 랑느 박사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랑느 박사는 그녀가 전화를 마치길 기다렸다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소. 미인이시군.」
익숙한 언어가 나오자 강예진이 멋쩍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꾸했다. 어설픈 영어로.
강예진이 민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너 영어 좀 하니?”
“일상회화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네가 말씀 좀 전해드려. 나 회화 손 놓은 지 오래야.”
민우도 발음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영어 회화에서 발음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발음이 아니라 정확한 의사전달이지. 적절한 어휘, 그리고 자신감!’
강예진이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우선 왜 이렇게 일찍 오셨냐고 물어봐. 그리고 도와드릴 일이 없는지도.”
“옙.”
민우는 랑느 박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민우는 몇 년간 미국에서 거주한 사람처럼 보였다.
발음이 조금 엉성하긴 했지만 랑느 박사는 그의 말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박사님의 연설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데, 왜 이렇게 일찍 오셨습니까?.」
「이번 초청에 매우 큰 기대를 품고 있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문학을 어떻게 학술적으로 다루는지 궁금했지. 무엇보다 나는 학회에 온 거지 행사에 온 게 아니오. 학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할 의무가 있소.」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학회는 오전 10시 반부터 시작입니다. 혹시 사전에 연락이 잘못 간 겁니까?」
「아아. 그건 아니오. 호텔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일찍 나와 봤지.」
민우는 그 말을 그대로 강예진에게 전했다. 상식 밖의 대답이었다. 발표자들은 자신의 순서에만 참석한 다음 자리를 뜨는 게 보통이니까.
민우가 물었다.
“민 선생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셨어요?”
“일단 이경훈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본다고 하시네. 근데 왠지 네가 얘기하는 거 보니까 통역 필요 없을 거 같다?”
“설마요.”
민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통역이 있어야죠. 그쪽 전문가인데.”
“하긴. 것도 그렇지.”
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랑느 박사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랑느 박사님. 저희가 학회 개회를 준비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죄송스럽습니다. 일단 마실 거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군. 커피 말고 아무거나 부탁하오.」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 현미녹차 티백을 뜯었다. 종이컵에 준비하기가 뭐해서 자신이 쓰려던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고맙소. 이 차는 무엇이오?」
「현미녹차입니다. 한국의 전통차 중 하나죠.」
민우는 싸구려 티백을 전통차로 포장하는 기지를 보였다. 전통차라는 말에 랑느 박사의 표정에 호기심이 일었다.
「현미녹차? 녹차는 몇 번 마셔봤는데 이건 처음이군. 고맙소.」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랑느 박사는 뜨거운 녹차로 입술을 적셨다. 표정을 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랑느 박사가 말했다.
「사실 내가 이곳에 일찍 온 건 캠퍼스를 구경하고 싶어서였소. 가능하다면 캠퍼스 안내를 해줄 수 있겠소? 이곳이 한국에서 제일 전통 있는 학교라고 들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민우가 강예진에게 말을 전했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우는 데스크를 비우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랑느 박사의 청을 거절하기도 뭐했다. 제대로 응대하지 않으면 민 교수에게 쓴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강예진이 타협안을 꺼냈다.
“일단 네가 안내해 드려. 그 전에 행사 요원이라는 점을 밝히고, 10시 반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말해. 준비는 나머지 애들이랑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네.”
민우는 그 말을 그대로 랑느 박사에게 전했다. 랑느 박사는 두 팔을 벌리며 반가워했다.
곧 민우는 키가 큰 청안의 신사와 함께 리셉션 홀을 나섰다.
아침인데도 햇볕이 뜨거웠다.
* * *
진동을 느낀 민우가 잠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주에게 온 톡이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이 괜찮을 것 같다고 답이 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박사님.」
「오, 괜찮소.」
민우는 수요일에 선우기획으로 찾아가겠다고 답장했다. 그때 너무 자신의 이야기만 한 것 같아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민우가 핸드폰을 집어넣자 기다렸다는 듯 랑느 박사가 질문했다.
「미스터 박. 당신은 어떤 문학을 전공하시오?」
랑느 박사는 호기심이 많았다. 민우의 대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저는 한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 중에서도 현대소설이 주전공입니다.」
「나도 소설에 관심이 많소. 과정은?」
「석사 1학기입니다.」
민우는 랑느 박사가 실망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다. 프랑스의 거장을 한낱 석사 1학기 학생이 보좌하고 있으니 그림이 좋지 않았던 것.
하지만 랑느 박사는 사람 좋게 웃었다.
「나중에 내가 한국문학에 대해 공부할 일이 있으면 좀 도와주시오. 한국은 큰 전쟁을 한번 치르지 않았소? 그 이후에 나온 여러 소설이 우리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소설도 많이 발표되었고 그에 관한 연구도 많이 진행되었죠. 한때 학위논문의 단골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군. 그에 대해 더 이야기해 줄 수 있소?」
두 사람은 1950년대 실존주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인문관 앞에 도착했다. 지나가던 학생 몇몇이 랑느 박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민우는 개의치 않고 인문관을 가리켰다.
「이곳이 인문관입니다. 우리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가 모여 있는 곳이죠. 각국의 어문학을 비롯해서 역사학과 철학의 중심지입니다.」
「오! 그렇소? 흐음.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처럼 보이는군. 무척 인상적이오.」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이 왜 인상적이라는 걸까? 프랑스식 유머인가?
「그런데 박사님. 왜 그렇게 건물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학의 건물은 그곳의 학문적 풍토를 보여주지.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된 거요. 미학적인 관점에서 건축이란 인간의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술이라오.」
민우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시각이었다.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명인대에는 랑느 박사가 좋아할 만한 오래된 한국식 건축물이 한두 개 남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평범한 건물뿐이다.
민우는 솔직하게 그 점을 설명했다.
「사실 명인대의 건물은 이와 대부분 비슷합니다. 별로 특색이라고 할 게 없죠.」
「그렇소?」
그래도 랑느 박사는 건물 관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경영대 건물을 거쳐 자연과학대 건물까지 들른 그의 행보는 중앙도서관에서 끝이 났다.
민우는 혀를 내둘렀다.
‘나이도 지긋하신데 체력이 진짜 좋으시네.’
만약 요즘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민우는 진즉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우우우웅―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것. 벌써 오전 10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박사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시간이 돼서 리셉션 홀로 돌아가야 합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좋소. 안내해 줘서 고맙소.」
그렇게 두 사람은 학회 준비로 한창인 리셉션 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다.
그중엔 프랑스 문학과 교수 이경훈도 있었다. 그는 반갑게 달려 나와 랑느 박사를 맞았다.
알아듣기 힘든 프랑스어의 향연이 펼쳐졌다.
민우는 신경을 끄고 접수 데스크에 털썩 앉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강예진이 부채를 흔들어 땀을 식혀 주었다.
“고생했다. 박민우.”
“고생은요. 자리 오래 비워서 죄송해요.”
“너 없었으면 어쩌나 싶었어. 회화를 오래 안 하다 보니 말문이 막히더라.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지. 쪽팔릴 뻔했어.”
“에이, 누나도 잘하시잖아요. 긴장해서 그런 걸 거예요.”
땀을 식히며 여유를 되찾은 민우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중요한 걸 못했다. 랑느 박사님이 쓴 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 물어봤네.’
그가 워낙 한국의 문화와 문학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하나하나 답하다 보니 질문할 타이밍을 놓쳤다. 돌아다니느라 힘든 탓도 있었다.
‘그래도 오늘 여기에 나오셨으니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
민우는 기대감을 품으며 랑느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경훈 교수와 대화를 나누며 학회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랑느 박사가 자신의 발표문이 나오자 정독을 시작했다.
한글로 번역된 거라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닥터 리. 여기에 들어간 주석은 무엇이오?」
원문에는 없는 주석이었다.
이경훈 교수가 꼼꼼히 읽더니, 그 주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박사께서 쓰신 용어에 대한 해설입니다. 번역한 분이 직접 달아 주셨나 보군요.」
「음? 닥터 리가 번역한 게 아니오?」
「애석하게도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민의 제자 중 하나가 번역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용이 뭔지 알려주시오.」
이경훈 교수는 주석에 달린 내용을 그대로 프랑스어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던 랑느 박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확한 해설이군. 혹시 이 해설을 달아준 분을 만날 순 없겠소?」
「이따 닥터 민이 오면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꼭 부탁하오.」
그 무렵, 이경훈 교수가 언급한 그 주인공은 접수 데스크에 앉아 학회 회원들의 등록을 돕고 있었다.